7. 이것이 성령세례다
(책) [이것이
성령세례다]
(저자:
이화영
목사)
(소개의 글): 우리가,
Andrew Murray (1828-1917), E. W. Kenyon (1867–1948), Martin Lloyd Jones (1899–1981), Kenneth E. Hagin (1917–2003), Dennis Bennett (1917–1991) 와 같이 1800년도 이후에 기독교계에서 꽤 잘 알려진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성령 세례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들의 성령세례에 관한 해석들이 다 동일하지 않고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세례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해석과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오직 그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한 이화영 목사의 글은 다행스럽게도 성령세례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책의 일부내용을 발췌하여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립니다. 이화영 목사의 책, [이것이 성령세례다] 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발간된 책을 구입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이 글을 꼭 여러 번 읽으시고 그 내용을 잘 소화하셔서 성령세례를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영진 목사)
(책의 목차):
(1장. 성령세례에 대한 해프닝과 실제 상황)
(2장. 성령세례 학설 소개)
3장. 성령중생이란 무엇인가?
4장.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5장. 성령내주란 무엇인가?
6장.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7장. 성령연합이란 무엇인가?)
(8장. 성령은사란 무엇인가?)
(9장. 성령열매란 무엇인가?)
(10장. 성령세례의 실제)
11장. 나의 영적 주소는 어디인가?
(12장. 개혁주의와 오순절주의)
(13장. 마지막 호소)
(부록: 목사란 누구인가?)
<참고>: 위 목차에서 괄호 안의 장들은 아래의 글에서 생략되었슴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3장. 성령중생(성령으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성령중생교리를 잠깐이라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성령중생은 성령세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중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사전은 성령중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중생이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새 생명을 가지기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령중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육(the flesh: 육신)으로 난 것은 육(flesh)이요 영(the Spirit: 성령)으로 난 것은 영(spirit: 거듭난 영)이니." (요 3:6)
영적 새 생명을 가진 것을 다른 말로 '거듭남', '영생을 얻음',
'구원을 받음'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건전한 신학자 중에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혹은 하나님을 믿을 때)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옳은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사실을 거듭거듭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이상의 말씀만으로도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중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중생교리는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에게나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에게나 똑같이 진리로 인정되는 교리입니다. 정통 교회 신학자들 사이에는 이에 대한 논란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성령중생교리는 더 이상 논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중생을 성령세례로 보는 데 있습니다. 이 학설이 많은 신자들에게 바른 진리로 믿어지는 데 있습니다. 이 학설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성경을
면밀하게 검토해 볼 때, 이 학설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릇된
학설을 진리로 믿어 온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성령론을 다시 검토하는 수고를 해서라도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장. 성령세례(洗灃)란 무엇인가?
1. 성령세례론에 들어가는 말:
성령세례(the baptism with or in the Holy Spirit)란 무엇입니까?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에 대한 대답이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중생이 성령세례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중생한 신자가 오순절과 같이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관한 신학논쟁처럼 치열한 신학논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치열한 신학논쟁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12:13입니다. 모든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놓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특히 이 구절은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단회론자들은 이 구절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치고 이 구절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이 없었다면 성령세례 단회론이 이렇게까지 확산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은 이 구절 때문에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연속론자들은
단회론자들이 고린도전서 12:13만 들이대면 제대로 반박을 못해서 쩔쩔맵니다(저자의 의견임). 그렇다고 해서 단회론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
현재 한국의 대표적 성령세례 단회론자 중의 한 사람은 총신대학교 이한수 교수입니다. 이한수 교수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과 성령]에서 고린도전서 12:13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성령세례 단회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한수 교수의 글은
매우 전문적인 용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인용하면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가능한 한 쉽게 풀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이한수 교수의 주장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명백하게 성령세례를 표현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2:13일 것이다. 이 구절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 단회론자(필자 주)들에게도 중요하다. 이 구절은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 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
1) 바울은 1절에서 다' (모두)라는 말을 두번이나 사용한다. 다 (모두)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고린도교인들 '모두'가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2) 13절의 전치사구 '한 성령으로' 에서의 헬라어 '엔'
(ev-으로, 혹은 안에서)은 상황에
따라서 '한 성령으로'를 뜻할 수도 있고, '한 성령 안에서'를 뜻할 수도 있다. 이미 고린도전서12:3과 9절에서 '엔' 이 '한 성령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13절의 '엔'도 '한 성령으로' 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럴 경우 세례를 베풀어 한 몸이 되게 하는 일이 성령에
의해서 실행되는 것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곧 성령세례 받기를 사모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주장에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곧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주장이 옳다.
3)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옳다는 것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동사의 사용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성경에서 이 동사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물세례를 받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고(고전 1:13-17), 다른 하나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6:2-5).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성령세례를 모든 신자가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자가 성령으로 회심하여 한 몸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하면 성령 세례는 사람이 회심 이후에 독립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받을 때 모든 신자가 믿음을 통해 누구나 다 가지는 경험이다.
이한수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을 보니 성령세례는 예수 믿은 후에 일부 신자들만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세례는 모든 신자가 무조건 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곧 성령세례가 분명하다. 이 밖의 다른 성령세례는 없다."
다른 단회론자들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도 이한수 교수와 대동 소이합니다. 다른 이들의 주장도 보겠습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는 “물세례가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듯이 성령세례 역시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파쇠 목사도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주경신학자 캠벨 몰간
목사 역시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달라스 신학교 교수 존 월부어드 역시 고린도전서 12:13을 근거로 성령세례 단회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은 그의 주장입니다.
"이 모든 진리를 깊이 연구하며 고찰한 결과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성령의 세례는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과연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는데도 그들을 보고 "너희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결론은 성경을 충분히 검토해 본 후에 내리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결론 내리면 큰 폐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추가적인 반론>: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면,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자동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면, 우리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을 때,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경험했던 현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났었는가?? 우리는 그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어떤 방언을 말했고 지금도 방언을 계속 말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예언과 같은 외적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는가? 아니다. 우리는 거의 다 처음 믿자마자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믿자마자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슴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이 성령의 세례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성령세례는 서로 다른 것임을 가리킨다.
3.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
현대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의 대표는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일 것입니다. 제가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성령세례]라는 무게 있는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 책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이드 존즈 목사는 그 책에서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을 빚어 온 고린도전서 12:13을 부실하게 해석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날카로운 반론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은 성령세례논쟁이 계속되는 빌미만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고린도전서 12:13에 대한 해석을 되도록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마지막으로 내가 다루기를 두려워하는 어려움으로
인도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고린도전서 12:13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다(모두)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이런 표현을 볼 때 성령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연 이 구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성령세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 라는 말의 전치사는 '엔' (ev: in)입니다. 이 말은 '안에서'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의해서' 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영어
번역 성경 대다수가 '성령에 의해서' 라는 해석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12:13은 너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너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할까요? 그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까요? 문맥을 볼 때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분쟁과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모든 신자들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고린도전서 12:13은 '성령세례' 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목사의 주장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솔직하게 고린도전서 12:13을 해석하는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실토합니다. 이 말은 이 구절을 자신있게 해석할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지 않고서는 성령세례에 관해 충분히 설명했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없는 상태로 이 구절을 해석하다 보니 자연히 무리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저서 [성령세례]를 보면, 그는 성령세례를 두 종류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생시키는 성령세례‘와 '오순절
성령세례'가 그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중생시키는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베푸시는 것이고, 반면에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12:13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예수님이 주시는 '오순절 성령세례'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구절은 성령님이 주시는 '중생시키는 성령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가 고린도전서 12:13에서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을 '우리가 다 성령으로 중생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이상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임)
물론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설명하겠지만, 고린도전서 12:13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명백하게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 받은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2:13을 불충분하게 해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세례 연속론을 깊이 있게 설명한 것을 볼 때(성령세례 연속론은
맞는 주장이지만 고전 12:13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애스베리 신학교 존 T. 시먼즈 박사 역시 성령세례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은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한 세례'와 '성령과 함께 한 세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의 세례는 성령에 의한 세례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3:11의 세례는 매개자는 그리스도시고, 성분은 성령님이시다. 이것은 곧 성령과 함께 한 세례이다."
이런 주장은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세례를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와 '성령이 주시는
성령세례'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 어디에도 성령세례를 '성령이 중생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친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성령이 오셔서 능력의 세례를 주실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성령이 오셔서 세례를 통하여 중생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세례를 말할 때는 언제나 오순절과 같이 '성령이 신자에게 오셔서 능력을 주시고 영원히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나 시먼즈 박사의 해석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2) 모든 성경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1; 요한복음 14:16; 15:26; 16:7; 누가복음 11:13; 요한복음 20:22 등이 그 증거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나 시먼즈 박사의 주장처럼 "성령이 세례를 주신다"고 가르친 성경 구절은 한 곳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예수님)이 보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와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는 등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이 단독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나 시먼즈 박사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가 있고, 성령이 주시는 성령세례가 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세례이고, 성령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중생시키는 세례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인
것입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의 명성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성령세례 연속론을
믿는 신학자들 중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입장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은 로이드 존스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 구절을 해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래저래 고린도전서 12:13은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에게는 '뜨거운 감자'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필자의 고린도전서 12:13 해석:
도대체 고린도전서 12:13은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한 성령세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까?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교회를 이렇게 분열시키는 것입니까? 정녕 이 구절은 영원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독자들이 외람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며 당장 따지시겠지요? 무슨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려고 그러냐고 핀잔을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신학자들도 해석을 못해서 쩔쩔매는 구절을 당신같은 무명의 시골 교회 목사가 제대로 해석할 리가 없다고 하며 무시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충분히 그러실 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도 엄청난 소리를 하니까 이 시골 교회 목사가 무슨 소리를 하나 하고 한번 들어보시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판단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하나님의
큰 은혜로 깨달은 고린도전서 12:13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를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한 (중생하기만 한)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라는 전제 하에 해석했습니다. 그 때문에 고린도전서 12:13을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해서 무리하게 이 구절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리한 해석은
또 다른 무리한 해석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겨운 신학 논쟁이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연구한 결과, 고린도전서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 인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전제는 지금까지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전제와는 정반대입니다. 만일 제가 이 전제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저의 주장은 즉시 폐기 처분되고 말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서 교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보잘 것 없는 시골 교회 목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신학적인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떨어지면 박살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저의 이러한 위험한 시도를 경계하는 이들도 많고 경고하는 이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해도 저는 그만둘 마음이 없습니다.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는 목숨을
거는 것조차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고린도전서는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전제가 맞는 것일까요?
저는 우선 총신대 차영배 교수의 설명부터 소개하려고 합니다. 차영배 교수는 고린도전서12:13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인도하에 있었고, 또 온 교회가 성령의 은사에 흡족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모두 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고린도교회의 사정이다. 거기에 그 때에는 누구든지 교회에 입교하기만 하면 단시일 내에 은혜를 풍성히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차영배 교수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점은
바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고린도전서를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고린도전서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 는 증거들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증거들을 많이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7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 1:7).
여기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랜드종합주석이 이 구절을 해석한 것을 보면 저의 주장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는 넓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사를 지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성도 개개인이 받는 각각의 특수한 은사를
지칭한다" (고전 12:8-11: 성령의 9가지 은사).
고린도전서 1:7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를 받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말을 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 문제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특히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성령의 은사 문제를 길게 거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 이에 대해서는 화란의 자유대학교 헤르만 바빙크(J. H. Bavinck) 박사가 바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곧 사도행전 8:15; 10:44; 15:8 등에서 언급된 오순절의 성령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
없다. 세례가 항상 은사를 주지 못했고,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서 은사가 언제나 따른 것은 아니다. 이는 사도행전 8:15을 보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그 중에 누구도 성령을 받지 못했고, 사도들의 안수로 비로소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 19:6에 주어진 은사도 (물)세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안수의 결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바빙크 박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단순히 물세례를 받아 예수만 믿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았을 때는 누구에게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6에 나오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경우만봐도 그들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은 후에야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에 가장 보편적인 방언 은사 하나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120문도나 고넬료 집안 사람들, 그리고 현재의 성령 받은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보더라도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방언을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사도들이라도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방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을 했기 때문에 혼란까지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부디 방언이나 예언을 할 때 질서를 지키라고 당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4:2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 14:39-40).
로이드 존스 목사도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은사의 나타남으로 인하여 혼란이 일어난 것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2, 13, 14장에서 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으로 이 세 장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모종의 지나침과 오해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이나 예언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무질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바로 본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너무 많이 나타나서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고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이 고린도전서 12:13의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씀을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바울이 성령으로 중생했다는 뜻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닌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2:13 전후 문맥을 보아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 전후 문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의 이전 문맥을 보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 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4-11).
고린도전서 12:13의 이후 문맥도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 14:39-40).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3 이전 문맥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각종 은사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이후 문맥에서는 성령세례를 받은 후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거들로 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바울이 자기의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하고 글을 썼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나 듣고 믿음에서나” (갈 3.5).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살전 4:8).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보고 "너희가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면 위의 본문들에서 '성령을 받았다' 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성령을 받으라' 혹은 '성령을 받았다' 라고 표현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단어인 것을 확인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요 20:22; 행 10:47). 그러므로 바울이 자기의 서신서를 받는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성령을 주셨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서신은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전서 역시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바울 서신을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제가 고린도전서가 성령 받은 신자들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고린도전서를 바울이 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바울이 쓴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2:13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 자신이 증언하는 대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시무한 교회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바울의 말에도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복음으로 전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했다는 뜻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한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에 있어서 주후 51년 말엽에 이곳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거기 18개월 동안 유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행 18:1-11). 그는 필경 주후 53년경에 고린도를 떠나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에 유하면서 주후 57년 봄에 본서를 저술하여 보낸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도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요약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11).
이처럼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자기가 직접 전도한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역은 두 가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사역은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바울의 말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도 복음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여 많은 고린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고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고전 4:15)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사역은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들을 만나면 서둘러 안수해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세례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바울에게는 신자에게 안수를 하면 안수 받은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안수를 해주어서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2).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6-7).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가서 한 일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볼로가 전도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부터 확인합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을 확인하자 서둘러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해줍니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오기 전에 어디에서 목회를 했습니까? 이미 확인했듯이 고린도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했습니다(행 18:1-23). 그 후 핍박이 일어나서 이곳 저곳을 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에베소에 와서 그 곳에서 다시 오랜 세월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이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오자마자 성도들을 향해 다짜고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안 받았으면 안수를 해서 성령을 받게 해
주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을 확인합니다. 그는 즉시 그들에게 안수를 해서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게 해줍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오기 전부터 안수를 하면 그것을 받은 신자가성령을 받는 능력이 있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18개월 동안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안수를 해주어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 역시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가
있으면 서둘러서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도와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 본문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4-17).
본문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사도들은 즉시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가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만일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 자들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갔다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 입니다.
"당신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게 사십시오."
하지만 사도들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가서 세례 문답 공부부터
시켰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 일부터 시켰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 성도들을 만나자마자 즉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해 주는 일부터 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행 8:15)
중간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이 예수 믿는 것이 확실했으므로 사도들은 두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사도들의 안수 기도를 통해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요점: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것이 아니고 엄연히 다른 사건이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행 8:12-18; 눅 11:13; 요 7:38-39; 20:22). 이처럼 사도들은 성령을 못 받은 신자들을 만나기만 하면 성령부터 받게 해주기를
힘썼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점은 바울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증거입니다.
저는 성령을 받고 난 후에야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성령 받지 않은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이 성령부터 받게 해 준 심정이 이해되었습니다. 저 역시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사도들과 같은 소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령을 못 받은 신자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분들은 제 말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여튼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전도하여 그들을 예수 믿게 한 후 서둘러서
그들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게 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가서 한
일을 볼 때 그렇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성령받지 못한 신자들에게 한 것을
볼 때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다른 목회자들이 성령받지 못한 신자들에게 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울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더욱더 실감 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눈에서 비늘이 벗어져 안 보이던 눈이 떠진 생생한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행 9:17-19). 이런 증거를 통해서도 바울이 성령을 못 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게 해주는 일에 힘썼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을 받게 해주는 것이 병을 고쳐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고 신기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출신 시몬이 그 사실을 충분히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마술사 출신 시몬은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주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그런 능력을 받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행 8:18-19). 시몬은 빌립이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는 돈을 주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주는
것을 보고는 돈을 주며 그런 능력을 자기도 갖게 해 달라고 청탁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성령세례를
받도록 해주는 일이 놀랍고 신기하고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사람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한 후에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도와주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안수를 해주지 않아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바울의 안수에 의해
성령세례를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인도에 따라 오순절의 120문도 들처럼 스스로 기도하다가 성령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성령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확신해도 좋을
증거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 라는 저의 주장이
옳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즉,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멀리 떠났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를 떠난
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썼다고 합시다. 과연 어떻게 썼을까요? 또는 성령세례는 받았으되 성령세례를 베풀 능력을 받지 못한 빌립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했다고 합시다. 그 후에 빌립이 고린도를 떠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합시다. 과연 어떻게
썼을까요? 틀림없이 그들은 고린도서를 기록할 때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성령은 받지
못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게 해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같이 성령을 받게 해줄 수 있는 이를 초청해서
성령을 받도록 하라.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았든지, 그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성도들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지 않습니까?"
*참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성령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는 수 없이 성령세례를 말할 때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 라고 표현합니다. 이 점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부디 '성령세례'를 오순절 성령세례와
다른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성령세례라는 말을 오순절 성령세례와 다른 뜻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5. 성령세례 연속론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사도행전 10장을 보십시오. 그러면 베드로가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의 집 안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을 확인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세례
주는 것을 금하리요” (행 10:47).
베드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이 받은 성령세례와 동일한(우리와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도 성령세례는 오순절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간 사실이 다른 사도들에게 알려진 내용이 나옵니다(행 11:1).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절대로 금하고있었습니다. 이런 문화가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잘못된
문화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간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할례파
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1:15-16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5-16).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언이 사도들인 자기들 뿐만 아니라 고넬료 집안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그 예언 때문에 고넬료 집안 사람들도 우리들과 동일하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를 들어서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고넬료 집 안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오순절에 받았던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민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일을 내가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자 할례자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신
것을 보니 이방인도 구원해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볼 때도
오순절 이후에도 성령세례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말세인가, 말세들인가?
저는 성령세례 연속론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를 사도행전 2:17을 통해서 제시하고 싶습니다.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하나님이 언제 성령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까? 요엘서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28-29).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서 '그 후'에 성령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후'가 '말세'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후'를 '말세'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세'는 헬라어로 '말세들' (마지막 날들)입니다. '말세' (단수)와 '말세들' (복수)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말세'는
하루를 뜻하지만, '말세들'은 여러 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성경의 번역을 보겠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이뤄지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너희 청년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새성경 행 2:17).
말세들(마지막 날들)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종말까지를 뜻합니다. 박윤선 박사는 본문의 말세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말세란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이
내다보던 신약시대를 말한다.“
말세에 대해 A. W. 토저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세에 모든 육체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에서 '말세'란 예수님의 처음 오심부터 다시 오심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능력을 부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유효 기간은 교회가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기간 전체에 해당한다. "
말세들(마지막 날들)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종말까지를 뜻한다는 것은 요엘의 예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에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 ('말세들' 필자 주)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0).
위의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과 장차 종말에 일어날 일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17절의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라는 말씀은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20절의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는 말씀은 장차 종말(재림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종말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대 사건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말세 예언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계 6:12).
이처럼 요엘이 예언한 말세는 오순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서 종말까지의
모든 날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정확하게 말세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성령세례를 주신다고 하지 않고 '말세들'에 성령세례를 주신다고 한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약시대 전체가 말세인 것이 확실하고 말세를 복수로 사용한 것이 분명한 이상,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순절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베드로가 '말세' 라고 표현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세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세들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예언 한마디만 보아도, 성령세례가 오순절에 단회로 끝나지 않고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가
오순절 이후 종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세례가 오순절로 끝났다면 베드로는 반드시 ‘말세'라는 단어를 단수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철저하게 단회적인 사건에는 단수를 사용하고 반복적인 사건에는
복수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단회적인 사건에는 단수를 사용하고 반복적인 사건에는 복수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다음의 성구들에서도 증명됩니다.
1) 말세를 단수로 사용한 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0).
위의 구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세상 끝 (말세)에 단번에 (단회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세상 끝 (말세)이라는 단수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의 구 속사역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성경 구절의 ‘말세’ 역시 단수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5).
이 구절에서는 왜 ‘말세'를 단수로 사용했습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구원(영화 구원)이 단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구속하는 십자가 구원 사역이 한 번에 이루어졌으므로 ’말세'를 단수로 사용한 것처럼,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구원도 한 번에 끝날 것이므로 '말세'를 단수로 사용한
것입니다.
2) 말세를 복수로 사용한 예:
이에 반해 성경은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할 때는 언제나 복수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 9:26에서 ‘말세’ (세상 끝)라고 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단어를 복수로 사용해서 ‘말세들' 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느니라” (고전 10:11).
여기의 ’말세'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 '말세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9:26에 사용된 단어 '세상 끝‘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어를 단수(말세)로 사용했고, 바울은 이 단어를 복수(말세들)로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왜 말세'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했을까요? 예수님의 속죄 제사는 단회에 끝났지만,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은 계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세'를 복수로 사용한
예를 몇 개만 더 들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1).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조롱하여” (벧후 3:3).
위의 구절에서 사용한 ’말세'는 모두 복수입니다. 오순절도 말세이고 오순절이 훨씬 지나서 이 서신들을 쓰는 지금도 말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말세'를 복수로 사용한것은
고통하는 일이나, 재물을 쌓는 일이나, 조롱하는 자들이
생기는 일등이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저자들은 같은 단어라도 일어나는 횟수를 철저하게 따져서 사용합니다. 한번 일어나면 단수를 사용하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복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 예언이 ’말세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표현된 이상 성령세례는 오순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 성령세례가 부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부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야 성경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7. 만민인가, 120문도인가?
<<성령세례가 오순절에 단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된다는 분명한 증거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세들에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은 요엘의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은 오순절에 단회로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 때문에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요엘이 예언한 '만민'이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120문도를 뜻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민'을 120문도와 그 이후의 성도들을 모두 의미한다고 하게 되면 성령세례 단회론을 주장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건대 이런 주장은 완전히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만민'이라고 표현할 때는 '적은 수의 사람'을 뜻하지 않고 항상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문을 직역한 새성경을 보십시오.
“마지막 날들에 이뤄지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너희 청년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새성경 행 2:17).
주님은 요엘을 통해서 마지막 날들에 모든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 주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120문도에게만 성령을 부어 주겠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성경말씀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말씀도 ‘만만' 이 많은 수의 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8).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4).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이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악인들까지 복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극소수의
신자들에게만 복을 준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약속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몇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만민도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시 66:8).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7).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라"는 말씀이나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 역시 소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이렇기 때문에 그랜드 종합주석도 만민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다리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요엘의 "말세들에 만민에게 성령세례를 주리라"는 약속은 극소수인 ‘120문도에게만 성령세례를 주리라'는 약속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순절의 120문도를 시작으로 '세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성령세례를 주리라' 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이후에도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가
계속 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반드시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라는 요엘의 예언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어찌 120문도에게만 해당되는 예언일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120문도만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안수를 받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행 19:6). 그러므로 요엘의 예언을 120문도에게만 해당 된다고 해석하면 억지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120문도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많은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120문도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성령 받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마땅합니다.
하용조 목사는 사도행전 강해 설교집 [성령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 받기를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사건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성령이 우리에게, 교회 안에, 공동체 안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이 성령 사건은 이제부터 끊임없이 전개될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이 성령님을 믿습니다. 오순절의 체험을 믿습니다. 저는 이 오순절날의 성령 체험이 강렬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자신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같이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일을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을 체험하면 엄청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순절을 찬양합니다."
또한 A.
W. 토저 목사가 그의 책 [이것이 성령님이다]에서 우리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현대 교회에서 발견되는 아주 중대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의 오심은 영원히 단번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성령이 또 오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오신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더 이상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믿을 권리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떠나 멋대로 믿을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세례 단회론(필자 주)을 믿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겠다. 풍성한 은혜와 영적 능력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1세기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약속인가? 그들이
거듭났으면 우리도 자동으로 거듭나는 것인가? 당신은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거듭날 수 있는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가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해서 우리까지 자동으로 성령충만한
것인가? AD 33년에 사도 베드로가 먹은 음식이 지금 나를 먹여 살리는가?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받은 성령충만이 내게 유익이 되는가? 아니면 그가 받은
것을 나도 받아야 하는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나는 당신께 간곡히 부탁한다. 내가 이제까지 말한 것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깊이 묵상해 보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믿고 순종하라. 그러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8. 구속사의 사이클 이론: (이것은 잘못된 이론임)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은 구속사의 사이클 이론을 내세워서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리차드 개핀 교수가 구속사의 사이클 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일 것입니다. 다음은 그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본인의 입장은 오순절사건은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 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개핀 교수의 주장을 다시 정리하면 구속사의 사이클이 한번으로 모두 끝났으므로
성령세례도 오순절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성령
강림이 한번으로 모두 끝난 것처럼,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성령세례도 오순절에 한번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에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이 곧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다음의 두가지 일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신자에게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1) 성경은 죄인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성령중생'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생이
오순절 이전의 신자에게 성령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처럼, 오순절 이후의 신자에게도 중생이 성령에 의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오순절 이후에도 각 개인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0-31).
예수님은 한 번 죽으시고 한 번 부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오순절 이후에도 각 사람에게
계속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적용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시다. 그때 그는 예수 믿는 순간에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줍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3).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5-6).
초대교회의 바울이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승천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각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2천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때 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믿는 자의 심령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2) 성경은 중생한 신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권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세례가 오순절의 120문도에게 성령의 역사로 일어났던 것처럼, 오순절
이후의 신자에게도 성령의 역사로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는 오순절 이전에 예수를 믿었지만 오순절이 되어서야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사의 사이클이 옛날에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볼 때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구속사의 사이클이 오순절로 끝났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오순절 이후에는 구속사가 다시 전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곳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사이클 이론은 신학자들의 이론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닌 것입니다.
총신대학원 차영배 교수는 구속사가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절대적인 단회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은혜가 모든 먼 곳의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이 계속 반복하여 강림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의 도는 단회적이지만 그 적용은 연속적이다. 성령은 오시고 또 오셔서 각자에게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신다."
차영배 교수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설명한 것입니다.
(부연 설명):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던 있던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별도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 강림이 이 땅에 이미 이루어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각자가 믿음으로 구해서 그 성령을 받지(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죄사함을 받는 것과 같이, 성령님을 영접해야만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가 마치 치유를 경험하는 것과 원리가 같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위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을 때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지도 않는데 우리가 자동적으로 나음을 입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취해야 한다. 즉,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할 때 우리는 나음을 경험할 수가 있다.
9. 사도행전 2:37-41에 대한 오해:
간혹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에 의해서 사도행전 2:37-41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한국선교훈련원 정흥호 교수가 그런 이들 중에 포함됩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38-39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8-39).
이 구절에 대한 정흥호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37-41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며, 모든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날로부터 약속된 성령의 부어 주심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전제하에서 완성되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 믿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성령에 참여하게 되며, 또한 받게 되는 것이다."
정흥호 교수의 주장은 "사도행전 2:37-41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것이
성령세례인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2:38-39의 말은 베드로의 말입니다. 베드로가 왜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오순절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두 성령을 받게 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신자에게 안수를
하면 안수 받는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8:14-17 참조). 심지어 베드로는 설교만 해도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10:44-46).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자기가 안수해서 그들 모두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개인적이고 불완전한 판단에 따른 것이니 주의 요망!!)
만일 베드로가 빌립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할 수는 있어도 성령을
받게 해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틀림없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성령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그래서, 죄 사함을 받으면, 너희는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의 의미??>:
한편 사도행전 2:38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 말씀은 "너희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 같다면 사도행전 2:38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곧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아라."
<<하지만 베드로의 말 어디에도 죄 사함 받는 것이
곧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곧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이 약속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이 약속은 성령세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사도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세례의 약속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고 분명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약속은 오순절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오순절 이후 지금까지 모든 신자에게 살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유효합니다. 이 약속을 믿고 성령세례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자는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이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성령세례를 받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지 않다가 예수님을 믿은 지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만 합니다.>>
10. 성령세례의 목적: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왜 성령세례를 주실까요?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성령세례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성령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열한 사도에게
주신 유명한 예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수님은 사도로 세우신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너희를 내 증인으로 삼기 위하여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큰 능력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온갖 핍박을 무릅쓰고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는 성령세례의 목적 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해 줍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역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허락하신 어떤 능력입니다. '성화'가 개인적인
인품과 신앙 인격에 관한 문제라면 이 '성령세례'는 제 삼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증언을 능력 있게 하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도 성령세례의 목적 중의 하나가 복음 전파라는 사실을
사도행전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줍니다.
"진정한 성령의 운동과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령의 임재를 얘기하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높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사건 없이 성령 사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세례의 목적이 복음 전파에 있으므로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사도들처럼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울 것인지, 아니면 디도처럼 한
교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무조건 땅
끝으로 가서도 안 되고, 무조건 한 교회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땅 끝으로 가야 할 사람은 반드시 땅 끝으로 가야 하지만,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어떤 직분으로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도 결정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사도가 될 수는 없고, 모두 선지자나 장로나 집사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으면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두 일반 성도로 남아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직분으로 주님을 섬길 것인지는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에 따라 해야
합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해서도 안 되고, 남이 안 한다고 나도 안 해서도 안 됩니다. 사명을 확인하지 않고 특별한 사역자의
길에 뛰어들어서 평생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생업을 해결하는 목회자가 2,000명이 넘는 사실은 사명 확인의 중요성을 증거해
줍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명을 확인하지 않고 신학교에 간 사람들일 것입니다. 반면, 사명이 있는데도 사역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선지자 요나처럼 징계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욘 1장).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후에는 어떤 직분으로 복음을 전파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어떤 직분을 주시든지 최선을 다해서 그 직분을 수행해야 합니다.
2)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세례를 주십니다.
바울은 성령이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교회의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
성령은 주로 직분자를 세워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십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는 데 일꾼이 꼭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각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에 사역자를 세우는 일을 힘썼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 것은
이 점을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5).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 있고 지혜
있는 직분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경건 생활에 힘써서 더욱 훌륭한 직분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직분자가 된 성도는 다른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은 모든 직분자에게 적용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1-2).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예나 지금이나 일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합니다(눅 10:2). 그러므로
직분자가 되지 못한 성도는 성령을 받아서 직분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더욱
훌륭한 직분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세례를 주신 목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자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직분자가 있는가 하면, 성령세례를 받은 직분자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자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직분자를 더 원하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성령을 받지 못한 직분자였던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을 것을 명령하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직분자는 하루 속히
성령 받기를 사모하고 힘쓰는 것이 주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성령세례를 주십니다.
이 사실은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1:22).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을 성령으로 인치신다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순교를 불사하고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매우 약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조금만 환난과 핍박이 와도 쉽게 시험에 들고 맙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부흥사 김익두 목사는 성령 받지 못한 사도들을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여
서로 시기하고 싸웠으며, 칼을 뽑는 혈기를 부렸습니다. 도망도 하고 배반도 했으며, 극진히 사랑한다면서도 무서워 멀리 서서 구경만 했습니다. 주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한마디도 죄 없으시다는 증거도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익두 목사는 또 이렇게도 설교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교회건물은 장엄하고
음악의 설비가 야단스러워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도 성령을 소멸시키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흔들리는 정도가 매우 약합니다. 또한 흔들린 후에도 훨씬 회복
속도가 빠릅니다.
성령세례, 구원의 확신을 갖고 흔들림 없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라도 꼭 받아야 합니다.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 교회 건설,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성령세례를 꼭 받아야 합니다.
11. 회개해야 성령을 받는다
민경배 교수의 [한국 기독교사]를 보면 한국에서 대 부흥이 시작된 것은 1903년입니다. 그 해에 강원도 북쪽에서 선교하던 캐나다인 의료 선교사 하디(Hardie) 박사가 몇 년 동안 선교를 해도 결실이 없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회개합니다. 그러던 중에 성령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디 박사가 성령체험을 한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그를 초청하여 수양회를
엽니다. 하디 박사는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설교 주제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하디 박사가 선교사들 수양회에서 설교하자 모든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후 하디 박사는 한국 성도들의 수양회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때도 한국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 전역에 있는 선교 본부 열 군데를 다니면서 같은 설교를 합니다. 그 때도 많은 은혜가 임합니다.
한편, 평양에서는 길선주 목사의 주도로 새벽 기도회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 기도회가
한국교회 부흥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06년,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 20여명이 평양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이 한국에도 큰 부흥을 주시기를 기도하기로 결의합니다. 즉
매일 낮 12시에 모여서 기도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20여 명의 선교사들이 매일 정오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납니다. 그러나 아무런 부흥의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한 선교사가 제안합니다.
"우리가 한 달 동안 기도를 했으나 특별한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각자 사역을 하면서 집에서 기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떤 선교사에게는 이 제안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인도'에서 주신 부흥을 한국에도 주실 것을 믿으며 계속 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기도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더 늘리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기도회 시간을 매일 정오에서
매일 오후 4시로 변경합니다. 오후 4시부터 저녁 먹을 때까지 힘써 기도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기도회가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들은 기도를
계속합니다.
1907년 첫 주간이 됩니다. 북한 전역에서 약 700여명의 열렬한 신자들이 평양에 모여 연례 수양회를 합니다. 모두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을 믿고 수양회를 진행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주여! 성신을 부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한 주간이 지나고 주일이 되었는데도 특별한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주일 밤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입니다. 수양회 마지막 날 저녁입니다. 주일 밤으로 수양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1,500여 명이나 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찬송하고 기도를 해도 은혜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다음날에는 모두 자기
교회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모두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갑자기 장대현 교회 길선주 장로가 일어섭니다. 놀랍게도 길선주 장로가 공개적으로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깜짝 놀라 눈이 휘둥 그래져서 길선주 장로를 바라봅니다. 길선주 장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저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을 하기 전에 저를 불렀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길장로가 내 집 살림을 돌봐 주시오”
‘아무 염려 마시오. 내가 잘 돌봐드릴 테니.'
하지만 저는 친구의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떼어 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길선주 장로가 회개를 하자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사단의 장벽이 일시에 무너져
버립니다. 죄책감이 청중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성도들이 여기저기서 통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예배가 7시부터 시작되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도 집회가 끝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울면서 일어나 자기의 죄를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기도회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나갑니다.
12. 박찬미 집사, 성령세례를 받다!
우리 교회의 박찬미 집사는 만화 그림과 노래에 재능이 있는 자매입니다. 오랫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박찬미 집사는 미용실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집사에게는 약 1년 전 까지만 해도 남에게 알릴 수 없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화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화 중독에 걸렸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박집사는 만화책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낮에는 미용실 일을 하고 밤에는 만화책을 빌려다가 읽는데, 손가락이 굳어져서 펴지지 않을 정도로 읽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만화를 볼 때는
심신이 녹초가 될 때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새벽 1-2시까지는 보통이고 3-4시까지도 읽었다고 합니다. 토요일에 그렇게 하고 나면 주일 예배 때 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만화를
안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만화 중독이나 인터넷 게임 중독이나 인터넷 바둑 중독이나
매 일반인가 봅니다. 중독의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 살던 박 집사가 2004년도에 양산 감림산기도원에서 실시하는 평신도 여름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사는 전광훈 목사였습니다. 부흥회가 시작되어 설교하기 전에 찬양을 할 때입니다. 한참 열심히 찬양하던 중에 박집사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갑자기 몸이 뒤로 벌렁 넘어지고, 방언이 터진 것입니다. 다음 날에는 온몸이 진동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박 집사는 이런 체험을 한 이후부터 만화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쉽게 절제되었습니다. 그대신 기도와 찬송이 좋아졌습니다. 자연히 성령충만한 삶,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현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후 박찬미 집사는 우리 교회의 찬양 인도자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일 낮예배와 주일 밤 예배 전에 약 20-30분간 찬양팀과 함께 찬양을 인도합니다. 박 집사의 찬양인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2006년 2월에
박찬미 집사가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아들을 낳았습니다. 박 집사에게는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집사 남편은 단 두 형제밖에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형제 모두 딸만 둘씩 낳았습니다. 박집사의 시아버지가 손자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며느리인
박집사가 아들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부담 때문에 박집사는 둘째
딸을 낳고는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박집사에게 하나님이 그야말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박집사는 물론 온 집안의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3. 원종수 학생, 성령세례를 받다!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원종수 박사가 대전고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1967년 11월
말 어느 추운 겨울날입니다. 평소에 잘 아는 전도사가 종수네 집을 찾아옵니다. 그 전도사는 종수네 형편이 매우 어려운 것을 보자 무척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지만 "죽더라도 예배드리고 죽읍시다"라고 하며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예배 도중에 전도사가 이런 소리를 합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받아야 갑니다."
종수는 매우 궁금합니다. 하지만 예배 중이라 물을 수가 없어서 참습니다. 이윽고 예배가 끝납니다. 종수가 전도사에게 묻습니다.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습니까?"
전도사가 대답합니다.
"방언을 해야 한대요."
“방언을 못하면 천당에 못 갑니까?"
"그렇대요." (??)
신학대학에서 그 전도사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모르는 종수로서는 "방언을 해야만 천국에 간다"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입니다. 종수는 학교에 다녀와서 즉시 전도사의 집을 찾아갑니다.
"방언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던 중에 있던 전도사가 종수를 방바닥에 눕혀 놓습니다. 그러고는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던 다른 사람들도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피곤하던 종수의 몸이
벌떡 일어나 앉아집니다. 그러더니 혀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생각이 솟아나옵니다.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별의 별 죄가 다 생각납니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흐릅니다. 혀가 나와서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땅바닥을 뒹굴며 계속 웁니다. 그렇게 두 시간 가량이 지납니다.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원종수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신앙생활 하는 생애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 그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방언을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
14. 자살하러 가서 성령세례를 받다
이 이야기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최자실 목사가 신학교에 가기 전에 겪었던 일입니다.
최자실씨는 열두 살 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돈 많은 남편과 함께 노는 데 정신을 팝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편과의 사이가 벌어집니다. 그 때부터는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합니다. 결국 사업을 해서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법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형식적으로만 합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너는 세상 부자 되지 말고, 천국 부자 되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신자들이 멍청해 보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아파서 돌아가십니다. 며칠 후에 큰 딸도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나머지 아이들 세 명은 자기가
집을 비운 사이에 불이 나서 타 죽을 뻔하다 옆집에 살던 군인이 불을 꺼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 와중에 사업도 무너지고 맙니다.
사업이 기울자 원자재를 대준 사장들이 물건 값을 달라고 볶아 댑니다. 직원들은 밀린 월급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건강까지 잃고 맙니다. 그야말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2년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살 의욕이 완전히 꺾입니다.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나도 어머니와 큰 딸을 따라 하늘나라에나 가야지."
어느 봄날, 드디어 자살을 결심합니다. 유서를 남겨 놓고 약국을
다니면서 극약을 사 모읍니다. 약 봉지를 들고 삼각산으로 올라갑니다. 개울가에 앉습니다. 약 봉지를 엽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약을 입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난데없이 돌개바람이 휙하고 불어와 약 봉지를 채서 물에 빠뜨립니다. 그러자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옳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했는데, 아마 내가 지옥 가지 않게 하려고 그러시는가 보다. 좋다, 굶어 죽자."
그래서 굶어 죽을 자리를 찾습니다. 산을 헤매다 적당한 굴을 발견합니다. 그 속에 들어가 눕습니다. 하지만 굶어 죽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흘째 굶자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마을에 내려가 사과 몇 개를 사서
먹습니다. 그러고는 또 굶습니다. 하지만 사흘쯤 지나서
또 참지 못하고 마을에 내려갑니다. 이번에는 고구마를 몇 개 사 먹습니다. 다시 굴 속에 돌아와 굶습니다. 며칠 후 다시 배고픈 것을 못 참고 무엇을 사 먹으러
마을로 내려갑니다. 그때 30년 동안 헤어져 살던
친구를 만납니다. 반가워서 친구와 울고 웃으며 한참을 얘기합니다. 자기의 신세를 다 얘기합니다. 그러자 친구가 다짜고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실아, 너 성령 받아라."
최자실 씨가 펄쩍 뜁니다.
"예수 믿으면 됐지. 성령은 또 무슨 성령이냐. 나는 열두 살 때부터 예수 믿고 부인 회장도 두 번씩이나
했지만 너 보다시피 결과가 이것 뿐이야."
"그래, 열 두 살 때부터 예수 믿었으면서 요 모양 요 꼴로 산에서 죽으려고 왔지?”
친구의 말에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저 산 너머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부흥회 인도하는데 너
거기 가서 은혜나 받자."
못 이기는 체하며 친구에게 끌려 그 곳으로 갑니다.
부흥회를 하는데 가 보니 모인 사람들이 가관입니다. 500여 명의 사람들이 천막 속에 깔아 놓은 가마니에 앉아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고 찬송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아이구, 이 산골짜기에서 다 미쳐버렸구나!"
잠시 후 강사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30여 년 전에 자기가 은혜를 받았던 이성봉 목사입니다. 설교도 30년 전에 하던 그 설교 그대로 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회개가 나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으며 부흥회에 참석한 지 사흘째 되던 날입니다. 저녁 집회가 끝나고 밤 11시쯤 되었을 때입니다.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회개가 걷잡을 수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개가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됩니다. 그때 하늘에서 무거운 쇳덩이 같은 것이 가슴을 꽝 하고 내려칩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집니다. 몸이 벌벌 떨립니다. 입에서는 이상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미친 줄로 압니다.
다음날이 됩니다. 마음이 날아갈 것같이 가볍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입에서 "할렐루야!"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저 푸른 하늘이 언제부터 저렇게 고왔던가! 저 흰 구름이 언제부터 저리도 아름다웠던가! 왜 옛날에는 저 하늘과 저 구름을 못
보고 살았던가! 내가 30년 동안 예수 믿어도 헛되이
믿었구나!"
15. 성령세례론을 끝내는 말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오순절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김없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세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세례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120문도가 성령세례 받기를 힘쓴 것같이 힘쓰는 것이 합당한 자세입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성령세례를 부인하는 신자가 있다면 지금도 실제로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성령세례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5장. 성령내주란 무엇인가?
1.
성령내주론에
들어가는
말
성령세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성령내주(聖靈內住)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성령내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령내주를
잘못
이해하면
성령충만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내주란
무엇입니까?
성령내주란
"성령이 오셔서
다시는
떠나지 않고
신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통
신학자
중에
이것을
부인할
신학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내주가
"성령이 오셔서
다시는
떠나지
않고
신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사시는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성령내주는
곧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하나님(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신자의
마음에
영원히
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신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시기
때문에(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합동신학대학원
박형용
교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5과 고린도후서
3:17에서 성령과
그리스도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바울은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기능을
동일시했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이라
표현할
수가
있었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가
부활을
기점으로
해서
성령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활동과
구속적인
면에서
동일시된
것뿐이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이와
같은
전망에서
고찰할
때
오순절사건
때에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다는
말은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임재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약속하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내셨다.
구속
역사적인
전망으로
볼
때
오순절사건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이
신자
속에
내주하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이
언제부터
신자
속에
내주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언제부터
신자
속에
내주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게
되면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부터
성령이
신자
속에
내주
하는
것입니까?
한국교회의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즉
중생하는
순간부터
성령이
내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편의상
성령중생
내주론(聖靈重生內住論)이라
부르겠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
신학자들만이
성령내주가
중생할
때부터
시작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소개하겠지만
일본의
성경학자
요네다
유다까
목사와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가
그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2.
성령중생
내주론(聖靈重生
內住論)
성령중생
내주론이란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는
순간에
성령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내주하신다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내주하신다는
학설입니다.
이
학설은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견고한
입장입니다.
이
학설은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견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소위
개혁주의신학을
했다는
사람들
중에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성령론'에
관한
책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그
책들을
보더라도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이
성령중생
내주론을
주장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각각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성령중생
내주론입니다.
한국교회
신학
형성의
주인공중
한
사람인
총신대
박형룡
박사는
성령내주에
대해
"성령세례는 1) 정화성(죄
씻음),
2) 최초성(중생,
회심),
3) 보편성(구원
얻은
자는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성령이
예수를
믿을
때
누구에게나
오셔서
내주하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달라스
신학교
존
월부어드
교수
역시
성령중생
내주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전
시대들과
비교하여
은혜
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중생한
모든
사람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령세례
연속론자인
로이즈
존스
목사마저도
‘성령중생
내주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을
소유함
없이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태어난
사람으로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중생의
사역을
이루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전체
성경의
기본적
진술입니다."
<비고>: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성령으로 거듭남’ 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 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9에서 증거한 말씀으로 인함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영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성령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 말씀(한글 번역본)을 얼핏 보면, 우리 안에 성령이 없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더
이상의 성령세례가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고,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로마서 8:9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들이 믿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인위적으로 왜곡된 것이고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서로 다른 분리된 사건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로마서8:9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 말씀은, 정말로,
우리가 거듭나기만 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9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원어(헬라어)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9의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육신(flesh) 안에 있지 않고 영(spirit) 안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의(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 “But you are not in the flesh
but in spirit, since the Spirit of God dwells in you. Now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he is not His.”).
(원어를 직역한) 영어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 글의 수신자들(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이 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거듭난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 안에 성령이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령을 따라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너희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참고: 고후 13:5), 더 이상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오직 성령을 따라 살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살라."(롬 8:13-14; 8:4).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작성할 때에,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간주하여,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로마 교회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로마에서 온 그의 동역자들로부터(예, 브리스길라, 아굴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기본적으로, 그 당시엔, 누군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는 연이어,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나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게 서신서들을 작성할 때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오해하지 않고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 8:9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고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이미 거듭난 사람이고 법적으로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지는 않고 성령이 그 옆에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Joy
Unspeakable: Power & Renewal in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즉, 그리스도인)은 별도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거듭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신학자들을 제대로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거듭난 사람, 즉,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무지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내주에 대해 혼동을 초래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아직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할 수가 없고, 오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만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먼저 집을 건축해야만 그 집에 입주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집을 먼저 건축하신 후에 그 집에 입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집을 먼저 건축하시고 (죽었던 우리의 영을 다시 살리심; 새로운 탄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 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셔서 거듭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의 내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세례는 우리가 최초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그들 안에 이미 성령이 내주해 계심으로,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실질적으로 한 몸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더이상 자신의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취지로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로마서 8:9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아직 구원받지 못했슴) 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기본이고, 그것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에, 그렇게 말한 줄 믿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연이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살아 갈 수 있기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롬 8:13-14; 8:4).
로마서 8:14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씀을 진술할 때 왜 신학적 논리에 의거하여 진술하기 보다는 가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진술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Nkj) "For as many as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these are sons of God."
위의 진술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위의 진술을 거꾸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그 영이 거듭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 1:12; 요일 5:1).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그와 같이 신학적으로 논쟁이 될 수 있는 진술을 한 것일까요? 그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의도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그는, 누군가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과거의 구원받지 못했을 때와 같이 여전히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죄를 범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가 반드시 그런 목표의식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언한 줄 믿습니다. 로마서 8:9도 그런 차원에서 선언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즉, 로마서 8:9은, 누가 그리스도인인가를 정의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성령이 내주해 계시니, 그들은 더이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닌 것이 확실함으로, 더이상 육신을 좇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살라고 말하기 위해 그런 진술을 한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성령으로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엡 5:18).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화를 이루어 가며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롬 8:13-14; 8:4). ]
(저자의 글 연속):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령중생
내주론은
세계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하지만
앤드류
머리
목사(1828-1917)가
시인했듯이,
성령중생
내주론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속에
가진
신자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린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으며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는
믿음과
기쁨에
거의
모순되는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
무슨
말입니까?
성령중생
내주론을
주장하면
이미
성령이
마음속에
영원히
내주하는
신자가
또다시
성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순에
빠진다는
항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곤란한
점을
피해보려고
앤드류
머리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을
주실
때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주신다.
그분은
거룩한
은사로써
주시되,
계속적이고
방해받지
아니하며,
결코
그
쉼
없는
영생의
능력
가운데
베푸신다."
앤드류
머리
목사의
말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성령을
계속하여
끊임없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
속에
성령이
와서
영원히
내주하시게
한
후에
또다시
오순절에
성령이
사도들에게
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쉼이
없는
영생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중생으로
이미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에게
또다시
성령이
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계속해서
오게
하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사도들에게
장차
성령이
너희
속에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내주'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어떤
사람에게
와서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
사람에게서
떠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다시
오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주하시는
성령이
떠나기도
하고
다시
오시기도
한다면,
성령이
영원히
사도들
속에
내주하신다는
말씀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앤드류
머리
목사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앤드류
머리
목사의
주장이
옳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중생한
신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오순절과
같은
성령을
계속
주신다고
주장을
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주장을
하면,
120문도는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
120문도에게
성령세례가
반복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또
보내셔서
풍성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고
또
받고
죽을
때까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성령세례를
받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외에
하늘에서
또다시
성령이
오셔서
충만하게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앤드류
머리
목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충만
교리도
위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내주하시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중생
내주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3.
성령세례
내주론(聖靈洗澧
內住論)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성령론에
관한
많은
책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세례
내주론(聖靈洗禮內住論)을
정확하게
증거하는
학자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성령중생
내주론을
당연한
교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와
미전풍
주석으로
유명한
일본의
성경학자
요네다
유다까
목사등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세례
내주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는
깊은
성경
연구를
통하여
성령내주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서론부터
보겠습니다.
"이
부분(요
7:37-39)은 성령님의
내주를
설명하는
것인지,
성령충만에
관한
것인지,
성령세례에
관한
것인지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런
구별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마치지
않았으므로
아직
성령님이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는
이렇게
전제해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구별들은
매우
어려운
것이나
최소한
이런
구별은
가능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성령님의
내주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고
보여집니다."
성경학자
요네다
유다까
목사는
박영선
목사보다
더
분명하게
성령세례
내주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은
그의
주장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승천
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제자들이라든가
신자를
돕는
다른
'보혜사'로
영원토록
함께
있어
주실
뿐
아니라
속에
계시게,
즉
내주케
하시기
위해
보내주시는
이시다(16-17).
성령은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처럼
잠시
동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라도
함께
계셔
주신다.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동력이며,
신앙에
의한
체험의
극치다.
그는
능력의
영이심과
동시에
지혜의
영이시다.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로
하는
영적
상식,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성경의
영적
의의를
해석하는
지혜는
그에
의해
주어진다.
"
요네다
유다까
목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성령은
그리스도
승천
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제자들이라든가
신자를
돕는
다른
보혜사로
영원토록
함께
있어
주실
뿐
아니라
속에
계시계,
즉
내주게
하시기
위해
보내
주시는
이시다(16-17)'
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볼
때
지극히
바른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중생
내주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이유를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령중생
내주론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8-39)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생수의
강'은
39절에서
말씀한
대로
'성령'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성령)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1)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현재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사도들에게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이
말씀은
'장차
성령이
사도들을
포함한
신자들에게
오시면
그때부터
사도들과
신자들의
마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장차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오셔서
영원히
내주하실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순절
이전의
중생한
사도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해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내주에
관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더욱
성령중생
내주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장차
너희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지금
너희들
속에
내주하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장차
사도들
속에
와서
영원히
내주하실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도
이
구절을
오순절에
임하실
성령을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예수님이
성령내주를
약속할
그
당시의 사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이
구원
받은
사도들과
함께
계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에게는
아직
성령이
내주하고
있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장차
오셔서
영원히
너희들
속에
내주하실
예정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이
예수
믿는
순간부터
성령이
내주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성령중생
내주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7-8)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중생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장차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성령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주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중생할
때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2) 성령중생
내주론은
서신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령중생
내주론을
보십시오.
모든
신학자들이
서신서를
기초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인격체이신
성령이
성도안에
내주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전
3:16-17)
이
이론
역시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
3:16-17을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바울이
신자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
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내주해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이
예수
믿는
순간에
와서
내주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미
언급했듯이
바울
서신은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단지
중생한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받은
성도들에게
너희
속에
성령이
내주해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을
근거로
성령중생
내주론을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사람이
예수
믿는
순간부터
성령이
내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첫
번째
증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신자와
함께
하시는
것을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구분하셨습니다.
(1)
진리의
영(성령)이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2)
진리의
영(성령)이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본문을
헬라어로
보면
이
두
문장의
전치사와
시제는
그
뜻이
완전히
다릅니다.
먼저
'진리의
영(성령)이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라는
말씀부터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하기
위해서
성경
주석학자
웨스트코트(Westcott)
목사가
본문을
해석한
것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랜드종합주석에는
웨스트코트
목사의
주석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편,
16절과
본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었는데,
그
시제와
전치사
사용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1)
너희와
함께
계심'
(μεθ ύμων, 메드
휘몬),
16절,
(2)
너희
옆에
거하심'
(παρ ύμιν, 파르
휘민),
17절,
(3)
'너희
안에
계실
것임
(ἐν ὑμιν,
엔
휘민),
17절.
여기서
(1)의
경우는
'같이'라는
의미가
강한 '메타'
(μετά)가
사용되어
성령과
성도
간의
교제를(9,
15, 27절), (2)의
경우는
'함께'라는
의미가
강한 '파라'
(παρά)가
사용되어
성도에
대한
성령의
인격적
임재를(23절,
요
8:38), (3)의 경우는
속에
라는
의미가
강한
'엔'
(iv)이 사용되어
성령의
내재란
의미를(10절)
보다
강조한다.
"
웨스트코트
목사의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웨스트코트
목사의
주석을
참고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세밀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편,
존
T 시먼즈
박사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성령의
역사에
사용된
전치사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주님이
성령에
관한
약속을
하실
때
사용하신
전치사를
연구하는
것도
흥미로우리라,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그를
보내리라'(요
16:7). 다시 말씀하신다.
'그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
14:17). 그리고 말씀하신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행
1:8).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다.
'그의
마음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여기에서 '너희에게',
'너희
안에',
'너희
위에',
'너희로부터'를
주목하라.
"
예수님은
왜
'함께'
라는
전치사를
세
종류로
구분하여
사용하셨을까요?
제가
성경을
분석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함께라는
전치사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하셨다고
생각됩니다.
1)
16절의
'함께'
(μετά-메타)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4:9 같은 경우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
함께
계시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일반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럴
때
'메타'
(μετά-함께)라는
전치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구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μετά-메타)
계시리라." (빌
4:9)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이
신자의
어디에
함께
계시는지를
세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을
때
메타(μετά-함께)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
14:17의 '함께'
(παρά-파라)와
'속에'
(ev-엔)라는
두
개의
전치사는
성령님이
특별히
'함께
계시는
것'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각각
다르게
사용된
전치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성령님이
현재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과
장차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분을
명확하게
해야만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것에
오해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계시는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는
각각
다른
전치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17점을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성령내주에
대해서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웨스트코트
목사의
지적처럼
17절의
'거하
심이요'
라는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이
그
말씀을
듣고
있는
현재의
사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함께
헬라어 '파르
휘민'
(παρ ὑμιν-너희와
함께)이라는
'전치사구'를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사전은
‘파르
휘민'
이란
전치사구의
정확한
뜻이
'너희
근처'에
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실
그
당시에
성령이
중생한
사도들
속에
들어가
내주해
계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성령은
단지
중생한
사도들의
마음
근처에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사도들이
중생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사도들이
주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파르
휘민'
(너희
근처에)이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진리의
영(성령)이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계시겠음이라는
동사는
미래형입니다.
이것은
너희
마음
근처에만
계시던
성령님이
장차
너희
마음속에
들어가
계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엔
휘민'
(너희
속)이라는
'전치사구'에
대한
헬라어
사전의
뜻이
'너희
안에
들어와
계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역시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과
함께
성령이
내주해
계신
것을
표현할
때
모두 '너희
안(엔
휘민)에
계신
성령'
혹은
'우리
안'
(ev ἡµuv-엔
혜민)에
계신
성령'
이라는
전치사구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디모데후서 1:14 이
그
증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령이 와서
신자의
마음
근처(παρά-함께)에
계시는
것과
신자의
마음에
내주(ev-엔)하시는
것을
각각
의미가
다른
'전치사구'를
사용하여
명확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령이
현재
사도들의
마음
근처에(파라)
계신
것과
장차
사도들
마음
안에(엔)
들어오실
것
역시
각각
의미가
다른
현재형과
미래형
동사를
사용하여
엄격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볼
때
성령의
내주는
중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성령세례를
받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읽어야
할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신자가
누구인지,
신자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성령세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호노류스는
예수의
십자가
사형,
매장
그리고
부활,
승천을
재차
읽어
주었다.
그리고
오순절
날의
성령의
강림,
신자를
한
몸으로
하기
위한
성령의
세례,
신자의
몸
안에
성령이
거하는
것에
대해서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성령내주가
오순절
성령세례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음
근처에
함께
하는
것’과
‘마음속에
내주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다
명확하게
알려면
요한계시록
3:20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분명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
밖에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은
마음의
문을
뜻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들
안으로
들어가
더불어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것도
마음
문
근처(밖)에
계신
경우가
있고,
마음
문
안(속)에
들어가
계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계심'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이
신자와
함께
계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신자
근처에
임시로
계신
것과
신자
속에
영원히
내주해
계신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이
사도들과
함께
계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성령은
중생한
너희
근처에
계신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성령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그
때부터
성령이
너희
마음속에
영원히
내주하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이렇게
분명
한데도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은
물론
성령세례
연속론자들마저도
이런
차이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성령내주와
성령충만등의
교리를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학자들도
인간인지라
성경을
잘못
깨닫고
잘못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
가르친
것을
깨닫고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처'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성령이
매우
여러
곳에
계신다고
합니다.
(1)
성령은
중생한
신자의
마음
근처에
계십니다.
(2)
성령은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의
마음속에
내주해
계십니다.
(3)
성령은
하늘(천국)에도
계십니다.
(4)
성령은
온
세상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신자의
근처에
계시는
것과
마음속에
계시는
것,
온
세상에
계시는
것과
하늘에
계시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차영배
교수가
참고할
만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성령은
하늘
보좌
앞에
정주(定住)하시면서
온
땅에
보내심을
받는다.
'정주'라는
말이
불충분한
표현인
줄
알면서도
이것을
사용한
이유는
이
땅
위에
어떤
저수지나
혹은
신비체
속에
정주한다는
생각을
피하기
위함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볼
때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은
어디에나
다
계십니다.
그런데
어디에나
다
계신
성령님이
특별히
고정적으로
머물러
계시며
활동하시는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다른
한
곳은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의
마음속
입니다.
다른
모든
곳에는
성령이
고정적으로
영원히
계시며
특별히
활동하지
않고
그냥
함께(근처에)
계시거나
임시로
계시며
보통의
활동만
하실
뿐입니다.
차영배
교수는
성령이
천국에
영원히
머물러
계신
것을
정주(定住)라고
표현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성령이
신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머물러
계신
것을
내주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구분을
볼
때도
성령이
중생한
신자의
'근처에
계신
것은'
'내주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오직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
속에
성령이
들어와
계셔야
내주인
것
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이런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내주론이
틀리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8:9 등의 말씀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8:9 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한
신자에게는
성령이
없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거듭난
신자에게도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다만
그에게는
성령이
그의
마음
근처에
계실
뿐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의
'저는
너희와
함께(근처에)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안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개념
정리를
다시
하겠습니다.
-성령중생이란
성령이
사람의
마음
근처에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란
성령이
정주하시던
천국에서
내려와
신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성령내주란
성령세례를
통해서
신자의
마음속에
들어간
성령이
영원토록
신자의
마음속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내주하시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하므로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은
신자를
중생시킬때
신자의
마음
근처(파라)에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직
중생한
신자의
마음
안(ev-엔)에
들어와
영원히
내주하시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은
오직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실
때만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진리의
영이
너희
근처(파라)에
계시지만,
장차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
속
(엔)에
계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성령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성령내주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이제
여기서
성령은
중생할
때부터
내주하신다는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말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그렇다면
보통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현재)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명백하게
'성령은
현재
중생한
사도들의
마음근처에
계실
뿐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성령은
장차
사도들
속에
들어와서
영원토록
내주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은
중생할
때부터
내주하신다고
주장하면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이
와서
제자들
속에
내주해
계신데도
예수님이
장차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
속에
영원히
내주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이
이런
곤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만
합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을
때
중생했다.
그
때부터
성령이
그들
속에
내주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면
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기
이전에
중생했다는
증거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들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어
있다는
약속이
그
증거입니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증거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7-39)
이
말씀
역시
중생한
사도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지
않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언제부터
사도들
속에
내주하실
것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내주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을
때입니다.
그
후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거듭해서
성령님이
사도들의
마음속에
오순절부터
내주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세
번째
증거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21-22)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가
잘
지적했듯이,
최소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성령님이
중생한
사도들
속에
내주하시지
않았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중요한
말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이
두
구절은
매우
어려운
것이나
최소한
이런
구별은
가능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성령님의
내주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고
보여집니다."
만일
성령님이
그
이전에
사도들에게
내주하셨다면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님이
마음속에
와서
영원히
계신데
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4) 사마리아
성도들의
증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4-17).
본문의
‘말씀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빌립에
의해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전도한
본문을
보겠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5-8)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12)
본문을
보십시오.
빌립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
사마리아에
가서
표적을
행하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빌립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들은
남녀가
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은
사마리아
신자들
중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적이
없다고
증거합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었다”고
증거합니다(행
8:16).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성령은
단지
임시로
그들의
마음
근처(파라)에
계셨을
뿐입니다.
그들은
임시로
그들의
마음
근처에
계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믿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성령이
그들
마음 속(엔)에
와서
영원히
내주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훗날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성령이
그들
마음 속에(엔)
영원히
내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5) 에베소
성도들의
증거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6)
만일
신자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와서
내주하신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바울이
안수를
할
때
이미
그들
속에
와
계시던
성령이
세례를
주셨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따라서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볼
때도
예수
믿을
때
성령이
와서
내주하신다는
주장이
틀린
것을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증거들을
볼
때,
신자가
성령의
내주
상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은
다만
그의
마음
근처에만
계실
뿐입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여전히
하늘에
정주(定住)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성도에게만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내주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가
주어질
때
'성령이
내려오셨다',
'성령이
임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들,
사마리아
신자들,
에베소
신자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야
성령의
내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4. 성령내주와
구원의
관계
성령세례로
성령의
내주가
시작된다고
해서,
성령이
내주하지
않고
마음
근처에만
있는
중생한
신자는
구원을
못
받은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신자들도
모두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성령충만을
다룰
때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만,
성령내주는
오직
성령충만에만
필요할
뿐입니다.
성령내주와
구원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5. 성령내주론을
끝내는
말
간혹
성령중생
내주론을
믿는
이들
중에서
그래도
성령의
능력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
믿은
후에
반드시
성령의
능력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
보다도
더욱
확실하고
빠르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믿는
것이
성령세례가
아니며,
예수
믿은
후에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으면
성령세례를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은
중생한
사람에게는
그의
마음속에
내주하시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다만
성령이
그의
마음
근처에
계셔서
약하게
도와주실
뿐입니다.
성령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주하여
강하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령의
내주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목사의
저서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에
나오는
그의
권면을
소개하면서
이
장을
끝내겠습니다.
"불을
보내소서!
엔진이
점화되지
않으면
차가
움직일
수
없다.
다들
알듯이
점화는
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점화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들은
감동을
받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성령의
불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바로
당신을
위한
약속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외로운
선교지
현장에
있든지,
집
안
안락한
거실에
있든지,
아니면
예배당
안에
있든지
지금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부수어지고
깨어
저라.
차가운
세상
안에
차가운
교회가
있다.
이것은
모두
말씀
전파자들이
차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성령의
불을
보내소
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
6장.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1. 성령충만론에 들어가는 말
성령충만(聖靈充滿)이란 무엇입니까?
총신대학장을 지낸 박형룡 박사는 성령충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신자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을 받고 영적 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는 성령의 비상한 은혜를 성령충만이라
칭한다."
하지만 제가 성경을 볼 때 이 정의는 다음과 같이 고쳐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신자가 성령세례로 성령의 내주를 받고, 영적 생활을 계속하는 중에 내주하신
성령이 반복하여 주시는 비상한 은혜를 성령충만이라 한다."
앞에서 성령내주에 관해서 설명할 때,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와 요네다 유다가
목사의 견해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신약시대에는 언제부터 성령세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성경을
깊이 연구한 후에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성령세례가 임한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세례가 있은 후에 성령내주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성령님의 내주가 있은
이후부터 성령충만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이란 내주하신 성령이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내주를 바로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내주를 예수 믿는 것으로 생각하면 평생 예수 믿어도 성령충만의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고서는 성령충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성령충만을 술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엡 5:18). 술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충만해지면 사람이 완전히 술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처럼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여 충만하게 역사하면 사람이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중요한 성령충만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성령충만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줍니다.
1)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성령의 내주 없이도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세례 요한 출생 예언을 할 때 성령충만을 경험했습니다(눅 1:67).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세례 요한을 잉태한 후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눅 1:41).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 성령충만함을 받고 태어났습니다(눅 1:15).
2) 세례 요한 이후부터 오순절 이전까지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 이후부터 오순절 이전까지는 오직 요단강에서 성령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만이 성령충만을 받으셨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1).
이 기록 외에는 오순절 이전까지 성령충만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3) 중생한 사도들도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음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오순절 이전에도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마 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충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오순절 이전에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4)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해지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들은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성령세례를 베풀 때도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7).
이런 기록을 볼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성령충만해지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성령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또다시 성령충만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사역을 하면 할수록 성령충만한 상태가 약화됩니 다. 그럴 경우 다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이 그 사실을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23-
31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윤선 박사는 우리가 성령충만을 계속 받아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신자들이 성령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 죄악 많은 세대에 처하여 성령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영적 생명이 살 수 없다.“
신학자들은 에베소서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헬라어 원문의 뜻이 계속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 이야기만 나오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5:18에 유일하게 나오는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 때문에 신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여기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오직 에베소서 5:18에만 나옵니다. 먼저 그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에베소서 5:18은 성령세례 단회론자들과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하게 논쟁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입증할 때 강력한 증거로 사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은 이 구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므로 곤란해 하는 실정입니다.
2.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에베소서 5:18 해석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은 에베소서 5:18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다음은 총신대학원 이한수 교수의 주장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중생 이후에 존재하는 제2의
성령 경험이있다는 시사가 없다.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충만의 경험일 것이다(엡 5:18). 그러나 그것은 제 2의
축복이 아니고 신자가 회심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생활에서도 계속 경험해야 할 경험이다."
이한수 교수는 신약성경 서신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울 서신에 "중생 이후(예수 믿은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은 경우를
소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바울 서신에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이 "중생이후(예수 믿은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글은 성령충만에 대한 앤드류 머리 목사의 주장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생각할 때, 그것을 신적 충동의 돌발성과 힘과 외향적으로
나타나는 모습 등에 매우 깊이 결부시키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특별한 경우를 위한 것, 즉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복으로 간주하였다. 내가 이 장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명령이 실로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며, 교훈의 대상과 범위가 넓은 만큼이나 약속과
능력 또한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앤드류 머리 목사는 왜 성령충만을 특별한 사람들만 받는다고 주장하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의 사람들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모든 신자가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이는 철저한 성령세례 단회론 사상입니다.
한편, 성령세례 단회론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였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누구나 받았기 때문에 보편적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고, 사도와 스데반과 같은 특수한 사람들이 받는 은사이다 (행 4:8, 31; 7:55; 13:19)."
성령충만은 사도와 스데반같이 특별한 사람들만 받은 은사이므로 오늘날 보통 신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지로 성령세례 단회론을 주장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다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다." 는 주장은, 참 매력적인 주장입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이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잠시 후에 모든 신자는 (성령세례 없이) 다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다는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3.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의 에베소서 5:18 해석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에베소서 5:18 해석에 대해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대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 연속론자들의 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구절을 해석하지 못해서 침묵해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연속론자들은 이 구절을
무리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이드 존스 목사일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에베소서 5:18을 다음과 같이 무리하게 해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에베소서 5:18과 관련해서 사람이 성령충만할 수는 있지만, 아직 그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약식으로 에베소서 5:18을 해석하였습니다. 즉,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에베소 성도들도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모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태어난 것처럼(눅 1:15), 오순절 이후에도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이런 주장은 성경을 볼 때 바르지 못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오순절 이후에는 오직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이 사람에게 오셨다 가셨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이 그 사실을 증거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한지라” (삼상 16:14).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오셨다 가셨다 했기 때문에, 다윗은 범죄한 후에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한 번 오시면 떠나지 않고 영원히 내주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보혜사는 성령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충분히 검토해 본 것처럼,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장차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신학자들은 이것을 일컬어 '성령내주'라고 부릅니다.
<참고 질문>: 성령이
언제 우리의 거듭난 영안에 들어와 내주하실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첨부한 책 [The Holy Spirit and You]의 저자, Dennis &
Rita Bennett 은, 책의 서론 부분에서 우리의 영의 거듭남과 성령세례를
서로 구분함으로써, 믿는 자가 받아야 할, 성령세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은 주장은 이 책: [이것이 성령세례다]의 저자와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에 대한 Bennett목사의 주장은 이 책의 저자의 입장과 다르다. Bennett목사는, 성령세례시에 성령의 내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거듭날 때 성령의 내주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성령중생 내주론). 성령세례를 인정하는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대다수가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요한복음
14:16-17에 위배된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John 14:16-17 (NKJV) “And I will pray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Helper, that He may abide with you
forever— the Spirit of truth, whom the world cannot receive, because it neither
sees Him nor knows Him; but you know Him, for He dwells with you and will be
in you.”
(비고): 예수님은 장차 아버지께 구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텐데 그리하면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어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실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말은 우리의 영이 거듭날 때가 아니라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우리의 영안에 내주하게
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20:22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 안에 아직 성령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거듭났을 때 성령이 그들의 영안에 내주하셨다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또다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리가 없다. 성령세례와 거듭남의 주요 차이는,
성령이 우리의 영안에 내주하는가 내주하지 않는가의 차이이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 안에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진다(고전 3:16; 6:19; 12:13). 성령세례는 최초의 성령의 내주이자, 최초의 성령충만이다(the initial filling of the Holy Spirit).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나오는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나 다른 교회들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교회들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한 이유다(엡 5:18). 왜냐하면,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지라도 (그들의 최초의) 성령충만은 자동적으로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충만을 다시금 받고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즉, 성령의 재충만(the refilling of the Holy Spirit)이 필요하다. 성령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영을 가득 채우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혼으로 넘쳐 흘러 우리의 혼을 지배하실 수 있게 된다(요 7:37-39).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때로는 충만하기도 하시고(행 4:31), 때로는 (그 불이) 소멸되기도 하십니다(살전 5:19):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따라 그 상태가 좌우됨.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엡 4:30), 그 불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하며(살전 5:19),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엡 5:18). 성경의 가르침이 이러하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에베소서 5:18을 구약식으로 해석하여 신약시대에도 성령세례를 못 받은 신자가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5:18은 무슨 뜻일까요?
4. 필자의 에베소서 5:18 해석
제가 성경을 검토해 볼 때, 에베소서는 틀림없이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서 5:18의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 역시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결코 성령세례 단회론자들의 주장처럼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2년 동안 목회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아볼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음의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행 18:24-26).
위의 본문을 볼 때, 아볼로는 세례 요한이나 혹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바울의 제자인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 자세히 알고 믿게 됩니다(행 18:26-28). 하지만 아볼로는 여전히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따라서 아볼로가 전도한 사람들 역시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볼로가 전도한 사람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었을까요? 틀림없이 예수를 구주로 믿었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행 18:26-28).
여기서 '믿은 자들'은 아볼로를 통하여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28절에서 아볼로가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 외에도, 바울의 제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더욱 더 예수님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아볼로는 예수님을 더 잘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사람들은 아볼로를 통하여 예수님을 자세히 증거 받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베소 신자들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 예수를 믿고 중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아볼로가 전도하여 세운 에베소교회에 성령세례를 받은 바울이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가서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지를 확인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그들이 아볼로를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성령세례를 받았는 지의 여부만을 확인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1-2).
여기서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여기에 나오는 '어떤 제자들'을 "기독 신자들이면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석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비록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박영선 목사도 "에베소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세례(부어 주심)가 결여되어 있음을 바울이 지적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해석이 자연스러운 해석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확인 결과 에베소 신자들은 예수는 믿지만 성령세례를 받기는 커녕, 성령이 계시다는 것조차도 듣지 못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바울은 즉시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도록 도와줍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는 믿지만 예수님이 세우신 물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운 물세례에 관해서 알려 준 후 물세례부터 주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다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3-7).
만에 하나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다고 가정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먼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세우신 물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물세례를 준 후에 그들에게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사람들은 아볼로에 의해서든 바울에 의해서든 먼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성도들은 먼저 성령으로 중생한 후에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나중에 성령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때와 성령을 받은 때가 다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총신대학교 이사와 예장(합동) 부흥사 회장을 지낸 우희영 목사는 그의 저서 「성령의 사역」에서 중생과 성령세례가 다르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하였습니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차이점을 성경을 통하여 알아보면, 성경에는 중생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한 예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12제자(요 5:24)와 70제자(눅 10:20)에게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7)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도 얻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후에도 줄곧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마리아 교회(행 8장)나 에베소교회(행 19장)의 사건에서 보면 분명히 '(예수) 믿고, (물) 세례 받고, 중생을 체험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뚜렷이 구별된 별개의 체험임을 밝혀 주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해준 후에 무슨 일을 했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그 후 바울은 약 2년 간 에베소에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9-10).
앞에서 보았듯이, 에베소교회는 개척 멤버 열두 명이 모두 바울의 안수에 의해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9:1-7). 목회자인 바울은 성령세례를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개척 멤버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에베소교회의 성격이 어떠했을지를 충분히 짐작게 해줍니다. 모든 교회는 목회자와 개척 멤버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성도들의 신앙 형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아볼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목회자와 개척 멤버가 되면 아볼로식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오직 '성경, 성경'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냉랭합니다.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나타남이 없이 인간의 재주와 열심으로 교회가 운영됩니다. 이런 교회에서 성령세례를 받기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바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개척 멤버가 되면 바울식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성경' 외에도 '성령'을 강조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교회는 뜨겁습니다.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나타남으로써 교회가 운영됩니다. 이런 교회에서 성령세례를 받기란 매우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목회자와 개척 멤버를 닮는다는 것은 저의 목회 경험을 보더라도 맞는 얘기입니다. 제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목회했을 때는 단 한 사람도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령세례를 받고 나니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목회자가 아볼로냐 바울이냐가 교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닮은 개척 멤버가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그들이 교회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후에 믿는 모든 신자들은 자동적으로 목회자와 개척 멤버를 닮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개척 멤버들을 닮아서라도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을 받든, 기도하다 성령을 받든, 찬송하다 성령을 받든,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는 지금과는 달리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던 때였습니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교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베풀 능력을 가진 바울이 목회하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못 받고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강조하였듯이 바울은 아볼로가 전도한 에베소 성도들을 만났을 때도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확인을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못 받은 것을 확인하자 즉시 안수를 해주어 성령을 받게 한 사람입니다. 남이 전도한 사람마저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전도한 사람에게는 더욱 안수를 해주어서 성령을 받게 해주었을 것은 뻔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기가 전도한 에베소교회 신자들에게 안수를 해 주지 않아서 그들이 성령세례를 못 받은 채로 신앙생활을 하게 했다 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의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세례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지 않고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2) 에베소서를 보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가 성령의 인치심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결론부터 생각해 보면 성령세례와 성령의 인치심은 본질상 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어떤 쪽에 초점이 주어지는가에 따라서 구별이 됩니다. 성령세례는 '증인'이라는 내용에 초점이 주어 진다면, 성령의 인치심은 자기의 구원확인문제'에 초점이 주어집니다. 어떤 부분에 더 많은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똑같은 내용을 용어만 다르게 쓰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성령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의 말씀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여기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리 마음에'는 '우리 마음 속에(ev)' 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을 마음속에 주셨다는 것은 곧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이 마음에 내주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성령으로 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 다음에 소개하는 에베소서 1:13 말씀 역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
여기서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보고 너희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곧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누차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도 이를 거듭 확증하셨다. 그러한 약속에 따라 성령께서는 예수의 승천 이후에 강림하셨다. 실로 성령의 내주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성령의 내주하심의 외적 표지로 세례를 받는다."
그랜드종합주석이 하나님이 성령세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따라 예수님 승천 이후에(오순절에) 성령이 오셨고, 그때 오신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는 것이 곧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라고 해석한 것은 옳습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말은 곧 구약과 예수님이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에 의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증거들을 볼 때,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에베소교회를 떠난 바울이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지않고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또다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미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았으므로 당연히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계속 성령충만을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빌립이나 아볼로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전도한 후에 에베소서를 썼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어 거듭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라."
이런 증거들로 인하여 중생이 성령세례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약의 서신서에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것은 서신서를 받은 이들이 이미 모두 오순절 성령세례와 똑같은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인 것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성경을 보아야 성경을 바로 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5.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충만은 모든 신자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신자만 받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이 내주하시고, 내주하신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성령충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4 장을 보면 초대교회의사도들과 성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4:31). 이 밖에는 뚜렷한 기록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기도하는 것 이외에도
찬양할 때, 봉사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공부할 때, 성령님을 묵상할 때, 헌신할 때 성령충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 성령충만에 이를 것인가는 각자의 은사와 형편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들은 성령님과 무관하게 사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의 마음에도 성령님이 계십니다. 다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에게는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성령님이 그의 마음 근처에 계십니다. 비록 성령으로 중생만 받은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들도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최대한 힘입고 살아야만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나 받지 못한
신자나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6. 성령충만론을 끝내는 말
서신서는 거의 모두 바울, 베드로, 요한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자기가 개척한 교회나 다른 사도들이 개척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안수를 해서 성령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만 해도 성령이 임하시는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간혹 빌립이나
아볼로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같이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게 할 수는 있어도 성령세례는 받 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이 전도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부지런히 달려가 모든 성도가 성령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서신서 자체를 보더라도 서신서를 받은 성도들이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충분히 나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사도들의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모두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서신서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 혹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에게 강조해야 하는 성령충만을
받으라, 혹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명령만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신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 사람에게 강력한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성령내주는 성령세례 때부터 시작됩니다. 성령내주가 있은 후에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세례부터 받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성령충만을 받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한 예수님이 광야에 가서 묵상과 기도와 금식에 힘 쓰신 것을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본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매일 부지런히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매일 성경을
읽고 듣고 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루 2시간
이상의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도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에 대한 모범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묵상과
기도와 금식에 힘쓸 때 영력이 극대화되어 주의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11장. 나의 영적 주소는 어디인가?
1. 다소, 다메섹, 직가:
이 내용은 청교도 영성훈련원장 전광훈 목사의 설교를 참고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진단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므로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나중에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꾼 사울이 나옵니다. 그는 다소 출신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작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1).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됩니다. 그 장면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 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3-7).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바울은 직가로 가서 기도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라 하는 성령 받은 제자를 직가에 있는 바울에게 보내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1).
아나니아는 작가로 가서 바울을 만납니다. 그는 바울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해줍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이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 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7-18).
나중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까지 갑니다. 거기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 19:21).
다소는 불신자의 상태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다소에 살 때는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은 신자의 상태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가는 성령 받은 상태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직가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소에 사는 사람이 다메섹에 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불신자가 신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간혹 불신자들 중에도 하나님이 지각을 열어주셔서 신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더 쉽게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메섹에 있는 사람이 작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고 중생만 한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성령 받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핍박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더욱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간혹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 지각을 열어 주셔서 성령 받은 사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세례를 더욱 쉽게 받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소 사람인 것을 깨닫고 다메섹에 간 사람을 사모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빨리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성령 받은 신자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메섹 사람인 것을 깨닫고 직가에 간 사람을 사모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빨리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 있게 주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주소는 어디입니까? 다소입니까? 다메섹입니까? 직가입니까? 로마입니까? 저는 여러분의 영적 주소가 로마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 목회자,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바울사도의 예로 볼 때 목회자는 네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로 다소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있습니다. 둘째로 다메섹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있습니다. 셋째로 직가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있습니다.
1) 다소에 머무는 목회자:
목회자가 다소 신앙을 가진 것처럼 불행하고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목회자가 다소라는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는 목회자도 성도도 모두 불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목회자 중에는 다소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 다. 목사를 하다가 점쟁이가 된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12사도 중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다소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다소 목회자의 전형은 아마도 서울의 D고등학교 전 교목 실장이었던 ㅇㅇㅇ 씨일 것입니다. 다음은 ㅇㅇㅇ 씨가 인터넷에 공개한 글입니다.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답니다. 천사의 안내를 받아 이곳 저곳 둘러보는데, 어떤 곳에서는 불자들이 염불을 외우며 즐거워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힌두교인들이, 다른 곳에서는 이슬람 교인들이 제각기 자신의 방식을 따라 신(혹은 궁극자)의 영광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즐거워하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한 곳에 이르자 천사가 말하더랍니다.
'쉿! 조용히, 이 곳은 자기들만 이곳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아직 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와 있는 걸 알면 몹시 당황할 테니까 조용히 해주십시오. 사랑의 주님! 구원, 천국, 영생, 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그 교목의 말): 저는 지금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아니, 마음으로는 벌써 기독교를 떠난 지 오래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 척, '복음의 원형'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교회 개혁을 외쳤습니다."
ㅇㅇㅇ 씨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거 짓 목사로 살다가 결국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목사직을 포기하고 공개적인 불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로 유명한 서울의 D고등학교의 교목실장이 불신자였을 정도이니, 우리 나라에 다소 목회자가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로 ㅇㅇㅇ 씨의 사상을 이어받은 유명한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D고등학교가 기독교 교육을 한다고 학교를 사법 당국에 고소를 한 강ㅇㅇ 학생입니다. 다소 목회자가 다소 학생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다소 목회자는 다메섹을 전혀 모릅니다. 직가는 더더욱 모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릅니다. 오직 다소밖에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해도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오직 세상이 제일입니다. 천국도 믿지 않고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소 목회자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컷 목회 하고 지옥에 가니 어찌 불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소 목회자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혹시 다소 목회자가 있다면 하루 속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남을 힘써 전도해서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드는 큰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큰 죄 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그러십니까? 어서 속히 회개하고 다메섹으로 가십시오. 아니면 ㅇㅇㅇ 씨처럼 목사직을 반납하기라도 하십시오.
2) 다메섹에 머무는 목회자:
목회자가 다메섹 신앙이라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직가에 가지 못하고 다메섹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은 물론 그에게 속한 신자들에게도 큰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목회 생활을 하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자기 힘과 자기 재주로 목회를 하려니 무척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혹 다메섹 신앙을 가진 목회자 중에는 아볼로처럼 원래부터 뛰어난 재주나 탄탄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목회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세상적인 능력을 많이 가진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성도들을 진정으로 복되게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메섹 목회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 깜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세상적인 능력마저 없는 목회자는 다메섹 신앙으로 목회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어려운 시대에는 그는 결국 목회를 포기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어두움과 영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힘들고 답답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일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는 다메섹 신앙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실정입니다. 한국 장로교회 목회자의 70% 이상이 다메섹 목회자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예수 믿는 것이 성령세례라고 배워서 졸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목회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성부, 성자, 성경' 중심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중심에 성령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아는 것이라고는 성경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성경, 성경' 만 강조합니다. 그의 중심은 기도실이 아니라 서재입니다. 그가 비록 성령충만을 말하고,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더라도, 그의 목회 현장에 성령이 나타나는 법은 없습니다. 자연히 목회 현장이 메마르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이런 답답한 현상을 보면서 레오나드 레이븐힐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세상은 어두운 데서 잠자고, 교회는 밝은 데서 잠잔다. 어두운 데냐 밝은 데냐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이나 교회나 모두 잠들어 있다. 교회는 '식물 인간 교회' 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해마다 교회는 죽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전달하느라 수천, 수만 권의 책을 찍어낸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다르다. 그분은 자기의 지식을 짓밟고,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자를 찾아 사용하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몇 년 전 어떤 목사가 '우리 교회에는 부흥이 아니면 장례식이 있을 뿐이다' 라는 푯말을 교회 입구에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런 목사를 보고 당신은 미쳤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 그는 미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라. 미치지 않은 교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다."
다메섹 목회자는 기껏해야 성도들을 다메섹까지만 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령을 말하고 기도를 논해도 아는 게 다메섹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역시 성경은 알아도 성령은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메섹 목회자는 성도가 직가에 가면 매우 불안해합니다. 심지어 싫어하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도 불행하고 작가에 가 있는 성도도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다메섹 목회자는 최소한 성도가 직가에 가는 것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에게 속한 성도 역시 어느 정도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목사의 다음 말씀이 다메섹 목회자의 마음을 찌르기 바랍니다.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아는 한 최고 등급의 죽음이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가 성령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다. 교만에도 등급이 있다고 가정할 때, 최고등급의 교만이란 성령님이 오셔서 은혜 주시기를 구하면서도 은사는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는 성령님을 제한하고 그분을 비하한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까지 그렇다. 우리는 요엘서 2장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모든 육체 위에 하나님의 영을 부으소서' 라고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지만 우리 자녀들이 예언하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는 일은 없게 해주십시오'라고 덧붙인다."
레이븐힐 목사는 또 이렇게 질타합니다.
"오늘날 '다락방 체험'도 없이 무슨 권세로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가?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는 설교자는 많아도 '선지자다운 설교자'는 별로 없다. 선지자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레이븐힐 목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의 잠에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부흥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대어 부흥에 등한한 사람들이다. 물론 하나님이 일하셔야 부흥이 일어난다는 말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팔짱을 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부흥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손가락 하나 까 딱하지 않는 것은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전달하는 파이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교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분명히 선언한다. 부흥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3) 직가에 머무는 목회자:
직가가 다메섹보다 훨씬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작가에 있는 목회자에게는 성령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체험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직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직가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는 '은사'만 좋아하고 주님을 위한 헌신과 봉사는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성령 받은 사람 들에게서 이 사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직가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는 위험한 예루살렘과 로마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곳에 가서 희생하며 순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직가에서 '방언'이나 하고 지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 때문에 직가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 역시 주님의 일을 충분히 할 수 없는 것입니 다. 이런 목회자는 하루 속히 작가를 떠나서 예루살렘과 로마로 가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할 자리로 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소입니까? 다메섹입니까? 직가입니까? 로마입니까?
3.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목사도 별수없다!
저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목사도 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한 간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합신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목회를 잘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것도 목회라고 하냐. 내가 개척을 하면 1년에 100명 이상 모일 것이다!"
저는 합신에 들어가기도 전에 개척교회를 시작합니다. 2층을 세로 얻어 교회간판을 내겁니다. 그 후 제가 어리석고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척한 지 6 개월이 지난 후에도 교인이 10명도 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10개월 만에 보증금을 다 까먹고 맙니다. 건물 세를 주지 않으면서 더 이상 있을 수 가 없게 되고 맙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눈물을 머금은 채 교회 문을 닫습니다.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폐쇄할 때 합신의 어떤 선배목사님이 저에게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기회를 줍니다. 그 은혜로 밥을 굶지 않고 그 교회에서 1년 간 사역을 하게 됩니다. 1년이 지난 후 저는 다시 전북 진안의 어느 시골로 개척사역을 떠납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2년을 못 채우고 다시 충북 제천으로 사역지를 옮깁니다.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천에서 14년간 사역하면서도 연속되는 실패를 맛봅니다. 교회가 어려워서 10여 년 동안이나 서울 강변교회(김명혁 목사님 시무)에서 후원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선교원을 운영해서 생활비를 충당합니다. 목회가 계속 어렵게 되자 다단계사업을 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단계 사업으로 목회가 잘 되기는 커녕 오히려 어머니가 넣어주신 아들의 교육보험까지 다 털어 넣고 맙니다. 그로 인해서 교회는 더욱 어려워지고 맙니다. 자식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제천에서 2년쯤 목회를 했을 때의 일입니다. 목회가 갈수록 힘이 듭니다. 결국 어느 날 아내에게 힘들어서 더 이상 목회를 못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고는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도망을 쳐버립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아내의 금식기도로 다시 돌아오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목회를 계속합니다. 목회자가 된 것을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제천에서 14년이 지나자 저의 심신은 물론 교회까지 모두 지쳐 버립니다. 더 이상 그곳에서 사역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사역지를 찾습니다. 그 때 지금 사역하는 통영사랑교회에서 첫번째로 오라고 합니다. 저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통영으로 옵니다.
통영사랑교회의 사역 역시 실패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서 목회를 해도 생활비 보조를 받지 않으면 목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어렵습니다. 조금 모이다가는 줄어들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17-8명에서 더 이상 부흥이 되지 않는 장기 침체기를 맞게 됩니다. 하루하루 목회하는 것이 고역중의 고역입니다. 그렇다고 목회를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이가 너무 들어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20년이 넘게 목회를 하는 동안 저에게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번 TV를 시청하면 절제가 안 되어서 계속 시청하는 것입니다. 그 일로 아내의 핀잔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절제를 하려고 해도 며칠 못 가서 또 그 병이 도집니다.
TV시청도 절제를 못해서 헤매고 있던 저에게 설상가상의 일이 또 하나 생깁니다. 지금부터 4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회를 오신 어떤 강사목사님이 저에게 인터넷바둑을 가르쳐 주고 가십니다. 그 때부터 저는 인터넷 바둑에 미쳐서 세월을 보냅니다. 아내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터넷 바둑에 매달립니다. 한번 두었다 하면 몇 시간을 계속 두기 때문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아파옵니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또 두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바둑을 두고 또 두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주 아내 몰래 밤에 잠도 안 자고 인터넷 바둑을 둡니다. 그 다음날 새벽 기도때는 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절제하려고 노력해도 도무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계속 내리막 길을 걷습니다.
결국 저는 더 이상 설교를 준비할 수조차 없는 영적 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어렵사리 설교를 준비하더라도 제대로 설교할 수도 없게 됩니다. 아내가 하도 딱하게 보였던지 설교은행에서 설교를 사서 줍니다. 남의 설교라도 베껴서 하라는 것입니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몇 주간을 그런 식으로 설교를 때웁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불쌍한 신세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 목회나 해라' 라는 말이 서양에서 큰 욕이라는 얘기가 실감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이웃교회 목사님이 양산에 있는 감림산 기도원에서 은혜가 넘치는 무료세미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쉬어 보려는 마음으로 참석하기로 합니다. 일단돈이 들지 않아서 안심하고 갑니다. 기도원에 가보니 약 1천여 명의 목회자와 사모들이 모여 있습니다.
‘아니, 무슨 목회자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강사는 청교도 영성훈련원장 전광훈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소속이 예장(대신)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대신 측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을까?‘
세미나가 개회되자 전광훈 목사님이 성령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령세례란 오순절로 끝났다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강사목사님이 성경을 들어서 성령세례가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역시 대신 측이라서 무식해, 성령 세례는 오순절로 끝났는데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신학은 역시 정통으로 개혁주의신학을 해야 한다니까.'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사님의 성경해석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강사님이 성령세례가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성경의 근거를 많이 제시하며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어, 설교를 한번 진지하게 들어봐야 하겠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강사님의 말이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성경을 남만큼은 읽은 사람입니다. 합신에서 탄탄한 개혁주의신학을 공부한 바도 있습니다. 성경과신학에는 나름대로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의 신학과 성경지식을 총동원해서 강사님의 말을 반박하려고 해도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성령세례 단회론이 너무나 성경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세례 단회론은 모호한 성경을 근거로 만들어진 반면 성령세례 연속론은 확실한 성경을 근거로 만들어 졌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저는 지금까지 제가 믿고 있던 성령세례 단회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신학적인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이상 회개를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성령세례 단회론을 가르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에게도 성령세례를 주시옵소서! 저의 목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달라지게 해 주시옵소서!"
다음날도 계속 회개를 합니다. 그 날 오후 집회시간은 중국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님이 담당을 합니다. 그분이 설교를 한 후에 안수기도를 해 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 선교사님이 안수를 해주면 성령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님이 설교를 마칠 때쯤 저의 마음에 그 선교사님에게 안수를 받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저 선교사님에게 안수를 받으면 나도 성령을 받을 수 있겠다!‘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강단으로 걸어 나갑니다. 저의 내성적인 성격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자 앞에 앉아 있던 다른 분들이 서둘러서 강단으로 올라갑니다. 순식간에 강단이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그 선교사님은 하는 수 없이 설교를 서둘러 끝내고 통성기도를 시킵니다. 그러고는 강단에 나온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선교사님이 저에게는 안수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궁금해서 눈을 떠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선교사님이 저의 반대쪽에서 안수기도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급한 나머지 그 쪽으로 이동해서 강당 끝에 올라섰습니다. 다시 눈을 감고 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저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또 다시 한참을 기도해도 선교사님이 안수를 안 해줍니다. 또 눈을 뜨고 봅니다. 이번에는 선교사님이 아까 제가 있던 자리로 이동을 해서 안수를 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또다시 강단을 내려와서 선교사님이 안 수하는 곳으로 가서 겨우 강단 끝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아마도 눈을 뜨고 제 모습을 보고 있던 분이 있었다면 제 꼴이 꽤나 우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갈급하고 다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웃을거라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드디어 한참 만에 그 선교사님의 손이 저의 머리에 닿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것같이 온몸이 짜릿합니다. 그러더니 곧바로 혀가 떨리면서 방언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온몸 역시 벌벌 떨리기 시작합니다. 한참 동안 그런 현상이 계속됩니다. 그 감격과 감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체험이 있고 난 이후로 제 속에서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날마다 축 처져서 지내던 사람이 팔팔하게 됩니다. 신기해도 보통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와서 설교를 합니다. 놀라운 힘이 솟아납니다. 설교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설교가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옵니다. 저도 놀라고 성도들도 놀랍니다.
그 후부터 제가 그렇게 좋아하던 인터넷바둑을 얼마든지 절제할 수 가 있게 됩니다.
TV 시청 역시 매우 쉽게 절제가 됩니다. 너무나 놀랍습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을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 또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도생활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30분도 기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 나자 기도를 1-2시간 하는 것은 쉽게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매일 바둑을 안 두면 답답해 하던 사람이 매일 기도를 안하면 답답해 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성령을 받은 후 몇 달 간은 성도들이 매우 의아해하는 눈치를 보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저를 매우 의심하는 눈치도 보입니다.
'목사님이 뭘 잘못 받아서 저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거 이러다 교회 망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하지만 저는 성도들의 염려와 의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령의 충동대로 활발하게 목회를 합니다. 설교도 원고에 얽매이지 않고 줄거리만 적어서 자유롭게 합니다. 기도도 힘있게 합니다. 찬송도 힘있게 부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성도들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성도들 중에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 해서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에 생동감이 넘쳐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당을 방문하는 목회자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교회를 옮길 생각은 없는가' 라고 묻습니다. 교회당 위치가 매우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은 사면이 도로로 막혀 있습니다.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부흥되기가 매우 힘든 위치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성령 받은지 1년 정도 지난 후부터 교회가 서서히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신자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울면서 예배를 드리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 신자들은 모두 급속도로 변화가 됩니다. 술에 찌들어 살던 사람들이 즉시로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됩니다. 우상숭배에 찌들어 살던 사람들이 즉시 우상숭배를 중단하기도 합니다. 가정파탄 직전에 간 가정이 단시일 만에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약 5개월 정도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가 제가 '이것이 성령세례다!'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하루에 1시간만 기도하기를 계속합니다. 1년 정도 그렇게 한 결과 저의 영력이 크게 약화되고 맙니다. 교회가 다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라 고민합니다.
성령도 받았고 하루에 1시간씩 기도를 하는데 왜 가라앉는 걸까? 하나님의 은혜로 정필도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기도 부족이 원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최선을 다해서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자신이나 교회가 다시 살아납니다.
4. 조나단 에드워드와 무디:
로이드 존스 목사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두 주역 조나단 에드워드와 D.
L. 무디의 성령세례 받기 전의 삶과 성령세례 받은 후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해 줍니다. 먼저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령세례를 받은 장면부터 보겠습니다.
"나는 1735년에 나의 건강을 위해 숲 속으로 말을 타고 한적한 곳에 가서, 평소에 하던 대로 명상과 기도를 위해 걸어가려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 때에 나는 나에게 임한 특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는데, 나는 그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한 모습과 은혜와 사랑을, 그리고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약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때에 나는 소리내어 크게 울면서 눈물 바다를 이루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기에서 다시금 D.
L. 무디를 상기시키려 하는데, 이 사람은 이전에도 회심한 사람이었으며, 또 그는 거기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뉴욕 시 '월스트릿에서 그에게 발생했던 것에 비춰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일 후에 무디는 미국과 그 밖 "의 다른 곳에서 그처럼 쓰임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 생애의 전환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증인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박영선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찰스 웨슬레, 무디, 조지 휫필드 등과 같은 사람들의 일기를 보면 그분들의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체험들을 본인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도 사도들이나 조나단 에드워드나 무디와 같이 개인적인 오순절 성령체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성령세례 받은 것이라 믿고 있습니까? 한 번 스스로 자신에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5. 불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 문제를 다루면서 성령세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불세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불세례에 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불세례에 대한 성경의 근거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1).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세례가 나옵니다. 그것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입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는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엄격히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그리고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1) 물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물세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2) 성령세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예수 믿는 사람 중에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 역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생략합니다.
3) 불세례는 무엇일까요? 문제는 성경에 불세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여러가지 주석도 불세례에 관해 이런저런 설(說)만 제시할 뿐 정확한 설명은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불세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 함에는 해석이 두 가지가 있으니 곧 (1)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끝까지 주님을 불신앙하는 무리들이 멸망의 심판 받을 것을 의미한다 하고,
(2) 성령세례의 성결을 가리키는 말뿐이라 한다.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 받는 자의 죄악이 깨끗해지는데, 그것은 불로써 무엇을 태워서 깨끗하게 함과 같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역시 "불세례는 심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다음은 박영선 목사의 말입니다.
"불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과 대조를 해보아야만 잘 이해가 됩니다. 불은 우리 모두를 심판 아래, 사망과 멸망 아래 가두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물이 물 위에 뜰 수 있는 것 (사람이나 배 등-필자 주)을 물 속에 삼켜 가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의미입니다.
과연 불세례는 박윤선 박사가 위에서 소개한 두가지 중의 하나를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언급한 순서로 볼 때, 불세례는 성령세례를 받은 다음에 받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분명히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그리고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불세례에 관한 암시를 주셨다고 여겨지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 10:38-40).
그랜드 종합주석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얻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자신을 포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잔과 '세례'라는 말로 설명하신다. 마태는 세례는 언급지 않고 잔' 이라는 말만 언급하고 있다."(마 20:23).
즉, 불세례가 고난을 의미한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이미 두 가지 세례를 받으신 상태였습니다.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셨고, 물세례를 받고 난 직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여 성령세례도 받으신 상태였습니다.
성경학자 마이어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세례를 받으신 본문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는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자기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보증을 받으셨던 것이다. 우리들도 또한 예수를 참으로 그리스도로 증거하신 같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은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의 예수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1).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도 받으셨다는 또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다음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7).
이 말씀에서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라는 말이 바로 제가 성령충만론에서 설명한 대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곧 성령세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엡 1:13 참조요).
이처럼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나는 아직 한 가지 받을 세례가 남아 있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받을 세례가 '십자가 고난' 이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앞으로 받을 세례는 '불세례'가 분명한 것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두 세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물세례는 죄를 씻은 표시로 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세례와 불 세례도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세례는 즐거움을 수반하지만, 불세례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불세례가 고통을 수반한 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소개했듯이 예수님이 장차 받으실 불세례를 생각하면서 크게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불세례가 순교를 의미한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 에서 가진 바 더회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1).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1) 산 사람이 별세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2) 거의 죽어 가는 성도가 가족이나 친지에게 전도할 때 전도 받은 사람이 감동을 받아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3) 죽은 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4) '죽은 자들을 위하여' 란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 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부활할 것' 이란 말을 보충하는 것이니 자연스럽지 않다. 이 밖에도 30-40여개의 다른 해석을 이 말씀에 붙인다고 한다. 어쨌든, 세례받은 자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염두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랜드 종합주석을 보면 성경 주석학자 플랫(Flatt), 라이트 풋(Lightfoot), 고데(Godet) 등이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의 세례란 죽음의 세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랜드 종합주석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서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세례' 라고 하신 말씀에 의하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가 죽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옳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9-31을 더 잘 이해하려면 다음에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 8:21-22).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 해석이 옳습니다. 따라서 죽은 자에 대한 이런 표현을 볼 때, 바울이 말 하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 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 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 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해 순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29-31의 문맥을 보십시오. 그러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어째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죽는 것'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장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부활이 있음을 강조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런 세례를 받는다. 내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고난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9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는가?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할 이유가 없다"
(고전 15:19).
바울의 이런 고백과 본문의 문맥을 볼 때,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영이 죽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플랫(Flatt), 라이트(Lightfoot), 고데(Godet) 등의 주석학자가 고린도전서 15:29의 '세례' 를 죽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 성령충만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하게 살 때가 되어서야 죽음을 불사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성령충만이 약화될 때는 핍박을 두려워했습니다(행 4:29). 바울도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하게 살 때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행 20:24), 성령을 받은 바울이라고 해도 성령충만하지 못할 때는 겁을 내고 도망을 쳤습니다(고후 11:30-33). 이런 증거들을 볼 때, 고린도전서 15:29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세례에는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세 종류의 세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물세례는 영적 생명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세례입니다.
(2) 성령세례는 영적 생명이 성장하여 주의 일을 능력 있게 하도록 하는 세례입니다.
(3) 불세례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영적 생명이 영혼구원을 위하여 고난받고 순교로 일생을 마치게 하는 세례입니다.
이는 출생과 성장과 죽음이 모두 세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사도들이 그랬듯이, 이 세가지 세례는 하나도 빠짐없이 받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 가지 세례가 무엇인지 몰라서 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면서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불세례에 관한 저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물세례만 받았습니까? 성령세례까지 받았습니까? 아니면 이 두가지를 모두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불세례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구원하다가 고난을 받고 순교를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불세례는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마저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세례를 받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충만을 받아 불세례를 감당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핏방울같이 흘리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도 불세례를 받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을 정도로 힘든것이 불세례입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불세례는 나는 얼마든지 불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고 받는 것도 아닙니다. 장담으로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다음과 같은 헛된 장담이 이를 증명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5).
이렇게 장담한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불세례를 받아 순교자의 반열에 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충만한 상태를 극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힘들어하시고, 주기철 목사도 힘들어한 것이 불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극대화하는 것 외에는 불세례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세례를 받은 사람, 즉 순교한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충성한 만큼 상을 주십니다. 그 상을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상을 바라보면서 불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령충만을 극대화 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상급에 관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가 아무리 면류관을 받을 조건을 획득했다고 해도 그 이후에 게으르게 신앙생활을 하거나 범죄를 하면 그것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11).
이처럼 천국에 가서 받기 전에는 면류관을 얼마든지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상을 잃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면류관은 천국에 가서 한 번 받으면 영원히 가지고 있게 됩니다. 면류관이 없는 사람은 그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불세례를 받음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순교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이 최고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달려서 기어코 월계관을 쓰려고 애쓰는 올림픽 마라톤선수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극대화하여 불세례까지 받아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Note>:
If you click the individual link of No. 1 through No.11 below, you can read each of them.
아래의 1번부터 11번까지의 링크를 각각 클릭하시면 글을 하나 하나 읽으실 수 있습니다:
1) "신앙생활의 실패요인과 해결책" ("Reasons for failure in life of faith and the solutions"):
Please note that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born of the Holy Spirit' and 'Being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is explained in the middle of this website (in Korean first and in English next). 이 웹사이트의 중간 지점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의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한글 먼저, 영어는 다음에 기록됨).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05/spirit.html
2) "당신의 영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Listen to your spirit"):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06/blog-post.html
3) "예수, 치료자" ("Jesus, the healer"):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1/jesus-healer-by-e-w-kenyon.html
4) "예수, 그 놀라운 이름" ("The Wonderful Name of Jesu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1/4-wonderful-name-of-jesus-by-e-w-kenyon.html
5)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Jesus,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2/mans-need-of-mediator.html
6) "성경에서 증거하는 우리의 구속" ("Our Redemption testified in the Bible"):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1/6-redemption.html
<참고자료>:
** '거듭남'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의 차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jF30Vf2b9EftrfAT9b3owOIK5Wig6KlB/view?usp=share_link
** "사람의 영의 거듭남, 성령의 세례와 내주, 성령의 충만에 관한 주장들에 대한 검토."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QJEFMEoLn5EYt4g-pXOBMZTphvVzBIwc/view?usp=drive_link
8)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 있는가?"(How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by A. W. Tozer: In 한글(Korean) & English; click below link to read i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8.html
https://drive.google.com/file/d/1XzL6PNaQoAbuFwFQ9VD7z3HxPoLE92cQ/view?usp=share_link
9)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 by 케네스 해긴:
[How You Can be Led by the Spirit of God?] by Kenneth E. Hagin:
*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Korean text):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please CLICK the link below.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9.html
10) “하나님을 추구하기” (“The Pursuit of God”) by A. W. Tozer: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in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in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12/11-mystery-of-holy-spirit.html
12) (book) “성막으로부터 가르침” (Teaching from the Tabernacle) by C. SUMNER. WEMP: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4/10/12-tabernacle.html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