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경에서 증거하는 우리의 구속(Our Redemption testified in the Bible)
제목: 성경에서 증거하는 우리의
구속(Our Redemption testified in the Bible):
(원제): THE BIBLE IN LIGHT OF OUR REDEMPTION - BASIC BIBLE COURSE by E. W. KENYON
<안내말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큰 분량을 갖고 있지만, 그것의 일관된 핵심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our Lord Jesus Christ)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our Redemption)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방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 전체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관점을 가지고, 종합적이고도 통찰력있게 잘 설명함으로써,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소화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구속을 좀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구속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핵심 메시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authority)를 가졌다는 것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는 사실입니다(요 1:12; 행 2:21; 롬 10:13). 그래서 제가 여러분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로 번역하였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곳에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안에 약간의 설명을 삽입하였으며, 또, 저자의 몇 가지 특정한 진술에 대해서 여러분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 제가 ‘주의 요망” 이라고 표시했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바라옵기는, 여러분이 이 책을 꼭 여러 번 읽으시고 핵심을 소화하셔서 신앙생활에 적극 활용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번역본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다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원본은 영어 독자들을 위해 이 한글 번역본의 마지막에 구글드라이브 링크에 담아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18/2023 박영진 목사)
<Note>:
The Word of God, the Bible, has a large volume, but its consistent
core content is our redemption in our Lord Jesus Christ. So, we must understand the Bible from the
perspective of redemptive history. If we don't do that, we will miss the
central message of the Bible and wander. So, the author comprehensively and insightfully explains the entire Bible from Genesis to Revelation with the perspective of God's redemption only in Jesus Christ, so that when we read and digest this book, we can understand the redemption of God's love for us more clearly and then apply it to our lives. The core message is, first of all, that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as the Lord have the authority of children of God, and that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John 1:12; Acts 2:21; Rom 10:13). So, I translated this book into Korean to make it
easier for you to read this book, and where additional explanations are needed,
I have inserted some explanations in parentheses for your understanding, and
also for some specific statements by the author, in order to avoid any
misunderstanding, I marked 'Caution Needed' and explained why. I pray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you read this book many times, digest its
core, and actively apply it in your life of faith. Also, if you read this
translation and received God's grace, please share it with people around you.
The English Text is included in the Google Drive link at the end of this Korean Translation for English readers, so please refer to it. (1/18/2023 Pastor Young J.
Park)
<목차>
1. 창조에 대한 이유 (The
Reason for Creation)
2. 사람의 창조 (The
Creation of Man)
3. 사람의 반역과 그 결과
(Man’s Treason and Results)
4. 영적인 죽음의 지배
(The Reign of Spiritual Death)
5. 사람의 의의 필요성
(Man’s Need of a Righteousness)
6. 사람의 중보자의 필요성
(Man’s Need of a Mediator)
7. 약속된 성육신 (The
Promised Incarnation)
8. 아브라함과의 언약 (The
Abrahamic Covenant)
9.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God’s Covenant People)
10. 이집트로부터 구원
(The Deliverance from Egypt)
11. 광야에서 언약 백성들
(Covenant People in the Wilderness)
12. 율법과 성막 (The Law and the Tabernacle)
12. 율법과 성막(계속)
14. 제사장직 (The
Priesthood)
15. 제사 (Offering)
16. 대속죄일 (The
Great Day of Atonement)
17. 구약 성경의 개요
(Synopsis of Old Testament)
18. 성육신 (The
Incarnation)
19. 성육신이신 분의 삶
(The Life of the Incarnate One)
20. 구속 (Redemption)
21.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Our Identification with Christ)
22. 하나님의 두가지 창조 (God’s Two Creations)
23. 예수의 이름
(The Name of Jesus)
24. 그 말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계시 (The Word, God’s Revelation to Man)
25.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
(The Present Ministry of Christ)
26. 치유 (Healing)
27. 그리스도의 주 되심
(The Lordship of Christ)
28. 그리스도의 주 되심(계속)
29. 새로운 피조물의 법
(The Law of the New Creation)
30. 사랑의 법 (The
Love Law)
31. 성령 (The
Holy Spirit)
31. 성령(계속)
32. 성령(계속)
33. 그리스도의 재림
(The Second Coming of Christ)
34. 그리스도의 재림(계속)
35. 두 종류의 지식 (Two
Kinds of Knowledge)
36. 사람의 계시의 필요성
(Man’s Need of a Revelation)
1과. 창조의
이유: THE REASON FOR CREATION:
사람(MAN)은 그 자신이 창조물의 일부인데도 하나의 설명될 수 없는 창조(Creation)에 직면해 있습니다(창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말임). 이 창조물(Creation: 창조)과 그것을 지배하는 고정된 법칙의 철의 손(the iron hand)은 사람에게 하나의 최고의 설계자(Master Designer)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그 창조주(the Creator)께서 어떤 목적, 즉 그것의 존재의 이유를 성취할 수 있도록 창조(Creation: 창조물)를 설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에서 목적은 사람을 위해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야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만일 우리가 창조물에서 사람을 빼면 그것의 자원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갖는 창조물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사람은 창조의 주목적이므로 창조에서 사람이 빠진다면 다른 창조물들은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의미가 없다는 말임).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한 하나의 집(home)으로 우주(the universe)를 창조하셨다면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하나의 이유(reason)를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이 이유, 즉, 자기 자신의 존재(existence)를 위한 이유를 헛되이 추구해 왔습니다. 사람이 창조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회의주의(Skepticism)가 생겨났습니다. 과학의 첫번째 경향은 우주에 대한 기계적인 설명만 제공하면서, 무신론적(atheistic)이고 유물론적(materialistic)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자들이 창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더 깊이 파고들면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게(God-conscious) 되었습니다. 그들은 창조물 배후에 지적인 창조주(intelligent Creator)가 계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감각적 지식.... 오감(5 senses)에서 파생된 지식.... 만으로는 그분 또는 그분의 창조 목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비고: 과학은 인간의 삶에 편의를 제공하지만, 그러나, 결코 사람의 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고, 단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오감만을 활용해서 물체를 인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을 결코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수도 없게 만들기에, 과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목적을 알게 하는 일에는 무익하다는 말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능력은 하나님이 영(a Spirit)이라는 사실과 사람이 그분과 접촉점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비고: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이 그 원죄로 말미암아 그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아는 것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임.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원죄로 인해 그의 영이 죽어 있기 때문임).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영의 성품(spirit nature: 마귀의 성품을 말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중추신경계와 오감을 통해 우주 또는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가집니다. 사람은 이 오감(즉,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명(human life)을 향해 무관심하고 여러번 잔인한, 육체적인 생명(physical life)에 대해 상당량 배웠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찾을 수 없었거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에 관한 하나의 계시(Revelation)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계시와 접촉할 수 있도록 사람의 수준으로 그 계시를 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 지식(Revelation Knowledge)"이라고 부릅니다. 그것(계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으로부터 오는 우리의 재창조된 영(our recreated spirits)을 통해서 얻어집니다(우리의 영은 오직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계시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고 우리의 거듭난 영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섭취하고 분별할 수 있다는 말임). 고린도전서 2장은 우리에게 이 계시에 대해 알려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합니다(고전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Man)은 그의 감각 지식에 한계가 있어 한 사람(a man)의 그 안의 생각들(the inner thoughts)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그의 시각, 청각 또는 촉각을 가지고 뚫을 수 없는 육체(flesh)의 휘장(veil)이 있습니다(사람은 그 육체의 휘장 넘어로 영이 존재하는데 그 영은 육체의 오감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임). 그러나 한 사람은 말(words)의 매개(medium)에 의해 그의 안의 생각(thoughts)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므로 그분 속의 생각(His inner thoughts)과 목적(purpose)을, 사람이 시각으로 볼 수 있고, 또, 읽혀지거나 해석되어진 것을 청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씀들(words)로 만드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12, 13,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영이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것들을 영적인 말들로 분별하느니라.…."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거나 접촉할 수 있는 다른 채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찾기 위해 그 계시(revelation)로 향합니다(turn to that revelation).
<지구는 하늘(들)의 이유입니다>:
The Earth Is the Reason for the Heavens:
우리 지구는 천체의 광대한
수와 크기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그래서, 만일 지구가 인간의 생명에
의해 거주되는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행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에 대한 연구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지구가 아무리 작아도 사람이 사는 유일한 곳이기에 반드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임). 창세기 1장은 지구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14-19은, 지구가 어둡고 끝이 없는 우주를 공전하는 모든 천체(heavenly
bodies)의 이유(reason)라고 선언합니다. 과학(science)은 이 모든 광대한 우주 전체 안에서 지구에 대해 영향력을 갖지 않는 행성(planet), 태양, 달 또는 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그 모든 것이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임). 우리의 태양(sun)은 약 9,300만 마일 떨어져 있지만 이것은 열, 빛, 비, 바람의 기후 조건을 유발하여 이 행성이 인간, 동물 및 식물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그 작은 지구 볼(earth ball)은 인간이라는 소중한 짐을 싣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태양 주위를 부드럽게 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을 인용하자면: "그것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이 되게 하라." 우리는 대양과 바다(oceans and
seas)의 조수가 그 천체(heavenly bodies)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위(heat)와 추위(cold), 가뭄(drought)과 폭풍(storms)이 행성의 영향(planetary influences)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정 행성들의 위치와 영향에 의해 이 대륙(지구를 말함)의 특정 지역에 대한 폭풍(storms)이 예측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성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몇 달 앞서서 서리(frosts)와 열파(heat waves)가 예측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론으로부터 우리는 행성들(the
planets)이 우리에게 계절을 주고, 징조(signs)가 되고, 항상 지구에 봉사하는 지속적인 동반자(companions)이자 종(servants)이 되기 위해 하늘들(heavens)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봅니다. 하늘들은 지구의 유일하게 완벽한 시계(timepiece)입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만든 어떤 시계(watch or
clock)도 우리에게 완벽한 시간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별들의 경로를 아시는 분(창조주 하나님을 말함)은 모든 별, 태양 또는 행성이 계획된(정해진) 시간에 거대하고 경로가 없는 공간의 특정 지점을 지나갈 것임을 아십니다. 그 별은 수천 년 동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일정보다 1초 앞도,
1초도 뒤쳐지지 않고 하늘의 갈림길에 나타날 것입니다. 오!, 그 건축가의 경이로움, 그 창조주의 놀라움, 이 위대한 우주의 유지자(지탱자)의 능력이여! (Oh,
the wonder of the Architect, the marvel of the Creator, the might of the
Sustainer of this great universe). 지구의 천 개가 태양 안에서 잃어버려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우리들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자 이유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 지구의 이유(reason)는 사람(Man)입니다>: The Reason for the Earth Is Man:
지구가 (별이 있는) 하늘들의 이유라면 지구에 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은 창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련의 행위들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창조 행위(creative acts)는 인간의 창조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안식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전체 창조 활동(movement)의 목표(goal)였습니다. 과학은 여기서 인간을 창조의 정점에 두는 성경의 창조 설명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사람(Man)은 하나님의 작품들(works)에서 마지막이자 최고였습니다. 지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사람이 없이는)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성품(Unconscious nature: 생명이 없는 존재)은 그것(지구)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도, 숙고할 수도, 그것이 생산해 온 것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던 한 사람(a man)을 이 지구(earth) 위에 두셨을 때만이 창조되었던 광대한 우주에 대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그분의 솜씨(workmanship: 작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고, 또, 그것(지구)의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들)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 말씀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 지구를 사람에 의해 거주되도록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분의 창조 활동을 통해 그분은 사람이 이 지구 위에서 그의 생활에 가질 수 있는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위해 온갖 종류의 재물의 보물을 쌓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구의 가슴을 철, 구리, 은, 금 매장물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금속, 화학 물질과 능력들(forces)로 채웠습니다. 그분은 지구의 표면을 산과 골짜기와 협곡과 고원과 평원과 아름다운 개울과 시냇물과 강으로 덮으셨고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heart)을 기쁨으로 감동시키는 아름답게 채색된 많은 꽃으로 덮으셨습니다. 과일들과 채소들은 사람을 위해 식량(food)을 공급했습니다. 인간의 필요와 기쁨의 위대한 건축가(창조주 하나님)는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안 그 사람의 필요를 아셨고 창조의 경이로운 계획에서 이러한 필요가 충족되었습니다. 사람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즐기거나 그것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the only
creature)입니다.
<사람의 이유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입니다>: The
Reason for Man Is the Father-Heart of God:
우리는 지구가 별들의 우주의 이유이고 사람이 지구의 이유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사람을 창조하기를 원하셨는지 알기 전에는 창조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창조에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1-3과 골로새서 1:16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위대한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계시합니다. 시편 104:30과 창세기 1:2은 성령의 창조 사역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는 구약 전체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들의 메시아임을 깨닫게 된 요인 중 하나로 구약에 감춰진 삼위일체를 흘끗 보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누가 삼위일체를 구성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실 때까지 인간은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르치는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여러 차례 삼위일체가 사람의 감각에 나타나셨습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 3:13-17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례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시고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소리를 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삼위일체(the Trinity)를 성부(the Father)와 성자(the Son)와 성령(the Holy Spirit)인 것으로 계시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태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분은 태초에 한 아버지-하나님(a Father-God)이셨습니다. 영원 안에서 그분은 한 아버지의 성품(a Father-nature)을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열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우리 문명은 이 사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15절은 그 인간 아버지(the human father)가 그 아버지-하나님(the Father-God)의 모형일 뿐임을 계시합니다. 인간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아버지-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그 아버지 마음(the Father-heart of God)이 아들들과 딸들을 사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간절한 마음이 구체화되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과 동행할 사람을 창조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 5 (Rotherham),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분의 꿈의 계획(dream plan)에서 사람은 아들의 자격(Sonship)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모함에 대한 답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창조의 이유임을 밝히는 다른 성구는 로마서 16:25과 고린도전서 2:7입니다. 이 구절들은 사람이 먼저 아들의 자리로 선택되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사람의 집으로 창조하셨음을 계시합니다. 우리의 성경 학교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먼저 아버지-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창조의 이유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에 대한 그 아버지의 돌보심을 나타내는 몇 가지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7:11; 6:8; 6:25-32; 요한복음 16:27; 17:23; 베드로전서 5:7; 빌립보서 4:6, 7, 19 와 요한복음 14:23. 사탄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성품(the Father-nature of God)에 대한 우리의 생각(minds: 혼: 정신)을 눈멀게 하는 데 매우 교묘합니다. 평범한(average)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진정한 의식(real consciousness)이 없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우리의 생각(minds: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1-2, 에베소서 4:23 참조). 여기서 우리는 말씀 연구의 중요성을 봅니다. 감각 지식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에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일서 1:1, 2,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다루어 왔던 일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취하셨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man)에게 나타내셨습니다(manifested). 사람의 생각(mind)은 육체적인 몸의 감각을 통해 그것의 지식을 얻습니다. 그 아버지(하나님)는 영의 존재(a Spirit being)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들에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mind)은 그분에 대한 어떤 정신적 그림(mental picture)도 형성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거듭나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삶(life)에 대한 과거의 감각 지식이 그의 삶에서 아버지가 가져야 했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영이 거듭나게 될 때 비로소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임).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적인 그림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만을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사람의 생각(mind)의 새롭게 됨(renewal)은 그의 삶을 혁신시키는 그에게 그 아버지(the Father)의 의식을 가져옵니다(비고: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날마다 그의 생각이 변화를 받게 되면, 그 아버지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그의 삶의 혁신을 가져온다는 말임).
<하나님의 속성들>: The Attributes of God:
이 계시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성품(nature)은 창조 때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여기에 계시된 그분의 존재(being)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분이 믿음의 하나님(a Faith God)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사랑(Love)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주를 창조하게 하셨고 그분은 믿음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믿음에 의해 일하십니다(He works by Faith in His Word: 그분은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일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는 여섯 가지 창조적인 믿음의 진술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in His Word)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계시합니다. 창조(creation)가 존재물로 생겨난 것(came into being)은 그분의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였습니다.
<질문>: Questions
1. 두 종류의 지식을 주고 설명하십시오.
2. 하나님은 인간의 계시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키셨습니까?
3. 지구가 천체의 존재의 이유임을 알려 주는 성구는 무엇입니까?
4. 사람이 지구의 존재의 이유인 이유를 가능한한 충분히 설명하십시오.
5.
"엘로힘"이라는 단어에는 무엇이 계시되어 있습니까?
6. 하나님의 아버지의 성품을 계시하는 몇가지 성경 구절을 제시하십시오.
7. 사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대답을 설명하십시오.
8.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하늘 아버지로서 하나님 안에서 믿음(faith)과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서 믿음을 갖지 않습니까?(비고: 왜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들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는가 or 왜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지 않는가 라는 질문).
9.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두 가지를 말하십시오.
2과. 사람의 창조: THE
CREATION OF MAN: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사람이 창조의 이유(the reason for creation: 창조를 위한 이유)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교제를 위한 그분의 부르짖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연구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을 위해 준비하신 일을 설명합니다. 첫째, 그분은 인간을 위한 우주를 계획하셨고 그 우주의 중심에 거처를 마련하셨습니다. 사랑이 이 거대한 우주의 기초를 놓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이 그의 사람을 위한 집이 되도록 계획하고 목적을 세웠습니다(창세기 1:25).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은 승인의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그 집은 이제 사람을 위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26: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싶다 는 엄숙한 선언을 하십니다. 교제(fellowship)가 사람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알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비고: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의 교제를 위함이었슴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말임). 하나님의 생명(life)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는 하나님의 수준(class), 하나님의 영역(realm)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창조주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기 위해 가능한한 신성과 같이 가깝게 창조되어야 합니다(He must be created as near like Deity: 하나님의 창조목적상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슴을 말하는 것임)
<사람, 하나의 삼위일체 존재>: Man,
a Triune Being: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첫번째 사람이었습니다(창세기 2:7). 그의 죄(sin)를 통하여 사람의 타락(the fall)이 왔습니다. 사람은 타락한 후 그의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육신(the Incarnate One)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가 영의 존재(a Spirit Being)임을 계시하셨습니다(요한복음 4:24). 바울은 그의 계시에서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삼위일체 존재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3). 그 영(the spirit)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사람(the real man)입니다. 혼(soul)은 이성적인 기관(reasoning faculties)을 포함합니다. 아버지 하나님(The Father-God)은 자신의 형상대로 혼과 몸을 가진 하나의 영의 존재인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혼과 육체는 영을 위해 창조된, 이 물질적 우주에서 그의 삶을 위해 그에게 적합합니다. 진짜 사람은 영(spirit)입니다. 사람은 영의 영역인 하나님의 영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행해야(walk in fellowship with the Father-God) 했습니다. 당신의 몸(body)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Mind: 혼)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용하는 생각(mind)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용하는 몸을 소유합니다. 당신의 생각(mind)과 몸(body)은 단지 당신의 영, 즉, 진정한 당신(the real YOU)의 도구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은(spiritually dead)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기(walk with God) 위해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사실 때문에, 모든 자연인(거듭나지 않은 사람: 불신자)은 육체에 속한 오감을 통해 그가 얻는 현실(reality)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인체의 이러한 물리적 감각 기관은 같은 물질(substance, matter)과 같은 것으로부터 단지 하나의 자극(stimulus)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감각들(senses)은 그를 위해서만 물리적 또는 물질적 영역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물질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영적인 영역도 존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the Father), 성령(the Holy Spirit), 천사들(the Angels), 사탄(Satan)과 귀신들(Demons)은 모두 영의 존재들(Spirit Beings) 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들은 이 영적 영역(spiritual realm)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0절은 우리를 둘러싼 영적 전쟁을 보여줍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감각 기관들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적 접촉을 통해서 성령이나 천사들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주의 요망!). 요한복음 16:7-15; 히브리서 1:14; 요한복음 14:23; 고린도전서 3:16; 베드로전서 5:8; 마가복음 16:17; 요한일서 4:1-6; 야고보서 4:7을 읽으십시오. 의사가 칼끝으로 사람의 영혼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주의자들(materialists)과 무신론자들(atheists)은 몸(the body)이 사람의 전부라고 말해왔습니다. 로마서 1:18-25, 28: 사람은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 모시기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육체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거나 그의 육체적인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거나, 그분을 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각 지식에 제한된 한 사람이 물질(matter)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물고기(fish)는 물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주로 영의 존재이며 아버지 하나님(the Father- God)과 그분의 수준에서 함께 걷도록 창조되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몸을 전혀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람의 교제는 그분과 함께 완전했고(perfect) 온전했습니다(complete). 이것은 사람의 몸이 그의 영에 종속되었고 그의 영이 (몸을) 지배해야(dominate) 했슴을 계시합니다. 사람의 영은 그의 생각(mind: 혼)과 몸(body)을 다스려야만 했었습니다. 몸(the body)은 하나의 몸의 영과 혼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영은 혼(or 지성)을 통해 작동하고 이들(영과 혼)은 차례로 몸을 통해 작동합니다(operate). 죽을 때, 그 사람(영)과 그의 혼은 그 몸을 떠납니다. 사람이 그 몸을 떠날 때, 그 몸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해(dissolution)와 해체(disintegration)가 즉시 시작됩니다.
<사람의 의지>: The Will of Man: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에게 주신 또 다른 최고의 특징은 사람의 의지였습니다. 그 의지는 선택의 힘, 선택하는 능력,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의지를 가진 존재를 창조함에 있어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존재는 창조의 이유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의지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아닌 기계,
꼭두각시, 사람이 아닌 로봇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본능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의 깊은 사랑,
그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서 사람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꼭두각시와의 교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9:23을 읽으십시오.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요한복음 14:21-24.
<사람의 생각(정신)>: The Mind of Man:
성경은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생각(mind: 정신: 지능), 즉, 지적으로
동물 창조물 전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의 그런 인격(character)의 정신(mind)을 가졌다고 선언합니다. 창세기
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사람(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사람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사람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우리가 아담이 명명한 벌레, 새, 지렁이,
짐승, 물고기, 파충류가 50만 마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가 그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릴 수 있게 한 지적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의 이유가 친교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갈망(the Father-God's craving
for fellowship)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적 능력(mental
capacities)은 그의 생각(mind)이 그의 창조주의 생각(mind)과 교제(fellowship)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람의 육체적 상태>: Man's Physical Condition: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끝없는 인간 생명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필멸도 불멸도 아니었습니다(His
body was not mortal nor immortal). 필멸이라는 단어는 "죽음의 운명에 처한" 또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영원한 인간의 몸(eternal human body)을 가진,
하나님의 클래스 안에서 영원한 영 존재(eternal spirit being in God's class)였습니다. 아담의 몸은
완전했고 하나님의 밑에 있는 통치자의 성전이 되기에 적합했습니다. 사람의 지배(dominion), 권세(authority), 책임(responsibility): 창세기 1:28. 감각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 마인드를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heart)에 차지한 엄청난 위치를 간과했습니다(사람은 하나님께 놀라운 영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감각으로
자신을 판단함으로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임: 그래서, 불행한 결과를 만듬).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람에게 그 아버지가 창조하셨던 작품들 (works)에 대한 지배권을 주신 것은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창조에 의해서,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ABILITY)을 가졌습니다. 시편 8:3-9은 아버지-하나님이 그 첫 사람으로 하여금 되기를 원하셨고 살기를 원하셨던 것과 같은 사람의
창조에 관한 계시입니다. 시편 8:5, "그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킹제임스 성경은 "천사들"로 되어 있지만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어는
"엘로힘 (Elohim)"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1장 1절에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 히브리인들의
생각은
"하나님보다 한 그늘 아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가능한 한 아버지 하나님과 거의 같게(nearly like)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반자(companion)이자 바로 밑의 지배자(under-ruler)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의 다스림(DOMINION)은 최고의 별과 행성까지 이르렀습니다. 그의 다스림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주의 다스림을 취하실 때의 다스림만큼이나 광범위했습니다. 히브리서 2:5-8은 아담의 통치권(DOMINION)에 대한 계시입니다. 히브리서 2:8(마지막 절)은 사람이 더 이상 그 통치권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계시합니다(미국 표준역). 히브리서 2장 9절은 인간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잃어버린 통치권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스렸던 방법에 대해 하나의 제안을 제공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능력(Power)의 말씀에 의해 만물을 붙드십니다. 아담은 그의 말에 의해 창조물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음성은 피조물에 대한 그것(그의 음성)의 지배권에 있어서 마치 그의 창조주의 음성과 같았습니다. 아담은 창조물에 대한 완전한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배권을 다른 존재(being)에게 부여할 수 있는 법적 권리(legal
right)를 그의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다음 수업에서 우리는 그가 바로 이 일을 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그가 타락함으로써 사탄에게 그의 권세를 넘겨주었다는
것을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라는 말임).
<사람의 책임>: Man's
Responsibility
아담의 책임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 가족(human
family)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heart-joy)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가족을 한 번에 존재하도록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8. 그분은 인간 가족을 세상에 데려오는 일에서 아담(Adam)과 하와(Eve)를 동역자(fellow-workers)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번식시키거나(reproduce)
자녀들을 낳을(beget) 수 있는 능력(ability)을 주셨습니다. 이 자녀들은
주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 한 단어에 의해서 인류(human race)를 창조하는 대신에 아버지 하나님은 한
남자와 여자(one man and woman)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내 자녀들을 낳고, 양육하고,
교육하고, 그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돌보고, 내 갈망에 응답하게 하는 것을 허락한다 " (I permit you to give birth to My
children, to rear, educate, and care for them, teaching them to love Me, and to
respond to My yearning). 그러므로 사람의
진짜 일(real
business)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영원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 있는 하나의 책임을 부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시는 한 (계속) 살 자녀들, 즉,
영원한 인격체들(personalities)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인류의 창조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아주 분명한 이유는 당신의 마인드(mind)의 새롭게 함(renewal)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거듭났던 시점까지 우리는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의 영역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의) 영역의 속박(bondage) 밖으로 인류를 위한 조건(구원의 조건?)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모두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의 창조에 익숙해졌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세상 마인드를 통해서만 그것을 압니다(세상적 마인드로 그 말씀을 알기 때문에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 창조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우주의 존재에 대한 이유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람은 하나의 사소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의 영(spirits)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갈망과,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지고 자신의 형상대로
한 사람(a man)을 창조하신 그분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이나 친근함을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 즉, 경찰관 유형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창조를, 불쌍한 실패, 빈곤하고
연약한 흙 벌레의 창조로 보았습니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우리는 사탄의 궤계에 속아 그렇게 잘 못 보았다는 말임). 고린도전서 15:45-49(American Standard Version)은 아담 안에서의 창조(the creation in Adam)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영적 창조(the
new spiritual creation in Christ)라는 두 가지 창조에 대해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또 창조물에 대한
그의 권세(authority)를 잃어버리면서 영적 죽음의 입구에서 손상되어 버린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적 사망이 파괴되고 사람이 마치 아담이 죄를 지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영적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봅니다. 당신이 첫 번째 창조에 대한 장소와 이유를 알면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the Father-heart of God)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창조에 대한 낮은 인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에 대한 낮은 인식을 주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a)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사람입니까? (b) 각각에 대해 성경구절을 제공하십시오.
3. 자연인이 영적인 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 살아야 했습니까?
5. 하나님은 사람에게 왜 의지(will)를 주셨습니까?
6. 어떤 사건이 아담이 가졌던 마인드의 유형을 알려 줍니까?
7. 아담은 어떤 종류의 몸을 가졌었습니까?
8. 어떤 성경구절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권세를 계시합니까? 그의 권세는 무엇이었습니까?
9. 아담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게 창조되었습니까?
10. 왜 우리는 첫번째 창조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가졌던 그 자리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까?
3과. 사람의 반역과 결과들: MAN'S TREASON AND RESULTS:
이 과정의 첫 번째 부분은 사람의 창조(the creation of man)부터 타락(the Fall)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창세기의 장들을 다루었습니다. 과거에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장들은 생명이 없고 재미없는 과거 역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꼭 필요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부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에 비추어 그것들을 연구할 때, 그것들은 실제로 우리 앞에 삽니다(생명력이 있다는 말임). 그들 안에는 기쁨, 사랑, 믿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사람 주위를 중심으로 하는 불신과 비극의 드라마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들에서 사람을 위한 사랑의 준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 사람에게 권세와 책임을 줌으로써 사람을 자신의 바로 밑의 통치자로 삼고자 하는 그분의 열망을 봅니다. 이 위대한 창조의 드라마에서 아버지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의 죄에 수반되었던 영적 죽음의 통치 기간 동안, (그 기간 동안 사탄은 사람의 마음: heart 안에서 다스렸슴), 하나님의 지식과 그분의 사랑은 상실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성품이 다시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극을 위한 완벽한 설정입니다.
<사람의 죄의 본질>: The Nature of Man's Sin:
이것은 모든
세대의 신학자들을 도전해왔던 오래된 문제입니다. 사람의 원죄의 본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깨뜨려진 율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그 당시에는) 주어진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육신(the Incarnation)과 갈보리(Calvary)의 고난들(sufferings)을 촉발했던 그것은 어떤 종류의 죄였습니까? 사람이 그처럼 광범위한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동반자가 될 만큼 뛰어난 지성을 소유했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기쁨이나 슬픔을 그의 손 안에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제 우리는 그가 범했던
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반역>: High
Treason:
아담의 죄(SIN)는 대반역의 죄(Crime of
High Treason)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우주를 다스릴 권세(authority)를 주셨습니다. 우주 전체에 걸친 이 지배권(dominion)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유산(heritage)이었습니다:
창세기 1:28과 시편 8:6. 아담은 이 법적인 지배권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Satan)의 손에 넘겼습니다(turned
over).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unpardonable)! 대반역은 모든 세대에서 그렇게 간주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transgression)는 절대적인 지식의 명백한 빛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그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범죄했다는 말임). 그가 사탄에 의해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범죄로 이끌린 단계들을 이해했습니다. 그의 아내 이브는 속아넘어갔지만 아담은 영원의 베네딕트 아놀드(the
Benedict Arnold of Eternity)가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13-14. 그는 하나님을 알았었습니다. 그는 사탄을 알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그 상상할 수 없는 범죄의 결과를 알았었습니다: 창세기 3:1-7. 사탄에 의해 하와가 속은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Eve's deception by Satan was due to her unbelief in God's Word). 사탄은 뱀을 통해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에 의문을 제기한 다음 공개적으로
그것을 반박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뱀이 원래 사람처럼 똑바로 움직였고, 보기에 아름다웠으며 아마도 언어 기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자연주의자들(naturalists)은 이것을 확인합니다.
<아담의 반역은 그리스도에 의해 인식되었다>: Adam's Treason Recognized by Christ:
우리는 구속(Redemption)의 계획의 가장 흥미로운 특징들 중 하나: ‘창조물(creation: 피조물)에 대한 사탄의 지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이 권세를 얻었는지 보아왔습니다. 이제 그것에 관한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perfect
justice)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사탄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He
did not take advantage over Satan). 아담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그 권세(authority)를 법적으로 사탄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완전히 공의롭지(perfectly just) 않으셨다면 그분은 사탄을 쫓아내고
사람을 벌하셨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분의
은혜는 완전한 공의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인류의 구속을 위한 공급을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세례를 받으신 직후, 마귀에 의해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렸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4:6-7. 시험 중에 마귀는 그분을 위로 이끌어 한 순간에 사람이 거주하는 땅의 모든 왕국들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마귀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네게 주리니 왜냐하면,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니 내가 누구에게든지 원하는 자에게
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 앞에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은 네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사탄이 예수님께 와서 사람이 거주하는 땅의
권세와 영광이 그에게 넘겨졌다는 것과 그가 그것을 그가 뜻하는 누구든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만일, 마귀가 예수님께 거짓말을 했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다면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을 것입니다(사탄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임). 만일 마귀가 예수님께 거짓말을 했고,
예수님께서 그가 거짓말한 것을 아셨다면 그것은 진정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참되다는 것과 이것이 참된 시험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인류의
왕국들에 대한 권세와 통치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양도할 수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사탄은 "그것이 나에게 넘겨졌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권세(authority)가
하나님에 의해 사탄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버지-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그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결코 그의 적에게 부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이 쓰라린 증오(hatred) 때문에 그 동산에서 사람을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버지-하나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기에, 이 연합(Union)을 분리시키고 인류를 자신에게 종노릇(bondage)하게 해서 멸망(destruction)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가장 큰 고통(suffering)을 야기시킬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악의적인 성격의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에게로 다시 데려오실 때까지 그를 위해 자신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실 거라는 사실을 예견할 수 없었습니다. 갈보리의 고난들(육체적, 영적)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 대해 사랑에 의한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
사탄을 정복했고 승리했습니다.
<사람의 죄의 결과, 죽음의 진입>: The Result of Man's Sin, the Entrance of
Death: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대반역죄는 인류의 삶 안으로 영적 죽음의 입구를 가져왔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사람의
영안으로 진입을 기다리는 영적 죽음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의 죄는 그의 영을 이 무시무시한 (죽음의) 성품의 입구로 열어 던지는 그 도어(문)입니다. 사람의 타락에 관한 우리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육체적인 죽음의 진입(entrance)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 강의에서 진짜 사람(THE REAL MAN)은 영(the spirit)이고 그가 영 존재(a Spirit Being)인 하나님과 교제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이 사람의 영 속으로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이 영 존재(spirt being)가 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비 존재(non-existence)의 상태가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상태로 존재하고, 사탄과 연합되어 존재하는
상태입니다(it is a state of existence in a condition
separated and alienated from God, and in union with Satan). 성경에 언급된 세가지 종류의 죽음: 육체적 죽음, 영적인 죽음, 두번째 죽음(the
Second Death)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Physical Death)은 폭력적(violent)이고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일로서 사람의 영(spirit)과 혼(soul)이 그의 몸(body)으로부터 분리(separation)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죽음은
인류에게 더욱 폭력적이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에베소서 4:18: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 요한계시록 20:11-15, 둘째 사망(두번째 죽음)은 하나님의 성품이 더 이상 인간에게 접근할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의 상태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의 성품입니다>: Spiritual Death Is a Nature:
영적인 죽음은
실제로 하나의 성품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능력은 영적입니다(spiritual). 하나님은 영(SPIRIT: 킹제임스성경: A SPIRIT)이십니다(요 4:24). 사탄은 하나의 영이고(엡 6:12), 사람도
하나의 영입니다(살전 5:23). 더 높은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물인 사람은, 그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그보다 더 높은 능력(Power)에 의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탄의 성품 중에서 하나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의 성품은 생명입니다(요 5:26). 사탄 또한 영이고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사탄의 성품)은 죽음입니다(에베소서 2:1-5). 사람의 영을 사로잡은 것은 사탄의 성품인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을 여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단어, "생명(Life)"과 "죽음(Death)" 입니다. 우리가 이 두 단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관한 일관된 인식과 사람에 대한 그분의 계시인
성경에 관한 일관된 인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타락(The Fall)시에 들어왔던 원초적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Adam에게는 선택이 주어졌었습니다: 창세기 2:9, 16-17. 그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는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시켰을 것입니다.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사람을 사탄과 연합시켰습니다.
<이중의 죽음>: A
Two-Fold Death:
사람에게 우주에
대한 권세(authority)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불순종했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문자적 번역은 "죽음으로
너는 죽을 것이다" (In dying thou shalt die) 입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죽음을 계시합니다. 아담이 대반역죄를 범했던 순간 그는 영적으로는 죽었지만 육적으로는 930년 이후 동안 죽지 않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 그 땅(the earth)에 먼저 왔습니다. 그것(영적인 죽음)은 그것(영)을 파괴함으로써 육체적인 것 안에 스스로를 나타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그것의 부모인 영적인 죽음의 나타남일 뿐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후에 그의 몸은 필멸의(mortal)
몸이 되었고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그의 영적 죽음에서 아담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사람의 부모요 하나님의 창조의 머리인 아담은 영적으로 죽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의 관리자로서 그의 책임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가 낳을 사람은 같은 성품을 가질 것입니다. 그 영적인 죽음은 그 세상 안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성품이 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죽음(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이르렀다 고 선언합니다 (Romans 5:12 declares that Death passed upon
all mankind). 로마서 5장 17-19절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5,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하나님의 꿈은
(아직)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류(Humanity)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의 본질>: The Nature of Spiritual Death
우리는 영적
죽음이 생명(life)만큼이나 실체(a substance), 힘(a force), 사실(a fact)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차이점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동안 영적인 죽음은 마귀로부터 나옵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에 서 있던 영들 중 하나로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을 때 그의 성품은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믿음(Faith)과 의심(Doubt),
선과 악 등 서로 상반되는 일을 하는 영적 힘들(forces: 세력들)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상충하는
힘들은 같은 근원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에서 최고입니다. 사악하고 나쁘고 타락한 모든 것이 사탄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죽음의 최고(최악)가 됩니다. 우리는 사탄의
성품에서 증오, 정욕, 살인,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정하고 악한 세력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성품인
영적 죽음이 사람의 영 안에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면 인류의 상태(the condition)와 문제(problem)에 대한 우리 마인드(mind)에 전혀 이해가 없습니다. 영적인 죽음이 아담의 삶에 들어왔을 때 그의 영이 완전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은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실제로 (죄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탄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12, 요한복음 5:24, 요한일서 3:14-15, 에베소서 2:1-5을 읽으십시오. 이 무시무시한 괴물인 영적 죽음이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sovereignty)과 지배권(dominion)과 주권(lordship)을
잡았습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왕노릇하였은즉." 죽음은 하나의 인격(personality)을 취했습니다. 아담의 대반역 행위에 의해서 죽음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탄의 통치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사탄이 영적 사망의 영역의 지배권인 그 권세를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7절을 직역하면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사탄)이 그 한 사람을 이용하여 주권(통치권)을 차지하였으면" 입니다. 같은 번역판 로마서 5장 21절은, "죄가 사망의
영역에서 왕 노릇 하였느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진술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사탄의 성품)이 주권을 잡았고 하나님의
피조물(creation)이 그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아담의 죄의 본질(성품)은 무엇이었습니까?
2. 아담은 속았습니까? 성경구절을 주십시오.
3. 피조물에 대한 사탄의 권세를 드러내는 신약의 사건을 말하고 설명하십시오.
4. 사탄은 왜 사람의 삶 속에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기를 원했습니까?
5. 로마서 5:12을 설명하십시오.
6. 영적인 사망은 무엇입니까?
7. 아담의 "이중적인 죽음"이란 무엇이었습니까?
8. 세 가지 주요 영적인 존재들은 무엇입니까?
9. 모든 인류에게 영적 죽음이 닥쳤다는 것을 계시하는 몇 가지 성경구절들을 제시하십시오.
10. 하나님의 성품의 열매들과 사탄의 성품의 열매들을 서로 대조해 보십시오.
4과. 영적인
죽음의 통치: THE
REIGN OF SPIRITUAL DEATH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 속으로 영적 사망의 진입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해 (그것의 왕다운 힘에 있어서) 죄의 통치(or 지배력)와 지속성을 설명합니다(This explains the dominance and persistence of sin in its kingly sway over humanity). 사람은 사탄의 성품, 즉, 영적 죽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왔습니다. 영적 죽음의 통치는 사탄 안에서 머리를 듭니다(head). 에베소서 2장 1-5절은 사람의 영적인 죽음, 진노의 자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된 사탄에 의해 명령을 받은 그의 상태를 계시합니다. 인간의 성품과 의지가 죄와 교제하지 않는 한, 지능적으로 조직된 죄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사람이 죄와 교제하기 때문에 죄에 반응하는 것임을 말함).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게 하셨었습니다. 그분의 뜻은 사람이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뜻: 하나님의 뜻, 사탄의 뜻, 사람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의 영적인 삶을 위해 하나님이나 사탄에게 의존하듯이 그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나 사탄의 뜻과 조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신약성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한 사람이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는 둘 중 하나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나 사탄을 섬길 것입니다. 그 동산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의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 뜻을 구하다가 그 뜻이 사탄의 뜻에 예속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사람의 삶에서 영적 죽음의 지배를 연구하고 또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필요에 대한 유일한 답을 찾기 위해 돌아섭니다.
<영적 사망의 통치가 시작되다>: The Reign of Spiritual Death Begins
아담의 뜻에
대한 사탄의 뜻의 지배는 아담이 그의 음성에 순종했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참으로 끔찍한 각성입니다. 사탄의 성품이 그의 영 안으로 숨을 불어넣었습니다: 에베소서 2:4. 그는 이제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창세기 3:8-13.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깨졌습니다(Their fellowship has been broken). 사람은 새로운 주인인 사탄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창세기 3:22,
24. 그는 하나님께 접근할 법적 근거가 없이 동산에서 버림받은 무법자입니다. 창세기 3:24, “이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꽃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서 이 행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탄의 성품이 한 개인 안에서 연합된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범죄였을
것이므로 아담은 지금 그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결합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존재가 생겼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구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충분합니다: 창세기 4:8. 영적인 죽음은 이제 아담에게 끔찍한 현실이 됩니다. 그의 첫째 아들은 그의 둘째 아들을 살해하고 나중에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의 두가지
특성은 사람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담은 그의 반역의 결과를 예리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류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He
has not only sinned against God, but also against the human race yet unborn) : 창세기 4:26. 작은 손자가 가족 안으로 태어나고 Adam은 그를 "Enosh"라고 명명합니다. "에노스"는 필멸의, 연약한, 죽음의 운명에 처한,
또는 사탄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쓰라린 후회를 기억하면서 첫 번째 손자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창세기 3:17-19. 해가 뜰 때마다
완벽한 아름다움이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들을 도처에 나타난 황폐로 끌어 올립니다. 벌레, 찔레, 가시가 많이
있습니다. 영적 죽음의
철의 의지는 짐승 왕국의 본질에 증오를 불어넣었습니다. 아담의 눈 앞에는 동물과 곤충의 시체가 햇볕에 썩어가는 동안 그의 귀에는 악의와
고통의 불협화음의 울음들이 옵니다. 아담 자신은 사탄의 철의 의지에 굴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품이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He finds that his nature is no longer in
fellowship with God). 그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의 안식과 기쁨과 평강은 사라졌습니다.
<영적 죽음과 이성의 탄생>: Spiritual Death and the Birth of Reason:
영적 죽음으로 인해 사람은 영의 영역에서 더 이상 걷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은 창조주와 함께 영계에서 걸었습니다. 그의 영이 지배하고 다스렸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존재(being)와 실체(substance)가 되도록 말을 하는 전능한 힘의 영역인 믿음의 영역이었었습니다(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했을 때 실상이 되었슴). 로마서 4:17: 그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셨던 분의 영역이었습니다. 아담은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없는 것들로부터 세상을 지으셨 분의 바로 밑의 통치자로서 행했었습니다(히 11:3).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끊어졌으니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절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의 영역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영역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자원에 의존합니다. 인간의 자원은 정신(마인드)과 육체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인드는 인간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의 오감이 그의 마인드의 문과 창이 됩니다. 사람은 이러한 감각을 통해 세계와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형성합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합니다. 감각은 재료를 마인드(mind)로 가져오고 이성은 감각 재료에서 자체 결론을 내립니다. 믿음은 죽었고, 초자연적인 것은 사라지고, 이성(reason)이 태어납니다. 로마서 8:1-11은 육신의 감각에 따라 행하고 생활하는 자연인에 대해 설명합니다.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의 생각(the mind of flesh)은 감각(sensation)의 물질(material)에서 만들어진 추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생각은 육체적인 감각(senses)으로부터 받습니다. 즉, 사람의 감각의 산물인 이성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믿음, 또는 인간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에 대해 항상 적대적이었습니다(이성은 불완전해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말임). 문명은 오감을 즐겁게 하는 예술의 발이 됩니다. 인간의 목표가 아무리 높아도 감각의 차원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영(spirit)으로 행하는 것은 잃어버려졌습니다. 영의 부르짖음은 연전히 여전히 응답되지 않습니다(이유: 영이 아니라 이성을 따라 행동하기 때문임). 인간 역사의 새벽에는(즉, 인간의 타락 직후에는) 이성이 우위를 차지합니다.
<영적 죽음과 문명>: Spiritual Death and Civilization:
인류의 역사는
요한일서 5:19의 계시였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죄는 인간이 잔인한 사탄 황제 아래 사는 영적 죽음의 영역에서 왕으로 통치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죄의 권세를 근절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교육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는 모든 문명의 흥망성쇠는 도덕성의 쇠퇴를 동반했다고 고백합니다. 전쟁은 인류의
젊음과 힘을 파괴하면서 모든 국가의 삶의 모든 기간을 지배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의 잔인함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사탄의 통치의 표현일 뿐입니다. 인간은 죄와 질병과 죽음의 뿌리와 원인을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질병의 법칙이 인간의 몸에
달라붙어 인류를 병들게 하고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직면한 최고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에서 태어난 모든 행복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사탄의 품에 안긴
인간은 소망 없는 죽음과 파멸로 끝나는 이 헛된 투쟁에 대해 고통스럽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끔찍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창조물은 아름다움과 조화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성 있는 창조주의 표시와 디자인이 아직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탄생과 절망적인 죽음 사이의 짧은 수명에 대해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사람의 짧은 수명은 비정상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말임).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사람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임). 그는 자신이나 창조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의 영은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이유는 그의 창조주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합니다.
인간의 삶을 관조하면서 한 과학자는 시대적 정서를 표현하면서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자매는 그분보다 더 친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아비 사탄에게 눈이 먼 사람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최고 통치권을 장악했던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탄의 본성인 영적
사망은 죄와 질병과 육체적 사망과 하나님의 사람의 삶을 어둡게 해왔던 모든 슬픔을 자라게 했던 토양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를 짓고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고 육체적 죽음을 당하는 이유는 사탄으로 인한 영적 사망 때문이라는 말임)
<사람의 영생의 필요성!!!!>: Man's Need of Eternal Life
에베소서 4:17-18은 영적 사망이 아담의 삶 안으로 들어온 결과로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5:12도 참조하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는 마인드(mind)의 허망함 속에서 이성의 영역에서 걷고 있으며, 그 마인드(mind: 생각: 정신)는 내재하는 영적 사망으로 인해 어두워지고 눈이 멀었습니다(고후 4:4). 사람은 그 자신의 노력들에 의해서 그의 상태로부터 그 스스로를 구속하는 데 완전히 속수무책입니다(Man is utterly helpless to redeem himself by his own efforts from his condition). 아담이 그 자신과 그의 권세를 사탄의 지배(정복)하에 가져오며 사탄에게 복종한 후에, 그는 그 상태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어떤 권세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After Adam had obeyed Satan, bringing himself and his authority under Satanic subjection, he had no authority to free himself from that condition). 인간의 노력들이 관계되었던 일에 관한 한, 한 사람이 인류의 운명을 봉인했습니다(고전 15:22: As far as human efforts were concerned, one man had sealed the fate of the human race: 아담의 타락 사건은 모든 인류의 운명을 결정했던 가장 비참한 사건이라는 말임). 어떤 사람도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No man could ever redeem humanity, for every man would be under Satanic dominion). 사람이 구속되려면 사탄보다 더 큰 누군가가 사람을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셔야 합니다. 이 구속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모든 사람의 죄(the sin of Adam and of all men)를 용서하셔야만 할지라도, (죄의 용서만 가지고서는) 사람의 구속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man's Redemption would not be touched). 사람의 생명(life)에 대한 죄의 능력(power)과 권세(authority)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였습니다. 히브리서 10:11. 모든 대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섬기며 이스라엘의 죄들을 위하여 같은 제사들을 반복하여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들는 결코 그들의 죄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었었고, 그 상태의 결과였던 죄들을 위해 계속적인 용서를 필요로 했습니다(God's Covenant people were still spiritually dead, and needed continual forgiveness for sins which were the outgrowth of that condition).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하나님의 마인드(mind)에는 이스라엘의 영적 죽음의 상태에 관한 지속적인 기억이 있었습니다(There was continual remembrance in the mind of God of Israel's condition of spiritual death). 죄들의 용서만으로는 사람과 그의 영적 아버지인 사탄 사이에 존재했던 그 관계를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Forgiveness of sins alone would not break the relationship that existed between man and his spiritual father, Satan).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거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그분의 거처를 만드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속은 용서보다 더 많은 것이어야만 합니다(Redemption must be more than forgiveness). 구속은 사람에게 새 본성, 새 생명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Redemption must be the giving of a New Nature, a New Life to man). 구속은 사람의 영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했습니다(Redemption meant a New Creation in the spirit of man). 사람의 필요는 그의 영 안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Man's need can only be met by his receiving the Nature of God within his spirit). 첫째, 영적 사망이 사람의 생명안에서 절대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합니다(First, spiritual death must be absolutely destroyed in the life of man). 사탄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하고 그 결과 그는 영적으로 결코 죽지 않았던 것처럼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설 수 있습니다(The nature of Satan must be completely eradicated from man's nature, so that he can stand as free from Satanic authority as though he had never died spiritually). 로마서 6:6. 죄의 몸, 즉, 영적 사망은 제거되어야만 합니다(The body of sin, spiritual death, must be done away). 골로새서 1:13. 사람은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되어야만 합니다(Man must be delivered from the authority of Satan). 히브리서 2:14. 사망의 영역에서 다스리는 사탄은 사람의 주인으로서 그의 위치로부터 물러나야만 합니다(Satan, who reigns in the realm of death, must be dethroned from his position as Lord of man). 히브리서 2:15. 사람은 자신을 속박했던 옛 주인의 두려움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4.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기 때문에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동안에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생명이지만, 하나님은 먼저 사람이 사탄의 본성에서 해방되는 것을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하실 때까지 사람에게 그분 자신의 본성을 나누어 주실 수 없습니다(해석 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개혁이나 교육이 죄의 뿌리인 영적 사망을 타격하지(strike) 못함을 압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사탄의 본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녀인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요 3:7). 이것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과 요한일서 5:1을 읽으십시오. 사람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생명은 그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킬 것입니다(로마서 8:2). 요한일서 2:6. 하나님의 본성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걸으셨던 것처럼 아버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지만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절대적으로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22 및 요한복음 5:30 참조. 이것은 그가 영적 사망의 영역에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영 안에 있는 영생은 그를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 만듭니다(롬 8:17).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의 걸음(His earth-walk)에서 섰던 것처럼 아버지 앞에 서고, 그리스도께서 가졌던 것처럼 사탄의 지배로부터 동일한 자유를 가지고 있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4-18; 요한복음 17:22-23 및 고린도전서 1:30을 읽으십시오. 영생(Eternal Life)은 질병의 법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벧전 2:24). 로마서 8장 11절은 부활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mortal"이라는 단어는 "death doomed"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mortal(죽을 수 밖에는)"이라는 단어는 죽은 후의 우리 몸의 상태를 가리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의 운명에 있지 않고 죽음으로 멸망되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불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몸들(these mortal bodies) 안에 거하는 영생(Eternal Life)이 이제 그들에게 생명과 치유를 줄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을 받고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Man's receiving of Eternal Life will make it possible for him to receive the spirit of God and for God to dwell in him). 고린도후서 6장 16절과 에베소서 3장 14-21절을 읽으십시오. 이것은 사람을 다시 하나님의 능력(ability)의 영역, 모든 것이 가능한 영역 안으로 다시 가져옵니다(마태복음 17:20).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그의 영의 영역(the realm of his spirit), 즉, 믿음의 영역(the faith-realm)에서 다시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눅 4:4: Man will be able to walk again in the realm of his spirit -the faith-realm-where he lives by the Word of God). 영생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고, 교제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의 외침을 충족시킬 것입니다(Eternal Life will meet the need of man, and the heart cry of the Father for fellowship). 그러나 영원한 생명(영생)이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기 전에 그는 의롭다고 선언되어야만 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탄의 가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족으로 데려갈 수 있는 하나의 법적 권리를 가져야만 합니다(but before Eternal Life can be given to man, he must be declared righteous, and God must have a legal right to take man from the family of Satan into His family).
<질문>: Questions
1. 세상에 존재하는 그 세 가지 뜻(the three wills)을 말해 보십시오.
2. 마태복음 6:24을 설명하십시오.
3.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어떤 사건이 아담의 자손들 안에 영적 사망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까?
5. 왜 이성이 믿음에 대해 우월성을 얻게 되었습니까?
6. 문명은 영적 사망이 사람의 영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7. 죄 사함만으로는 잃어버린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8. 왜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을 위해 일하셔야만 합니까?
9. 영원한 생명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입니까?
10. 로마서 8:11을 설명하십시오. (모든 참조 성구를 찾아
주의 깊게 연구하십시오.)
제5과. 사람의 의의
필요성: MAN'S
NEED OF RIGHTEOUSNESS: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루시는 일과 관련하여 불공평하다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Love)이나 정의(Justice)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이 타락할 것을 알았었던 사실 앞에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 사람을 지옥에, 다른 사람을 천국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권리(right)에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이 해묵은 비난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의 선한 남자와 선한 여자가 한 아이를 낳을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아버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권리를 가졌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에 관해 주인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는 사탄에게 굴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고리"가 아니라 완전한(perfect) 지식의 충만한(full) 빛 가운데 서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기쁨과 평화(joy and peace)를 위해 창조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 병, 슬픔 또는 죽음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 안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재의 사회와 세계의 상태들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These present conditions of society and the world are not normal). 하나님은 그 자신을 입증하셨고 인류 앞에 무죄로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이런 상태에 남겨놓지 않으셨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구속을 제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필요에 답할 것입니다 (God has vindicated Himself and stands acquitted before the human race because He did not leave man in this condition, but provided a Redemption which man could enjoy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hat would answer man's every need).
<삼중의 문제>: A
Three-Fold Problem:
사람의 필요는 그가 영생(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성품을 받음으로써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Man's need can only be met by his receiving Eternal Life, the Nature of God). 그러나 하나님은 법적인 근거위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을 때까지, 사람에게 자신의 본성을 나누어 주실 수 없으며 그에게 자녀됨의 특권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the Father-God)께서 사람 자신의 행위와는 별개로 사람의 구속을 수행하실 때 그분이 직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사람에게 의(righteousness)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법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로마서는 3장 26절에서 이러한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American Standard Version의 각주에는 "이는 그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의 의가 되려 하심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은 의(righteousness)가 주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 즉, 사탄의 자식을 의롭다고 선언할 만한 법적인 권리를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의 의의 필요성(Man's need of righteousness)은 세 가지 문제를 포함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취급하시는 일에 있어서 의로우셔야만 합니다. 사람의 범죄는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그 형벌은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탄을 향하여 절대적인 공의를 근거로 행동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법적인 토대위에서 인간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속해야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람과 사탄에게 공의로우셔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의에 따라 그분의 행위도 공의로우셔야만 합니다. 의는 그분의 보좌의 기초이며 그 표준은 낮추어져서는 안됩니다(하나님의 구속은 공의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말임). 하나님께서 인류를 공의롭게 심판하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죄 대속물을 거부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 죄의 형벌을 지불하도록 강요하실 수 있는 법적 근거들이 있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은혜로 마련하신 죄의 대속을 거부하는 자는 법에 따라 그 스스로가 죄의 형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말임: 그래서 그 구속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됨).
<사람의 죄의 형벌>: The Penalty of Man's Sin
정의(Justice: or 공의)가 사람이 그의 죄의 형벌을 지불하는 그의 요구를 만들었을 때, 사람은 그 이자조차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저질렀던 범죄(crime)에 대한 경감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sin)인, 대반역(High Treason)이었습니다. 사람의 죄의 형벌(penalty)은 지옥(hell)이었습니다! 사람의 죄의 본질(nature: 성품)을 알면 우리는 지옥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원합니다. 천사는 영원합니다. 사람들과 천사들이 범죄자(criminals)가 되면 그들은 영원한 범죄자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의 영(spirit)이고 사람에게는 영원한 영의 집(home)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죄인이 되었을 때, 죽음 후에 그 백보좌 심판(the White Throne Judgment)을 기다리기 위해 감옥(jail)에 가두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심판 후, 그가 형을 선고받는 시점에 그는 연방 감옥(the federal prison)에 수감되어야 합니다. 지옥(hell)은 사람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마태복음 25:41).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지구는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사람은 영원한 인간의 몸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짓고 죽을 운명에 처하게(mortal) 되었을 때 지옥이 그를 가두기에 적합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영원한 속박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감옥(prison)이 있어야 합니다. 범죄자는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영원을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도록 허용된다면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인간의 법을 어긴 범죄자를 위한 감옥, 주 교도소, 연방 교도소가 있고 상습범을 위한 종신형이 있습니다. 천국의 법을 어긴 자들, 영원한 범죄자들을 가두는 감옥이 하나님께 있다면 누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보편적인 인간은 사후 처벌을 위해 일종의 지옥이나 감금 장소를 믿으며, 이 증언은 법정 밖에서 쉽게 배제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인간 의식의 증언만큼 배심원과 판사에게 설득력 있는 증언은 없습니다.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God's Justice Toward Satan:
인간에게 의를
회복시키실 때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의 대반역죄는 사탄에게 피조물을 통치할 법적 권리를
주었고, 인간을 그의 법적 신하(subject)이자 노예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성에서 사탄보다 강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정당하게 다루어지는 방식으로 사탄에게서
권세를 빼앗아야만 합니다(God, in His omnipotence, is stronger than Satan, but He must strip
him of his authority in such a way that he is dealt with justly). 제정될 계획은 의심할 여지없이 법적 토대들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 God's Justice Toward Man:
공의를 근거로
사람을 다루실 때, 하나님은 범법을 인식하시고 그 형벌이 지불되는 것을 보셔야만 합니다. 사람의 구속은 합법적이어야
하므로 구속받은 사람이 그의 법적 근거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알고 자기 존중(self-respect)을 유지하도록
허용되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사탄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범죄(transgression)의 결과로서
그는 지옥에 감금되어야만 합니다. 누군가는 그곳으로 가서 죄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 결과, 사람이
영생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마치 그가 죄를 전혀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구속은 사람을 지옥에 가는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사탄과 연합을 유지한다면
그때 그는 그러한 자(사탄)의 운명을 함께 나누어야만 합니다.
<구속이 포함해야만 하는 것>: What the Redemption Must Include:
아담의 범법(transgression)에 대한 형벌은 적절하게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사람이 사탄의 지배에서 구원될 수 있습니다. 방어와 공격의 무기(a weapon of defense and offense)도 사람의 손 안에 쥐어져야만 합니다. 사람은, 그가 사탄을 만나 그와 영예로운 전쟁에서 그를 정복할 수 있는 권세(authority)가 주어져야만 합니다. 사람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과 불멸이 승인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처음에 완전한 인간의 몸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제 죽음이 지배하거나 권세를 가질 수 없는 불멸의 몸이 주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구는 에덴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회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시는 사탄의 지배가 있을 수 없는 그런 토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구속은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생명 또는 본성(God's Life or Nature)을 받는 것,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 완전한 교제의 화목(perfect reconciliation of fellowship)을 포함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함께 편안하게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안에서는 물론 그의 마음 안에 아들의 자리를 그에게 주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의(righteousness)와 아들의 특권(Sonship privileges)과 가장 완전한 교제(fullest fellowship)가 사람의 영원한 권리들(rights)이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큰 축복들을 주지 못하는 어떤 구속도 사람의 필요를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구속자를 마련하셔야 합니다>: God, Himself, Must Provide a Redeemer:
사람에게 의를 회복시킬 사람을 위한 구속(redemption)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인류를 대신하여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세대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를 지배하고 그를 지옥(Hell)에 던져 넣을 권세를 가진 원수(마귀)의 손 안에서 깨졌고(broken) 무기력한(helpless)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인류는 기소(indictment: 정죄 받게 될 상태에 놓여 있는 것) 아래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속자의 요구 사항>: The Requirements of the Redeemer:
이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연적인 세대에서 태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사탄의 신하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잉태되셔야 합니다. 그는 영의 본성 안에 영적인 죽음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첫 아담이 섰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 . 그 동일한 주권(dominion)과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의 (righteousness)로. 그분은 아버지를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이 땅 위를 걸어야 합니다.
첫 남자와 여자가 사탄을 만났던 것처럼 시험(temptation) 안에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뜻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 때 이 사람은 사람의 대속물(substitute)로서 행동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죄, 영적 사망 자체가 이 사람 위에 짊어지워져야만(laid upon) 합니다. 그 다음 사탄의 심판(the judgment of Satan)이 그 위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그는 공의의 요구들(the demands of Justice)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는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그는 정의의 모든 법적 요구 사항이 인류를 상대로 완전히 충족될 때까지 심판 아래에서
그곳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인간과 처음부터 피의 언약을 믿었던 모든
인간을 법적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해석 주의). 이 구속자는 그의 지상의 걸음에서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사탄보다
더 큰 존재여야 합니다. . . 형벌이 지불된 후에 사탄을 정복할 수 있게 될 분은 사람에 대한 그의 주권과 법적 지배권(his lordship and legal
dominion)을 그에게서 빼앗을 것입니다. 그분은, 부서지고 속박된 인간에게 생명과 불멸을 가져오면서 죽음을 정복해야만 합니다. 어떤 천사도 사람의 구속자로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공의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과의 연합과 사탄에게 복종한 것(subjection)
때문에 한 구속주(Redeemer)를 위한 공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탄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한 개인 안에서 연합되어야(united)
합니다. 성육신(the Incarnation)은 인간의 의(righteousness)의 필요성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만이, 사람의 형벌을 지불하고 사탄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가지고 한 사람으로서
의(righteousness) 안에서 행할, 한 구속자를 제공할 것입니다. 하나님(Deity)은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넘어질 것을 알고 계셨던 사실 앞에서 사람을 창조하셨었습니다. 그러한 창조의 책임은 아버지 하나님(the
Father-God)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의 구속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인류에게 의(righteousness)가 주어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성육신입니다(The
only way for humanity to be given Righteousness is the Incarnation of God's own
Son).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God's beloved Son)은 그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Glory)과 위엄(Majesty)을 버리고 그 아버지의 품(bosom)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분은 스스로 한 사람의 육체적인 몸을 입고 땅(earth:
지구)에 오셔야만 합니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이 땅을 걸으심에 있어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사탄을 정복하시며 한 아들로서 행하셔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본성, 그 끔찍하고 기괴한 것, 영적 죽음을 취하여 그것을 그분의
거룩하고 영원하신 아들의 영 위에 두셔야만 합니다(Then God must take man's sin-nature, that
hideous, monstrous thing, spiritual death, and lay it upon the spirit of His
Holy Eternal Son). 그 아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하며 영원한 공의의 진노(wrath)와 분노(indignation)가 그를 향하여 내려져야만 합니다. 그분이 사람을 위해 형벌을 지불하셨을 때 그분은 의롭게 되실 것이며 그 의가 사람의 것이 될 것입니다(When
He has paid the penalty for man, He shall be made righteous, and that
righteousness will become man's). 심판이 왔던 것은 한 사람(아담)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는 한 사람(예수님)이 법적인 토대들 위에서 그 형벌을 지불할(pay
that penalty)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인류가 만일 그들이 성육신하신
분의 주권 or 주 되심(the Lordship of the Incarnate One)을 고백한다면
죄책(guilt)과 불의(unrighteousness)로부터 자유하다고 선언될 것입니다. 우리 수업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 . 사람의 영생의 필요는 먼저 의를 요구하고, 사람의 의의 필요는 그 성육신을
요구합니다.
<사람의 불의를 드러내는 성경 구절의 연구>: A Study in the Scriptures Covered in the Lesson Scriptures
revealing the unrighteousness of man: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 사람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났으니.” 로마서
3:9-10, "다 죄 아래
있나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5:16-18,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정죄가 이르렀나니." 로마서 5:19,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더라."
<심판이 메인 위에 임했음을 계시하는 성경구절>: Scriptures revealing that judgment rested upon main:
로마서
5:16-18, “한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6:8,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였느니라."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사탄의 심판이
사람의 심판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36,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감금 장소로 지옥을 보여주는 성경>: Scriptures Showing Hell as the Place of Confinement:
시편 9:17,
"악인은 스올로
향하고." 요한계시록 20:13-15 “…만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졌더라.” 베드로후서 2:4, “그러나 저희를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사람이 자신을 구속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성경>: Scriptures showing the inability of man to redeem himself:
에베소서 2:12,
“(그 때에 너희는) ...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느니라.” 이사야
59:15-16,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가 전혀 없음과 사람을 대신할 사람이 전혀 없음을 보시고 자기 팔로 구원과 의를 베푸셨느니라.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미국 표준역 각주). 요한일서 3:10, "사탄의 자식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 에베소서 2:2-3, 사탄을 따라 행함. 골로새서 1:13, 사탄(어둠)의 권세 안에 있는 사람. 히브리서 2:14-15, 사탄은 영적 사망의 권세를 장악하고 있고, 인간은 사탄에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성육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속자로서 공의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켰다고 계시하는 성경 구절>: Scriptures revealing that Christ, the
Incarnate One, did meet the requirements of Justice as man's Redeemer:
그분의 지상
생활에서: 요한복음 8:29, "…나는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들을 행함으로…." 인간의 죄
대속물로서: 고린도후서 5:21; 이사야 53:4-6; 로마서
4:25. 사탄의 정복자로서: 골로새서 2:15;
히브리서 2:14-15; 빌립보서 2:9-10; 요한계시록 1:18.
<질문>: Questions
1. 하나님은 스스로 불의(injustice)의 고발을 어떻게 입증하셨습니까?
2. 인간의 범죄에 대한 형벌은 왜 지옥이었습니까?
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 안에는 무엇이 포함되었습니까?
4.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5. 왜 사람은 아무도 인류를 구속할 수 없었습니까?
6. (a)
구속자가 충족시켜야 할 요구 사항을 말하십시오.
(b) 사람을 대신하여 그분이 무엇이 되셔야만 합니까?
7. 사람의 구속은 무엇을 포함해야만 합니까?
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설명하십시오.
9. 다음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을 제시하십시오: (a) 인간의 불의. (b) 사람에게 임한 심판. (c) 사람이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없는 무능력(inability).
10. 당신은 각 성경구절을 공부했습니까?
6과.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함: MAN'S NEED OF A MEDIATOR:
우리의 지난
두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속을 제공하실 때 직면하신 문제들을 공부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후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두 번째 필요인 의에 근거하지
않고는 그분 자신의 본성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실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세 번째 필요는 중보자, 즉,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누군가(some one) 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대반역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fellowship)를 상실했습니다. 사람은 사탄의 불의 안에 섰습니다(요 16:11). 그는 하나님과의 어떤 지위(standing)도 없었고 그분께 접근할 권리(right)도 없었습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보편적인(universal) 사람은 자신이 창조주 앞에서 설 자리가
없음을 인식했습니다. 모든 나라의 성전, 제단, 사제단은 인간의 죄 의식,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고백합니다.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백만 명의 사제들이, 그들의 영혼이 굶주린 사람들(their soul-hungry people)을 더욱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끄는, 인도(India)는 사람의 하나의 중보자(a Mediator)의 의식적인 필요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그들의 종교인, 힌두교가 중보자를 찾는 것은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들은 실상. 잘못된 중보자를 구함으로써,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슴을 지적하는 것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상태>: Man's Condition Before God:
우리는 이전 수업에서 사람의 죄가 그를 사탄과 연합시켰음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이제 하나님 앞에 정치적으로 사탄의 종속자로서(골로새서 1:13a) 뿐만 아니라 그와 생명의 연합을 맺은 자로서(에베소서 2:2 및 요일 3:10) 서 있습니다. 사람을 사탄과 동일시함으로써 사탄의 심판과 불의가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요 16:11).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엡 4:18). 그의 마인드(mind)와 이해력은 이 세상의 신으로 인해 어두워졌습니다(고후 4:4). 로마서 3:9-18은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에 대해 14가지 기소(charges: 고소)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의 선언은 의인은 없나니(롬 3:10) 하나님을 깨닫고 찾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롬 3:11). 에베소서 2장 12절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언약 요구들(covenant claims)을 전혀 갖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모든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한 사람의 창조에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접근과 교통의 법적 근거를 가지고 의롭게 서 있었습니다. 아담은 그의 반역으로 이것들을 잃어버렸고, 그의 상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했던 아담은 영적 죽음에 들어간 직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8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 서며 동시에 인류를 대표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보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의 상태는 확실히 절망적입니다. 인간의 노력들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사람의 상태는 소망이 없습니다(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와 사망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말임). 그는 기도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오직 은혜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람과의 교제를 사랑하고 갈망하셨기에 즉시 사람을 위해 자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은 접근할 매개체를 주셨습니다(창세기 3:21과 4: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은 성막(tabernacles)과 제사장직(priesthoods)과 제사(offerings)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 외에는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타락으로(the fall)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때까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장 직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권리가 없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희생, 꿈, 환상 또는 천사의 방문에 대해 신령하게 임명된 제사장직을 통하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께 접근할 권리를 갖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의 무능력>: Man's Inability to Approach God:
이스라엘의 삶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기 전에 그리고 그분의 완성된 일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얻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의 면전으로 강제로
들어가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예를 봅니다. 구약성경에는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빛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성한 공의의 행위가 많이 있습니다. 레위기 10:1-3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상태를 알게 하는 데 필요한 교훈 중 하나에 대한 기록된 사건입니다. 참으로 제사장직 헌신의 비참한 종결입니다. 그날 아침 아론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총의 가장
높은 지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세키나(Shekinah: 구름)의 임재가 그것을 영광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여호와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표시한 일련의 신성한 기적이 놓여 있었고 이제 그의 형제와 함께 제사장직의
아론의 아들들이 전체 회중 앞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두 아들은 정오에 회막 근처에서 허세나 호기심으로 서성거리다가 활활 타는 숯불이 든 향로를 들고 그 위에 분향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어기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었고,
그는 일 년에 한 번만 갈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젊은이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집니다. 아론이 죽은 자 앞에서 겁에 질리고 충격을 받고 기절하자 모세는 그에게 외칩니다. “아론아,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해 질 것이고 온 백성 앞에서 내가 영화롭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아론은 잠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초대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민수기 16장에서 승인되지 않은 여호와께 접근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봅니다. 그것은 고라와 그의 반역의 이야기입니다. 고라와 한 무리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며 그들도 여호와께 접근할 권리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대제사장만큼이나 많다고 주장합니다. 모세는 온 회중 앞에서 그 쟁점을 시험합니다. 그는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예배할 준비가
된 향로를 들고 여호와 앞에 나타나도록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오자마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초대받지 않고 하나님께 감히 접근하는 이 악한 사람들의 장막에서 일어나라고 경고했습니다. 모세가 말을 그치자
땅이 입을 벌리고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산 채로 스올에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겁에 질려 현장에서 도망쳤습니다. 사무엘상 6:19에는 또 다른 예가 나와 있습니다. 언약궤는 엘리의 큰 죄 때문에 빼앗겼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가드로 옮겨졌습니다. 궤를 모독한 일로 이교도 도시들에
내린 일련의 심판 후에 그들은 궤를 수레에 싣고 벳 샤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수레를 끌던 소들은 길을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갔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그 궤를 보았을 때 그 소식은 산비탈에 빠르게 퍼졌고
주변 지역에서 경건하고 호기심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대담한 영이
다가와 언약궤의 무거운 덮개를 벗겼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십계명의 거룩한 판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전염병이
그들에게 닥쳤고 오만 명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무서운 두려움과 경악이 백성들에게 임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제사장이나 피 흘리는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사탄의 본성 때문에 초대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중재자(Mediator: or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중보자에 대한 인간의 외침>: Man's Cry for a Mediator
욥은 중보자를
구하는 인간의 외침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시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바르게 설 수 있겠습니까?"라는 시대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성경의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애굽으로 갔던 시기에 아브라함의 사촌 요밥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의 일부는 욥
시대에 사람에게 중보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욥기 4:12-17을 읽으십시오. 밤에 텐트에서 자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있습니다. 하나의 비젼에서 그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 앞에서 어찌 순결하겠느냐"(주변 번역)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생각하는 사람이 직면해 온 오래되고 영원한 문제입니다.
필멸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거나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이 그의 창조주 앞에서 순결해야 합니까? "필멸"이라는 단어에 유의하십시오. "죽을 것"이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몸에만 적용되며 "죽을 운명에 처한...나약한", 즉 마귀의 신하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이나 죽음의 운명에 처한 사람이나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서 있겠습니까?
욥기 9장 25-35절을 읽으십시오.
9장에서, 욥은 일반인의
가장 깊은 영혼의 고뇌를 말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천막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죽음의 투쟁에서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 두려움을 말하면서 완전한 자유로 그의 마음(heart)을 엽니다. 그는 그의 날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묘사하는 비유를 제공합니다.
이어 그는 "만일 내가 내 재앙을 잊겠다고 하면 슬픈 표정을 벗고 담대할 것이니 내 슬픔이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결백하게 여기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나는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모든 거짓된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과 절망과 함께 홀로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내 슬픔이 두렵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솔직함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지식의 절망입니다. "나는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외칩니다. 내가 눈물로 몸을 씻고 내 손을 결코 깨끗하지 않게 한다면 그러나 당신이 나를 도랑에 던지려 하면 내 옷이 나를 싫어할 것입니다.” 어떤 그림입니까? 욥은 그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필멸의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욥처럼 죄의 속박과 죄책감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욥은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가장 슬픈 말을 합니다. “우리 사이에 우리 둘에게 손을 얹을 심판자가
없습니다” (욥 9:33). 즉, 우리 사이에 하나님과 법적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인류를 공감하고 이해하며 대표할 수 있는 중보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보자를 구하는 욥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욥만의 외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은 시대의 외침을 모아 한 번의 소망 없는 흐느낌으로 내뱉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하게 말합니까: "그의 공포가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말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그렇지 아니할 것입니다.” (욥 25:4-6),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의로우며 여자에게서 난 자 보다 깨끗하겠느냐?” "보라 달도 빛이 없고 별들도 그의 보시기에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사람은 벌레 같은 것이로다 사람의 아들은 구더기니라" (욥 25:4-6).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리요?" 여기에서 필멸할
자는 사람이 하와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담이 창조물을 마귀의 손에 넘겨주어 사탄이 그것을 더럽혀서 하나님이 기쁨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하신 아담의 반역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벌레라고 말하면서 그는 사람이 타락한 깊이를 보여줍니다. 욥은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인식했습니다. 예레미야 30:21, "그들의 왕은 그들에게서 나고 그들의 통치자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담대히 내게 접근한 자가 누구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백에는 "그가 내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보증한 자가 누구였느냐"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죄함이 없이 가까이 나아가실 수 있는 분,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마련하실 중보자를
예언하셨습니다.
<중보자의 요구 사항들>: Requirements of a Mediator:
우리는 영생과
의에 대한 인간의 필요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육신은 중보자에 대한 인간의 필요에 대한 유일한 대답입니다. 영적 죽음의 보편성 때문에 자연적 세대(육신의 부모를 통한 출생방식)로부터 태어난 어떤 인간도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한 중보자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는 인류를 대표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2. 사람의 유혹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는 또한 하나님과 함께 의로운 신분을
소유해야 합니다. 4. 사탄의 신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모든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 사항은 한 개인(individual)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인간 역사에서 무엇이 보편적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아무런 지위(standing: 관계)가 없음을 인식한다는 것을 밝혀 줍니까?
2. 인간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성경 구절을 주십시오.
3.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아담과 그의 가족에게 주어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은 무엇이었습니까?
5. 레위기 10장 1-3절의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계시했습니까?
6.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보여 주는 이스라엘의 생애에 있었던 두 가지 다른 사건을 설명하십시오.
7. 욥은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어떻게 말했습니까?
8.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보여 준 예레미야서의 성경을 설명하고 제공하십시오.
9. 사람을 위한 중보의 요구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10. 중보자에 대한 인간의 필요는 어떻게 충족될 수 있습니까?
제7과. 약속된 성육신: THE PROMISED INCARNATION:
이전 수업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에 영적 죽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을 위해 영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제공하면서 아버지-하나님이 직면한 문제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인간에게 구속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 개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요구됨을 보았습니다. 의와 영생과 중보자에 대한 인간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성육신은 성육신하신 분이 인간의 중보자로 서실 수
있는 근거에서 연합된 신성과 인성의 대리자를 제공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연합함으로써 그분은 둘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그분은 인간 반역의 책임을 짊어지고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틈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 God's First Promise of the Incarnation:
인간이 대반역죄를 범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영적 죽음의 존재에서 그의 상태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상태로 묘사됩니다. 즉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대신하여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은 인간의 상태를 정면으로 직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가 그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법적인 근거로 충족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을 그분의 교제 안으로 다시 데려오는 희생을 너무 크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함께 만났고(시 85:10) 사랑의 승리는 인간에게 구속주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사탄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성육신의 첫 번째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약속에서 주목할 만한 네 가지 진술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즉, 사탄과 여자 사이에 적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녀는 일반 동산으로 사고 팔렸습니다. 기독교가 한 나라의 심장부에 도달한 곳에서만 여성이 그녀를 짐승 같은 피조물 위로 들어올릴 수 있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에서 그녀는 우리 질병들의 상속자이자 이혼 법정의 희생자입니다. 의사들은 모든 병원 사례의 95%가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내가 네 씨와 그의 씨 사이에 원수를 두리라." 사탄의 씨는 거듭나지 않은 인류이고 여자의 씨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린 시절부터 사탄의 씨에게 쫓겨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오늘날까지 교회는 세상의 가장 혹독한 박해와 적의의 대상이었습니다. 셋째, "여자의 씨." 여기에 여자가 자연적인 세대와 무관하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아이는 항상 "사람의 씨"라고 불립니다. 넷째,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가 네 머리-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니." 모든 동양 언어에서 "머리를 상하게 하다"라는 용어는 "지배자의 주권을 깨뜨리다"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탄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주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 안으로 막 들어왔습니다. 그는 여자의 씨가 올 때까지 그 권세를 행사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그의 주권을 깰 것입니다. "발뒤꿈치" 는 땅에서 걷는 교회입니다. 사탄의 씨에 의한 교회의 오랜 박해는 역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예언이며 그것이 얼마나 분명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육신 하신 이(예수님)가 오사 사망의 권세(power: 세력: 능력)를 잡은 자 곧 마귀를 폐하고 또 죽기를 두려워하여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4). 이 성경은, 또한 예수님의 가혹한 박해에서 그것의 성취를 발견해 왔는데, 그것은 십자가위에서 그분의 죽음에서 그것의 절정을 발견하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박해에서 그것의 성취를 발견해 왔으며, 교회는 지상에서 그분의 뜻을 수행합니다. 창세기 3장 20절에 “그 남자가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으니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음이더라.” 이브(Eve)는 히브리어로 "하와(Hahwah)"인데 문자적으로는 "살아 있는 자" 또는 "생명을 주는 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의 아내가 "생명 주는 자"이신 우리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육신에 대한 보편적 인간의 바램>: Universal Man's Desire for the Incarnation:
성육신의 가르침은
인간의 욕망이나 전통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의 모든 부족에 의해 믿어져
왔습니다. 보편적인 사람(보통 사람)은 성육신을 갈망했습니다. 그의 영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인간 제물의 피를 마시고 그의 신들의 칭호를 따라 그의 왕들을 명명하고
또한 그의 황제나 왕을 신의 성육신으로 만듦으로써 증명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신과의 연합에 대한
인간의 굶주림을 보여주면서 신성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성육신은 첫 사람의 창조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신성한 능력(power)의 행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created). 나머지 인류는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es)에 의해 생성되었습니다(generated). 그러나 그 여자(the woman)에게서 나실 이 구속자(Redeemer)는 신성한 능력(power)의 특별한 행위에 의해 형성될(formed) 것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육신은 그분과 함께 하는 하나의 가능성입니다(He
is God Almighty, and the Incarnation is a possibility with Him).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시도>: Satan's Attempts to Thwart God's Plan:
우리는, 사탄이 약속된 구속주(Redeemer) 안에서 주어진 인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얼마나
분명하게 깨달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그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8). 그(사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crucifixion)이 사람의 구속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인간에 대한 그의 지배를 깨뜨릴 구속자가 인류를 통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강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활동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사탄은 (1) 지구 위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을 파괴하고 (2)
인류 안에서 하나의 의로운 계통(Righteous line: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의 계보)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 둘을 통해 그는 구속자가 인류를 통해 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 (fellowship)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려는 사탄의 첫 번째 시도는 가인에 의한 아벨의 살인 안에 있었습니다(창 4:1-15).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믿음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창세기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은 받으셨더라.”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시되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사탄은 아벨이
인간의 구속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생명을 파괴했습니다(그가 의로운 계보일 수 있음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당시 존재하던 의로운 계보를 파괴했습니다.
창세기 4:25, 셋은 아담과 이브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이브(Eve)는, 의로운 계보가 파괴되었고 아벨(Abel)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셋(Seth)이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이 내게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
<여자의 씨>: The
Seed of the Woman:
세대가 지나감에
따라 영적인 죽음은 사람의 삶에 작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의 마인드(mind:
생각, 정신)가 눈먼 상태로 걷게 합니다(에베소서 4:17-18). 사탄은 여자의 후손을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통해 구속자를 보내실 수 없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성육신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주어진
유일한 약속은 매우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씨에 대한 사탄의 격렬한 전쟁은 일반적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구속자에 대한 약속을 더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명명하신 의로운 계보를 파괴하기 위해 사탄이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성육신하신 분은 일반적인 용어인 여자의 후손이라고 불립니다. 창세기
12:3, 그것은 더 두드러지고 성육신하신 분은 "아브라함의
씨"로 명시됩니다. 시편
89:3-4, 그는 "다윗의 씨(자손)"라고 불립니다.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것입니다. 가족이 표시됩니다. 그리고 이사야 7장 14절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그분은 마치 그녀를 표시하신 것처럼
"처녀(동정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인이 표시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탄이 아브라함의 씨와, 그 다음에는 다윗의 씨를 향하여,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맹렬한 증오와 박해를 향하여 지휘했던 노력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5장>: Genesis 5
창세기 5장은 우리에게 노아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사탄이 의로운 계통을 파괴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구속주가 오실 계통을 보존하고 계십니다. 그는 성육신을 향해 일하고 있습니다. 4장과 5장을 읽으면 두 가지 사항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눈에 띄게 우리 앞에 나타난 후, 그의 혈통은 조금 추적되고 있고 역시
살인자인 라멕으로 끝납니다(창 4:18-23). 성령님은 아담과 이브에게서
태어난 셋째 아들, "셋"(창세기
4:24-26)이라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끌고자 하십니다. 이 계보에서
노아, 셈,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나중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 자신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주의를 의로운 가계인 셋에 집중시키기 위해, 신성한 저자는 5장의 시작
부분에서 사람을 창조하고 아담의 역사를 간략하게 추적한 다음 셋의 가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원래의 설명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취급(dealings)이 지금 이 노선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6장>: Genesis 6:
창세기
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자기들이 아름다워
그들이 택한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가인 족속과 의인의 계보인 셋 족속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주목합니다. 가인 족속은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을 발명했으며 죄의 저주를 완화하기 위해 오락을 고안했습니다(창 4:21-22). 셋 자손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4:26). 창세기 4:25에서 대문자로 된
"LORD"라는 단어는 원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이름임을 나타냅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품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알고 사랑했습니다. 가인의 혈통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인 라멕은 일부다처주의자, 살인자, 힘의
신 숭배자였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창 4:16-24). 셋의
일곱 번째 족속은 에녹이니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가졌고(히
11:5) 그는 (하늘로) 옮겨졌습니다(창 5:21-24). 창세기 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활동을 다시 봅니다.
그는 가인의 혈통과 의로운 혈통의 통혼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노아만 남게 될 정도로
구속주가 오실 계보를 타락시킵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사탄은 인간의
마음(heart)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파괴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heart)의 생각(thought)이 항상 악했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참 하나님을 알고 그와 동행했습니다(창 6:8-9). 만일 인류가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면, 노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의인 계열은 파괴되었을 것이고 성육신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사탄이 그의 노력에서
승리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류를 끝내시는 것은 작은
일이었습니다(창 6:11-13). 의로운 가계가 보존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이 지상에 유지된다면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키고 구속주가 노아를 통해 오실 가계를 계속 이어 나가셔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성육신을 향한 아버지-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홍수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우리로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필요는 성육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홍수는 불가피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창세기 3:15에 나오는 네 가지 진술을 설명하십시오.
2. 보편적 인간이 신과의 연합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역사는 보편적 인간이 성육신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4. 성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사탄이 사용한 두 가지 수단은 무엇이었습니까?
5. 의로운 계보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첫 번째 시도를 설명하십시오.
6. 가인 족속과 셋 족속의 차이를 말하십시오.
7. 가인을 통한 아담의 후손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을 말하십시오.
8. 5장에서 셋의 가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사탄이 창세기 6:1-3에 기록된 가인 족속과 셋 족속의 통혼을 일으킨 목적은 무엇입니까?
10. 왜 홍수가 필요했습니까?
제8과. 아브라함과의 언약: THE ABRAHAMIC COVENANT:
이전 수업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후에 중보자, 의, 영생에 대한
필요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성육신의 약속을 주신 때부터 홍수 때까지 구세주가 오실 수 있는 의로운 라인(계보)을 보존하신 일을 추적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성육신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노력에서 홍수가 불가피하게
될 정도로 인류를 타락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노아는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아 남았습니다(보존됨). 그는 여호와에 대한 참 믿음을 보존하여 아들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수단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1) 지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과 (2) 의로운 계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The
Tower of Babel:
홍수 때부터 바벨탑이 건축될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사악하게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계시가 그들의 마인드(minds)에 너무 신선해서 다른 신들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9장에서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을 주목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우리는 온 땅의 언어와 말이 하나였음을 봅니다. 인종의 단결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존된 방주(the ark)는 아르메니아(Armenia)에 머물렀습니다. 인간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이 황량한 고원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분리되어 땅을 채우거나, 그들이 함께 있으려면 더 비옥한 영토를 찾아야 합니다. 후자의 방법이 결정되어 그들은 시날 평야의 부유하고 비옥한 저지대로 내려갔습니다(창 11:2). 그들은 지면에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거기에 성읍과 탑을 건축하고 거기에 영구히 정착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창 11:4). 여호와께서 강림하사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으므로 그들이 온 땅에 흩어졌습니다(창 11:7-9). 거기서부터 인구의 흐름이 세계 각지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북서쪽은 유럽, 서쪽은 소아시아, 남서쪽은 이집트와 아프리카, 남쪽은 아라비아, 남동쪽은 페르시아와 인도,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흘러갔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더 먼 땅에 정착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여호와에 대한 예배와 지식은 자연의 능력들의 숭배(the worship of the powers of nature)로 넘어갔고, 그 다음에는 우상들(idols)로 바뀌었습니다. 감각 지식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주어져왔던,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Sense knowledge took the place of God's Revelation which had been given to spiritually dead man). 각 민족의 가장 오래된 경전과 전통은 각 민족이 원래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경전의 기록(로마서 1:18-32)을 증언합니다. 기념비적인 비문의 도움으로 이러한 고대 기록과 전통에서 우리는 한 하나님 예배에서 많은 신과 많은 우상 숭배로 넘어가는 과정을 아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The Call of Abraham:
홍수 후 367년 후에 아브라함이 나타납니다. 노아는 아브라함이 태어난 이후에 오십 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세상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때까지 이방인과 우상숭배자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가장 찬란한 고대 도시 중 하나인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실상 상실되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성육신 아들(His Incarnate Son)을 보낼 수 있는, 하나의 의로운 계보가 보존되어야만 했다면, 그분은 그분을 알았던 한 사람을 택하여 그로부터 지상에서 그분 자신에 관한 지식을 유지할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야만 합니다(If a righteous line were to be preserved through which God could send His Incarnate Son, He must choose one man who knew Him, and make of him a nation that would preserve the knowledge of Himself upon the earth). 아브라함의 동족과 그의 아버지는 우상숭배자였습니다. 만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구속주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여 그분이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나라가 그 안에서 세워져야만 했다면, 아브라함은 이러한 영향들에서 제거되어야 했습니다(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셔서 그로 하여금 장차 오실 구속주를 알게 하시고, 그 계시를 보존하여 막상 그분이 오셨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를 통하여 하나의 민족을 세우실 목적으로 먼저 그를 우상에게서 떠나게 하셔야만 했다는 말임).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는 전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우상숭배가 없는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창 1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25년 후에 그리스도 탄생까지의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피의 언약이었습니다(Twenty-five years after Abraham had received his call from God, the greatest event in human history until the birth of Christ, took place. It was the Blood Covenant into which Jehovah and Abraham entered).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이 언약의 의미를 알기 전에 먼저 피의 언약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피의 언약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했습니다. 이 피 언약 의식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지구의 모든 지역에 있는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고대성(antiquity)은 아브라함 시대에서 훨씬 이전의 날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피의 언약>: The
Blood Covenant: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끊으셨거나 언약을 맺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피의 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계시가 원시인(primitive
man)에게 주어졌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바벨탑에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노아는 그가 그의 자녀들에게 물려준 피의 언약의 의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국이 형성되었을 때, 바벨탑에서 흩어진 사람들로부터 각자가 피의 언약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의 언약"이라는 제목의 트럼불 박사(Dr. Trumbull)의 책에서 밝혀진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믿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나라에서 피는 ··· 특히 생명의 대표자로 여겨져
온 것 같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생명 그 자체입니다. 혈액이
한 유기체에서 다른 유기체로 옮겨지는 것을 생명이 포함된 모든 것과 생명의 전이로서 피의 혼합은 본성의 혼합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피의
혼합에 의해 혼합된 두 본성은 이제부터 한 본성, 한 생명, 한 영혼.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에 피의 혼합에 의한 본성의 결합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피의 언약, 즉 피의 혼합에 의해 맺어진 언약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가장 거룩하며 가장 불가분의 계약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남자들이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데에는(cutting the Covenant with each other)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강한 지파가 약한 지파의 편에 서고 약한 지파가 멸망할 위험이 있으면
약한 지파는 자기를 보전하기 위하여 강한 지파와 언약을 맺으려 할 것입니다. 또는 두 명의 사업가가 사업을
하려고 하고 한 사람이 외국 대표로 출국하여 여행을 하려고 하면 동업자와 계약을 체결할 것입니다. 또는 두
사람이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하면 언약을 체결할 것입니다. 피의 언약이 엄숙히 거행되는 순간,
피의 언약 남자가 소유한 모든 것은 이 피의 형제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절대적으로 들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은 이 언약이 체결되자 마자 다른 사람들에게 '피형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피의 언약은 대대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세대가 지울 수 없는 불가분의 언약입니다. 남자가 그 친구와 언약을 체결하면 두 가문의
자손들이 지켜야 합니다. Mr. Stanley가 우리에게 말하고 Livingstone은 증언합니다: 아프리카 안에서 두 남자가 언약을 체결하면 -그리고 한 사람이 언약을 어기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의 죽음을 찾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깨는 어떤 사람도 아프리카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을 저주합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은 없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그 언약은 신성합니다. 스탠리 씨와
리빙스턴 박사는 둘 다 언약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언약을 체결하는
방법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매우 기괴한 의식으로 변질되었지만 동일한 피의 언약입니다.
아프리카인, 아라비아인, 시리아인,
발칸인이 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두 사람이 친구와 제사장과 함께 모입니다. 첫째, 그들은 선물을 교환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포도주 한 잔을 가져옵니다. 제사장은 각 사람의 팔을 절개하여
피가 포도주에 떨어지게 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포도주를 섞어서 마십니다. 이제 그들은 혈연 형제입니다. (우리의 책 The Blood
Covenant를 읽으십시오.)
<아브라함의 언약>: The Abrahamic Covenant:
창세기 17장은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강한 우정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피의 언약을 강한 우정의 언약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습니다(약 2:23; 이사야 41:8; 역대하
20:7). 아브라함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유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을 언약
백성으로서 존재(Being)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창 17:7).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을 체결하는(cut the Covenant) 방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창 17:10-14). 언약의 인(The seal of the Covenant)은 할례였습니다. 모든 남자 아이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그 할례는 언약으로 들어가는 입구(circumcision
was the entrance into the covenant)였습니다. 창세기
17:26,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피의 언약을 맺었다는 증거를 그의 육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아브라함은 동방에서
"하나님의 벗"으로 불립니다. 피의 언약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된 후, 그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충성심에 대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 시험은 또한 아브라함이 할례 의식에서 언약을 체결한 것이 공허한 의식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께 자신의 생명을 서약했다는 사실을 미래 세대에게 증거할 것입니다. 창세기
15:6,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에서
"믿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Heemeem"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한다는 개념을 전달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너무나 신뢰했기 때문에 피의 언약 의식에서처럼 자신을 여호와께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과 신뢰를 사모하는 마음을 그들 사이에 피 언약의 우정을 맺을 준비가 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19절, 시험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피의 언약의 자녀 이삭이 18세나
20세였을 때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 Abraham's Testing:
창세기 22:1,
2, “이렇게 되었나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신성한 친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즉시 일어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와 같은 거래에서 동양적 사상을 인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양의 아버지는 자신의 생명보다 외아들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동양의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는다는 것은 끔찍한 생각이지만, 아들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그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그에게 태어났으므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수고한 삶을 포기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사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포기하고 다시 가망 없고 자식 없는 노인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추리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 믿음, 실패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사랑만이 그런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피의 우정의 언약을 맺은 사람들은 피의 언약의 형제나 신들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인간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신성한 친구에게 많은 일을
할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다른 신들의 숭배자들이 그들의 헌신의 증거로 기꺼이 바치는 모든 것을 그의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까? 이것은 세상 앞에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습니다. 창세기 22:3-10, 아브라함은 여호와와의 피의 언약에서 이와 같은 우정까지도 나눌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헌신의 영을 나타냈을 때, 그는 손을 거두라(stay: 중지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히브리서 11:17-19). 창세기 22장
15-1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내 생명에 의해) 맹세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언약의 기초인 Godward(하나님을 향하여)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맹세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동양인에게 그것은 "나는 나 자신을 맹세합니다. 이제 이것이 실패하면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됩니다. 당신은 나를 소유합니다. 나는 나를 당신에게
속박했습니다" 입니다. 그들은 함께 묶여 있습니다(They
are bound together). 하나님의 모든 것은 아브라함에게 속하고, 아브라함의 존재나 장래에 가질 모든 것은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분이 "나는 언약을 지키는 여호와라" 고 여러 번
말씀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뒤에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그 언약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속박에 두심으로써 그분의 편에서 인봉하셨던 이 엄숙한 언약이 있었습니다(Back
behind Israel was this solemn covenant that God had sealed on His side by
putting Himself in utter, absolute bondage to that Covenant).
<질문>: Questions
1.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으실 때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부르심(창 12:1-2에 기록됨)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원시 민족들 사이에 존재했던 피 언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십시오.
4. 언약을 체결하는 세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아브라함 언약의 인은 무엇이었습니까?
7. 창세기 15:6에서 "믿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8.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진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
9.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순종은 무엇을 드러냈습니까?
10.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에서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제9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GOD'S COVENANT PEOPLE: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신의 계시를 지상에 보존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언약 백성을
통해 하나님은 구속자를 보내실 예정이었습니다. 창세기 22:17, 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천국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Covenant relationship)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또한 지상에서 그분의 간증(His testimony)이 되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지리적으로 위치했기에(located geographically) 고대 문명이 서로 상업 관계를 맺을 때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그들에게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삭, 야곱, 요셉>: Isaac, Jacob and Joseph: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역사를 알려준 후, 창세기는 그의 직계 후손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우리에게 줍니다. . . 이삭,
야곱, 요셉. 모든 창세기는 다섯 개의
이름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아담, 1-5장;
노아, 6-11장; 아브라함,
12-26장; 야곱, 27-37장; 및 요셉, 38-45장.
우리는 피의 언약에 있는 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특성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할 것입니다. 구약의 가장 아름다운 인물이자 온유하고 조용한 영인 이삭은 다른 어떤 조상도 주지 못한 인상을 유대인의 삶에 남겼습니다.
레베카에 대한 그의 결혼과 사랑은 그 훌륭한 사람들의 설립자들이 들려주는 가장 사랑스러운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야곱은 비뚤어지고 이기적이며 날카로운 또 다른 인물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얍복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야곱은 그날과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과 함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가장 비뚤어진 삶도 변화시켜 곧게 하실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요셉은 우리의 아름다운 왕자님입니다. 문학 어디에도 이 어린 소년, 남자, 정치가, 국가의 건국자 및 수호자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생명의 향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대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당당한 성격의 영향으로 많은 소년들이 착하고 강해졌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렸습니다(창 37:25-28). 그는 30세에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창 41:37-45). 야곱이 사십 세에 일흔 명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창 46:1-26).
<이집트에 간 이유>: Reason for Going into Egypt: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휩쓸고 있는 기근 동안 당신의 언약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언약의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번성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45:6, 7, “그 땅에 기근이 든 지 이 년이 지났고 아직도 오 년 동안은 밭을 갈거나 추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에서 당신들을 남은 자로 보존하고 큰 구원으로 당신들을 살아있도록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들보다 먼저 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일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대에 걸쳐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창세기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의 온 집의 주가 되며 애굽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의 돌보심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그 땅의 안락함과 풍요로움과 훈훈한 빛 속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들은 선호하는 정착민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 아래에서 명예롭고 보수가 좋은 지위를 차지했습니다(창 47:1-12, 27).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 위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을 지키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증가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땅에서 그분의 증인이 될 큰 민족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말씀을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놀라운 성장에 우리의 관심을 이끕니다. 출애굽기 1장 7절,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이 그들로 충만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있던 210년 동안에 그들의 수가 칠십에서 삼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연대기는 이집트에서 210년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출애굽기 12장 40절과 같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의 체류 기간을 430년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70인역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17절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날부터 그 이스라엘 자녀들의 구원까지의 기간을 계산하면 그것이 정확히 430년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대해 빛을 줍니다(갈 3:16-17에 의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류 기간이 430년이 아니라 210년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임). 가나안에 들어간 때부터 이삭이 태어난 때까지 이십오(25) 년이 흘렀습니다. 이삭을 낳은 때부터 야곱을 낳기까지 육십(60) 년이 걸렸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의 나이는 130세였습니다. 이 전체 간격은 (약) 220년에 이르며(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후부터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보낸 기간이 대략 220년이라는 말임), 여기에 210년을 더하면 430년이 됩니다(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보낸 기간이 대략 210년이라는 말임).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박해>: The Persecution of God's Covenant People:
지난 과에서 우리는 약속된 구속자가 오실 "여자의 씨"를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이제 구속주가 "아브라함의 씨"로 명시되었으므로 사탄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멸망시키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이 된 애굽에서 100년을 보낸 후, 사탄은 그들을 멸망시키려 합니다. 사탄은 애굽 정치가들의 마음( hearts)에 두려움(fear)을 심어 주었는데, 그 두려움은 그토록 강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전시에 애굽의 대적과 연합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출 1:8-10). 그런 다음 체계적인 압제와 노예화(systematic oppression and enslavement), 단호한 폭정과 잔인함(determined tyranny and cruelty)에 관한 조언들(counsels)이 따랐습니다(출 1:10-14). 그러나 이스라엘의 증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고 온 세상(all the world)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애굽의 통치자들이나 애굽 사람들)이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많이 배가하였고 성장하였습니다(출 1:15-22). 노예들이 이집트인들로부터 받은 대우는 때때로 매우 끔찍했습니다. 모든 아들을 죽이거나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해진 신체 절단과 고문은 사탄의 성격을 띤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는 박해가 너무 커서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the God of the Covenant)께 구원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그 속박(their bondage)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내려오십니다(출애굽기 2:23-25 과 출애굽기 3:5-8).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출생과 그가 부름을 받을 때까지의 그의 생애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기 모세를 강둑에 숨긴 것과 나중에 모세가 애굽을 포기한 것은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1:23-27은, 두 행위 모두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faith in the Covenant keeping God)에 토대를 두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석 달 동안 숨겼느니라 . . .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나." 출애굽기 3장과 4장은 불타는 덤불의 이야기, 즉,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들에 있어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그의 응답에 대한 주저(hesitancy), 그리고, 아론이 그와 동행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를 포함하여, 모세의 부르심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모세의 지팡이에 주어진 능력을 주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the Covenant-keeping God)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the miracle working God)으로서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4:20-26은 피의 언약이 있었던 중요한 장소를 계시합니다. 모세는 그의 장자의 할례를 무시했었습니다. 그는 그 언약에 불충실했습니다. 시나이 광야로부터 애굽으로 가는 그의 길에서 애굽인들의 언약 없는 장자에 관한 하나님의 한 메시지를 가지고, 모세는 놀라운 섭리를 만나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고자 하신지라." 모세와 그의 아내는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그들의 의무, 그들의 아들의 할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 계획에 더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 의해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모세는 언약 백성의 증표로서 그의 아들을 위해 행했어야만 했던 할례를 잊어 버려서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고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고 죽음을 모면했슴.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임). 다음 수업에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분쟁의 구경꾼이 될 것입니다. 한쪽에는 애굽의 모든 권세와 부와 영화, 그 학식, 자부심, 신들에 대한 확신에 찬 의존이 늘어서 있습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약하고, 늙고, 망가지고,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추종자는 그의 형 아론 한 명뿐입니다. 이 두 사람이 궁전 문을 통과하여 왕에게 알현을 요청하는 것은 무서운 행렬이 아닙니다. 명랑하고 재치 있는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비용으로 많은 농담을 즐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놀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목격한 세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두 노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300만 명의 자유를 요구합니다. 당대 가장 강력한 문명의 신왕인 파라오의 거듭된 거부에도 불구하고 거듭거듭 그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끈질김 앞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놀라움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발걸음 소리에 뺨이 창백해지고 심장이 떨립니다. 피의 언약을 맺은 이 두 사람은 이집트의 운명을 손에 쥐고 이집트의 위대함이 사라졌을 때 살았던 땅에 기록된 글을 남깁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일을 연구하기 전에 애굽 왕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왕좌에 오른 한 왕자는 말하자면 신하들의 눈에 변형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었습니다. Lenormant는 "우리는 이집트에서 그러한 높임(exaltation)이 최고의 주권에 어떤 위신을 부여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왕이 보기에 애굽인들은 종교적 동기로 인해 왕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떨리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숭배는 신성에 대해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의 제사장들과 그는 두 개의 다른 플랫폼을 차지합니다. 그는 홀로 떨어져 앉아 있습니다. 그가 말하면 문제가 판단됩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그에게만 있으며 거절과 지속적인 불의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라오(바로)가 온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와 논쟁을 벌이는 유일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말은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설명할 때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출애굽기 8:10, 22, 23, "너(바로)에게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내(강조는 '내가'이고 '네가' 아니며 '네 신'이 아님)가 세상의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하리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한쪽에 있습니다. 파라오와 그의 백성은 반대편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위선자(pretender) 사이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상을 조각으로 부수고 그것을 낮추셔야 합니다.
<질문>: Questions
1.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증인이 된 장소를 설명하십시오.
2.
이삭, 야곱, 요셉의 간략한 성격을 설명하십시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요셉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4.
박해를 받기 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묘사하십시오.
5.
누가 애굽의 정치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압제하게 하였습니까? 그는 왜 이것을
했습니까?
6.
모세가 그의 부모에 의해 숨겨지고 나중에 이집트를 포기하게 된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7.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내려오셨습니까?
8.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9.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는 일에 일어난 큰 싸움에 누가 가담하였습니까?
10.
하나님께서 바로를 낮추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10과. 이집트로부터 구출: THE DELIVERANCE FROM EGYPT: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위대한 드라마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성경 기록(the Scriptural account)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보여주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집트인의 삶의 그림은 당시 고대 이집트인의 삶의 진정한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역사의 시대에 파라오가 가졌던 권세보다 파라오가 (실제) 그의 손에 쥐고 있던 권세. 기적을 행할 때 애굽의 마술사들이 맡은 역할은 고대 제사장들이 가졌던 능력(power)의 충실한 표현입니다. 이집트인의 제사장직은 실제로 산 자와 죽은 자를 대신하여 행사되었던 마법의 힘을 가지고 부여받은 법인체였습니다. 모든 이름, 사건, 묘사된 관습에 대한 성경 기록은 바로 이 시대의 애굽을 계시합니다. 반영(reflection)의 진실성과 날카로움은 사실들을 알았던 누군가에 의해 씌여졌던 것임을 보여줍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역사하시는 이 드라마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출애굽기는 사실들을 알았던 누군가에 의해 씌여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원전 400년경에 바빌로니아 유대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셨던 고대 이집트의 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출애굽기 5:12에 기록된 바와 같이 짚 대신 그루터기를 사용한 벽돌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기적>: The
First Miracle:
모세는 여호와께
순종하여 이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신하여 바로에게 나아갑니다(출 7:1-7). 출애굽기 7:8-13은 모세가 바로와 마술사들과의 첫 만남을 보여줍니다. 주어졌던 첫 번째 표적은 그 지팡이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즉시 뱀으로 변했습니다.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들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가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니 애굽 박수들도 그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출 7:10-12). 어떤 사람들은 애굽 제사장들의 지팡이들도 뱀들로 변한 능력을 보고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호소(appeal)했던 애굽의 신들과 동일시되었던 그 영들(spirits)은 응답없이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애굽의 신들이 그들의 호소에 응답했다는 말임). 우리 시대의 강신술(spiritualism:
spiritism: 죽은
자의 영들과 소통하는 것)의 리바이벌(부흥)과 속임수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모든 현상들은 사탄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숭배하게 하고자 할 때 기적 안에서 그의 일(the
working of Satan)을 보여줍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창조주)과 애굽의 신들 사이의 싸움은 처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파라오 앞에서 일어난 기적은
하나의 놀라운 중요성을 갖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술객의 지팡이들을 삼킨 것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그
종교도 세상의 현자들이 지식과 큰 것을 찾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신뢰들을 삼켜서 그것들은 그들과 그들의 사탄의 동료 노예들을 떠났습니다.
<재앙들>: The
Plagues:
이제 이집트의
힘을 강타하고 완고한 마음(heart)을 부수는 재앙들의 이야기를 연구합시다.
그 지팡이가 하나의 뱀으로 변했을 때 표적(sign)이 주어졌습니다.
그 표적은 마술사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고 그 결과 여호와의 능력(power)이 더욱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표적일 뿐이었고 그것은 쉽게 잊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으로 옵션(recourse)을 가져야만 합니다(그들이 그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심판으로 나갈 것이라는 말). 첫 번째 재앙은 애굽의 물이 피로 변한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에게 임했습니다.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너는 하숫가에 서서 그를 맞으라” (출 7:15). 그
독자는 강가에서 파라오를 만나라는 명령을 지켜볼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그 시간과 장소에서 즉시로 영광스러운
적합성을 봅니다(하나님께서 적시, 적소에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는 기적들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완벽히 드러내시는 것을 우리가 본다는 말임). 나일강의 신은 이집트의 주요 아버지 신들(chief fathergods) 중 하나이자 이집트의 이 지역에서 깊은 숭배(veneration)의 하나의 대상인 NU(누)의 의인화 (impersonation)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 재앙으로 그에 대하여 자신의 최고 주권(supremacy)을 주장하셨습니다.
파라오는 이 신에게 자신의 몸을 헌신하기(offer his devotion) 위해
아침에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왕은 그의 신의 제단 앞에 서 있는 동안 여호와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신과 그의 숭배자들은 똑같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이르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시내들과 강들과 연못들과 모든 못 위에 내밀라 그리하면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그릇과 돌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출 7:19). 이스라엘 사람들의 남자 자녀들은 물에 던져졌고 이제 하나님은 이집트 사람들의 죄를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들의 죄들을 심판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들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임). 피의 강이 그들의 행위를 땅과 하늘에 알리고 그것의 공포가 일어나 그들에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재앙은 잘 알려져 있고 무서운 하나의 재앙(affliction:
고통)이었습니다. 그 강렬함은 모든 사람의 말에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아론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이집트인의 가슴을 혐오와 두려움으로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 보라 내가
개구리로 네 온 지경을 치리니 강에 개구리가 심히 나오리니 그것들이 올라와 네 집과 네 침실과 네 침상과 네 신하들의 집과 네 집 위에 백성과
네 화덕과 떡 반죽 통에 개구리가 올라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덮일 것이며” (출 8:24). 우리는 이 동물들이 고통이라는 말 뒤에 이집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전염병은 즉시 무서운 의미를 얻습니다. 우리는 징벌의 크기 때문에 도구의 무의미함을
간과합니다(심판의 도구에 의미가 있슴을 의미함). 개구리 재앙은 백성들에 대한 무서운 형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들에 대한 또 다른 심판이었습니다. 개구리는 이집트에서 항상 큰 골칫거리였으며 처음부터 개구리를
쫓아내는 일은 HEKI라는 여신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녀는
개구리의 머리를 가지고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녀가 수행해야 할 직무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집트
전역에서 최고의 여신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 애굽의 강대한
신들보다 더 크신 자신을 다시 나타내십니다. 파라오의 마음(heart)이 더욱 강퍅해짐에 따라 재앙은 계속 그들에게 임합니다. 출애굽기
8:16-19 및 출애굽기 8:20-24는 이(lice)가 날아가는
재앙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집트인들의 신들에 대한 또 다른 심판이 나타났습니다.
이집트에서도 파리를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을 때 단순한
표적이 주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개인의 불편함(discomfort)은 하나님의
능력과 불쾌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파리들(the flies)이 가져오는
위험과 함께 그들의 의복과 가구와 덫도 파괴되었습니다. “땅이 파리 때문에 더럽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더 나아가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가장 귀중한 재산 중 하나인 가축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파라오가 하나님의 요구에 "아니오"
라고 말했거나 그가 순종을 약속했고 그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모세는 메시지를 가지고 보내졌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라." 그리고 바로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그들을 붙들고 있으면 보라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양에게 임할 것이니라.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9:1-5. 우리는 이집트인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사이의 분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집트인의 소유물,
곧 이집트 재산의 대부분이 침해당했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 재앙에서 그들의 몸들이
만져졌습니다(touched). 그들은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질병에 걸렸고, 이 싸움에서 그들의 투사인 마술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즉시 시합에서 물러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에서 그분의 자비에 유의합니다. 그분의 자비는 먼저 그들을 불순종에서
돌이키고 최종적이고 무서운 재난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더 온순한 징계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더 가벼운 형벌이
구원하지 못할 때 사랑은 더 무거운 형벌을 내리게 하여 이것이 불순종하는 자들을 그 길에서 돌이키나 보려고 합니다. 일곱째 재앙에서 징벌의 가혹함에 있어서 뚜렷한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농작물뿐만 아니라 인명 손실도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9:18, “보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큰 우박을 내리게 할
것이니, 그것은 애굽이 건국된
이후로 지금까지 그런 큰 우박이 내려지지 아니했슴이라.” 출애굽기
10:4-6. 여덟째 재앙이 선포되자 "메뚜기"라는 단어가 애굽 사람들의 귀에 무서운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10:7. 처음으로 우리는 법정에서 항의를 듣습니다. 왕을 둘러싸고 왕을
신으로 숭배하는 방백들과 위인들은 그들과 왕위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들은 아주 명백한
공포 속에서 습관적인 경외심을 버리고 애굽의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에게 올무가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애굽이 망한 줄을 아직도 알지 못하시나이까." 우리는 이제
아홉 번째 재앙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유예된 심판이 내리기 전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였습니다. 그 무서운 사흘 밤낮 동안 각 사람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모든 사업이 중단되었습니다 (suspended). 모든 것이 제쳐졌습니다.
왕, 상담가, 귀족, 제사장, 상인, 장인, 농부 등 각자가 혼자 머물렀습니다. 각자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질문에 직면했고,
연이은 역병을 기억하면서 말했고 이것을 의식하며 반복했습니다: "네가 전능자의
손 방패(buckler)에 스스로 돌진할 수 있느냐?" 이 3일간의 경외감에 사로잡힌 고립(awe-struck isolation)은, 우리로 하여금 이집트의 모든 완고함(stubbornness)과 자만심(pride)을 깨뜨려야만 했던 최후의 일격(last stroke)으로부터 이집트를 구했을,
그 무한한 연민(compassion)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집트인들의 주요 신들 중 하나인 태양(the
sun)에 대한 그의 주권(His supremacy)을 나타내셨습니다.
<유월절에 피의 언약과 그 증표>: The Blood Covenant and Its Tokens in the Passover: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혈연의 언약(His Covenant of blood-friendship with Abraham)에 대한 그의 신실함(fidelity)의 새로운 증거를 주실 때가 왔습니다. 다시, 구속의 역사에서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애굽에 있었고 주님은 가나안에서 약속된 그것의 유업을 위해 그 씨를 그곳에서부터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도 이스라엘을 내보내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임한 마지막 재앙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피의 언약의 중요성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주님 사이의 피 우정의 본래의 언약(the original covenant of blood friendship)에서 언약의 표시로 자신의 피를 바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들(plagues)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번째 재앙을 피하려면 피 흘림의 행위가 있어야 했습니다(Now there was to be an act of the shedding of blood, if they were to escape the tenth plague). 여호와께서는 흠 없는 숫양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어린 양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으므로 완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예표인 어린양의 피는 아브라함의 후손의 각 집의 좌우 설주와 문인방에 발라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피(아브라함과 맺은 나의 피 언약의 증표)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7-13). 장자는 보혈로 덮였을 때 안전했습니다. 선택한 어린 양의 고기는 피 우정 의식이 보장하는 상호 교통의 표시로, 그리고 어디에서나 원시 피 언약 의식의 공통 관습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건하게 먹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의 마음을 무너뜨렸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끔찍한 죽음은 쾌락을 사랑하는 이 사람들의 삶을 끔찍하게 정지시켰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이 죽으면 특히 큰 애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고난이 온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집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했을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 밤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 애굽에 큰 통곡이 있었으니 이는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한 집도 없었음이라 ”(출 12:30). 그러나 죽음으로 인한 파라오와 그의 모든 백성의 슬픔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이 심판으로 성취된 모든 것을 아직 요약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2절에 “내가 오늘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땅의 처음 난 것을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 대하여 심판을 집행할 것이다" 라는 구절에 주목합니다: 그 단어들 모두는, "사람과 짐승 모두" 에 대해 놓였습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동물을 숭배하고 왕을 화신으로 여기며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신으로 숭배되는 파라오는 그의 땅과 그의 백성 앞에서 매를 맞고 징벌을 받습니다. 이미 신성한 영예를 받은 그의 후계자는 죽음의 고요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타격이 이 언약 백성의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음 난 것은 무사했습니다. 어떤 재앙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큰 두려움이 애굽을 덮쳤습니다. 때린 손이 다시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쫓겨났습니다. 파라오는 동이 트기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밤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주 여호와를 섬기고 가서 축복하라 애굽 사람들이 백성을 다급히 보내어 그 땅에서 속히 보내게 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다 죽은 사람이 되리라 하였더라”(출 12:31-33).
<질문>: Questions
1. 성경 기록이 어떻게 고대 이집트인의 삶에 대한 참된 그림을 알려 주는지 보여 주십시오.
2. 파라오 앞에서 행해진 첫 번째 기적은 무엇이었습니까?
3. 그것에 어떤 영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까?
4. 첫 번째 재앙은 어떤 면에서 이집트 신에게 심판을 가져왔습니까?
5. 두 번째 재앙과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6. 파라오가 거절할 때, 고난이 어떻게 더 크게 되는지 보여 주십시오.
7. 아홉 번째 재앙은 마지막 재앙이 임하기 전에 그분의 자비를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8.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언약에 대한 충성의 증거를 보이셨습니까?
9. 열 번째 재앙의 영향을 묘사하십시오.
10. 재앙이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다는 것이 어떻게 밝혀졌습니까?
제11과. 광야의 언약 백성: COVENANT PEOPLE IN THE WILDERNESS
우리는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유월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언약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그 위험에 직면할 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압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피의 우정에 대한 이 유월절 의식의 제도는 그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을 기념하는 영원한 의식이 될
것입니다(출 12:14-20, 43; 13:16). 출애굽기
12:3-8. 유월절 어린 양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어린양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그는 정월(유대력)
10일에 잡혀서 14일 저녁(3시)에 살해될 때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10일째
배반당하시고 14일째 되는 날 십자가에 못박혀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이 예식의 증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로 삼게 하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출 13:16). 원시 시대에 종종 두 사람이 언약을 체결했을 때, 피 묻은 언약의 기록은, 혈연의 신성한 의식에서 영원히 친구를 얻은 사람의 팔이나 목에 차도록
작은 가죽 케이스 안에 보관되었습니다. 대대로 유대인들은 이마에 면류관을, 팔에 팔찌를, 여호와와 그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의 유월절 언약의 기록을 담은 작은 가죽
케이스를, 신성한 부적으로 차는 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큰 재물을 가지고 탈출>: Exit with Great Substance:
파라오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우거하는 자의 은금 패물과 의복을 취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 많은 사람들이 이 성구와 출애굽기 12:35-36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에 실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구하다"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2:35-36에서 "빌려주다"로 번역된 단어는 같은 단어의 한 형태이며 "구하다", 즉 요청을 받아들이고 은혜롭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리턴할 생각도 없이 빌리면서,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들을 물었습니다.
문제는 요청에 응답해야 하는지 아니면 화를 내며 거절해야 하는지 여부였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집트인들의 눈에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적들에 의해 새로운 빛으로 바라보아졌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들은 다른 어떤 정복 국가가 알았던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의 전리품이었습니다. 역사에서 정복된 자들은 약탈되었지만, 결코 자원해서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했던 사람들에게 베푸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저 서서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기다렸던 언약 백성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망쳐 놓은 자들의 화려한 의복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기절합니다.
200년 이상 전에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은 이 승리를 예측하셨습니다(predicted). 창세기 15장 13-14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그들의 것이 아닌 한 땅에서 한 나그네(stranger)가 되고 고난을 받게 될(afflicted)
것과 그분이 그들이 섬겼던 나라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분은
"그 후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고통스러운 수고의 끝이자
그들의 속박과 종살이에 대한 보상으로 애굽인들의 바로 그 전리품들을 고대하셨었던 것입니다.
<변경된 경로>: The
Route Changed:
둘째 날 여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를 따랐습니다. 그 길은 그들을 "광야의 가장자리(edge of the wilderness)"로 인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지중해 연안을 따라 올라가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 있습니다. 앞으로 몇 행진을 하면 그들은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의 영토를 통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로가 갑자기 변경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혹시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을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까지 가는데 있어서 왜 더 많은 여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의 시작을 하도록 고통을 당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 경로가 바뀌어서 그들이 삼일 째에 그들의 발걸음을 되돌려 그 바다의 이집트 쪽에서 남쪽으로 행진해야 했습니까?? 우리는 처음에는 이 질문에 당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갑자기 변경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숙고는 신성한 지혜를 신속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전체는 "그들이 광야 끝에 진을 쳤다" (출애굽기 13:20)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Divine Will)에 굴복해야(bend)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처음부터 최단 경로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것을 취하도록 허락하셨고 그들과 함께 지금까지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우리의 자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as He often does with us in our wilfulness). 그들은 "광야 끝"(출 13:20)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반성(reflection)이 나옵니다. 그 황량한 공간(expanse)을 볼 때 초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거주할 곳도 없는 사막을 지나며 터벅터벅 걷고, 목마르고, 굶주린 음울한 나날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사납고 단호한 궁지에 몰린 적들의 성벽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사막을 횡단한 후에 그 길을 강제로 통과해야 합니다. 다음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하라"(출 14:2)고 말씀하셨을 때 불평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왕(하나님을 말함)은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이 애굽 땅으로부터 불명예를 가지고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예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예정이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그것은 인간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구원은 그것의 충만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애굽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나가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떠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바뀝니다.
<홍해를 건너감>: Crossing
of the Red Sea:
이집트인들은
그 변화를 그들 자신의 파멸로 잘못 읽는 이기적인 탐욕과 잔인함(greed and cruelty)에 남겨져 있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하느니라" (출 14:3). 이집트에게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이 예상치 못한 (그들의) 약점의 노출인 것 같았습니다(이집트인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경된 경로, 즉, 그들이 속히 달아날 수 없는 불리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착각했다는 말임). (이집트인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더 이상 하나님(God)이 없었고 이집트는 이제 헐떡이는 거친 복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내가 추격하고
따라잡고 탈취물을 나누리라 그들로 말미암아 내 정욕이 만족하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출애굽기 15:9). 바로의 가슴에서 솟아났던 생각은 그의 백성의 가슴에서 응답하는 불처럼
타오르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이 그 백성들을 대적하여 돌이켜 가로되,
"어찌하여 우리가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느냐?" 모일 수 있는 모든 군대가 이 추격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출 14:6-9). 정교하게 훈련된 이집트의 상비군은 고대 세계의 경이로움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무서운 기계가 자기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 그들의 마음(hearts)을 사로잡았을 공포(terror)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출 14:10). 미치고 소망 없는 절망에 빠진 순간 그들은 그 언약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죽음처럼 보이는 이 장소로 인도한 것에 대해 모세에게 심하게 부르짖습니다(출애굽기 14:11-12). 그 때에 우리는 모세로부터,
두려워 말라 그 언약의 하나님이 그 날에 그들을 위하여 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믿음의 말씀(the
words of faith)을 듣습니다(출 14:13-16). 우리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the miracle-working God)께서 행하셨던 일을 주목해 봅시다. 모세에 대한 그분의 대답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언약의 사람인 그는 그들을 위해 이상한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애굽에
심판을 가져온 지팡이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백성을 위해 구원을 행하도록 자연의 힘에게 명령할
것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다를 물러가게 하시니
바다가 마른 땅이 되어 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로 들어가니라 바다 한가운데 마른 땅 위에 있게 하시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나니"
(출 14:21-22). 자연의 힘(forces)은 그분의
말씀(His Word)에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기적 앞에 서 있을 때 첫 사람이 하나님의 손의 역사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의 영역에서 걸었을 그 과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통치권은 타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이 자연의 힘을 지배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가 올 때까지, 이따금 옛 언약 아래에서 이와 같은 경우에서 그것(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과 같이 믿음의 사람들이 자연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봅니다.
<구름 기둥>: The
Pillar of Cloud:
우리는 이전 수업에서 아버지-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그분의 본성을 부여할 법적 권리를 갖기 전에는 아무도 실제로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 백성에게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줄 법적 권리가 없었습니다(주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됨). 우리는 자연인의 지식이 육체의 오감을 통해 얻는 지식에 제한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는 그들의 육체적 감각을 통해서만 그들에게 알려질 수 있습니다. 둘째 날에 나타난 구름 기둥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출 13:21-22). 그들은 구름을 볼 수 있었고, 밤 시간에 이 불타는 구름의 따뜻함을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구름 기둥은 그분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이 그들을 돌보시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강렬한 사막의 열기를 막아주는 묘한 보호막이 되었고, 밤에는 거대한 조명과 난방 시설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시원하고, 춥고 시린 밤에는 따뜻했습니다. 이 구름이 움직였을 때 그들은 진영을 떠나 여행을 떠날 때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멈췄을 때,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그들은 진을 치고 그분의 더 많은 인도를 기다려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구름은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그들과 함께 보호와 위로와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할 때에 이 이상한 구름이 그들 앞에 있던 자리를 떠나 그들의 뒤에 섰습니다. 그것은 이집트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사이에 섰습니다. 언약의 백성에게 그것은 빛과 따뜻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에게는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그 사막을 통한 행진>: The March through the Desert:
이제 이스라엘
역사의 다사다난한 기간이 시작됩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행진입니다. 시나이 반도는 오늘날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땅입니다. 다른 지역은 탐내고 싸워왔지만 고대나
현대 어느 강대국도 시나이를 소유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립되고 멸시받는 지역에
300만 명의 노예(종)들이 데려가집니다. 그들은 종의 영(slave spirit)을 가지고 있고 훈련되지 않았으며 비판과 쓰라림(criticism and bitterness)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그들은 출애굽하여 종노릇에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종의 의식을 갖고 행동했다는 말임). 이 곳에서 언약의 하나님은 자신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 노예 국가로부터 지도자와 교사가 있는 자유 백성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상 숭배와 분리되어 참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할 이 나라는 그분을 의지하여 걷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중대한 여정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시작하며, 이를 연구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행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물이 쓴 마라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동양에서 매우 유명한 나일강의 단물을 마시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치한 실망
속에서 그들은 모세에 대해 유치하고 억제되지 않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출 15:22-24).
언약의 하나님은 그들을 항상 돌보셔서 쓴 물을 달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애굽인의 질병이 그들에게 내리지 않게 하실 분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알리셨습니다(출
15:26-27). 피 언약(the blood-covenant)의 권리와 특권(rights and privileges)에서 그분의 모든 것은 이스라엘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ability)은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보살핌, 그분의 보호,
그분의 치유는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이 광야 기간 동안 그들이 언약 안에서 행하는
동안 아기, 어린이, 젊은 남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무도 질병의 능력때문에 미리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치유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학생 참고 사항>:
우리는 Urquhart의 New Biblical Guide와 Dr. Trumbull의 "Blood Covenant"에 대한 이들 수업에 있는 많은 자료에 대해
우리가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이 공과에서 다루는 읽기 자료는 출애굽기 12:43에서 출애굽기 15:27까지입니다.
<질문>: Questions:
1. 유월절 예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념이 되었던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2. 출애굽기 12:35-36을 설명하십시오.
3. 홍해를 건널 때 인간의 잃어버린 권위는 무엇이었습니까?
4. 왜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야 했습니까?
5.
Pillar of Cloud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켰습니까?
6. 이집트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을 인도하신 땅을 묘사하십시오.
7. 언약백성을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8. 마라(Marah)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하십시오.
9. 출애굽기 15:26-27을 설명하십시오. (출15:23,
24; 민33:8)
10. 피의 언약에 대한 지식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제12과. 율법과 성막: THE LAW AND THE TABERNACLE:
출애굽기 15:26에서 출애굽기 36장까지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원망하거나 반역할 때마다 그분은
구름 속에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재앙들이나 불뱀들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호가 보내질 수가
있고, 그것은 그들을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채우는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7. 그들은 엘림의 열두 샘 곁에 진을 쳤고 하나님의 손이 그들 위에
있었습니다. 마라에서는 물이 흉하다고 원망했지만 빵이 없다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집트를 떠날 때 풍부하게 공급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 여행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이 공급은 이제 종말이 왔습니다. 삼백만의 상태에 대한 발견은 곧 알려졌습니다(그들의 빈 상태가 드러났다는 말). 한 이웃이 다른 사람에게 빌리러 가면 다른 사람도 그 문제에 있어서 자신만큼 가난하다는 확인을 받게 될 것입니다(종전까지는 애굽에서 갖고 나왔던 것을 먹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먹을 것이 없었다는 말임). 이런 식으로 그들의 상태의 끔찍함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나를 주심>: The
Giving of the Manna:
앞으로 나아가면
그 운명을 확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후퇴하는 것도 똑같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애굽으로 되돌린다면 애굽의 경계에 도달하기 전에 멸망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고기 가마와
떡을 배불리 먹을 때에 너희가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을 주려 죽게 하려 하는도다” (출 16:2-3). 이제 이 백성이 하나님의 도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경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언약에 충실함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빵 공급의 실패는
알람을 울리는 일이었지만 기적적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그들을 구름으로 인도하셨고 쓴 물을 달게 하셨던 분은 빵을
쉽게 공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필요를 위해 그분께 나아왔다면 우리는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가졌을 것이며 그것이 언약의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반항적인 투덜거림을 터뜨렸습니다.
그들은 부끄럽게도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인 애굽에서 인도되어
나왔고 이제 남녀 노소가 죽을지도 모르는 이 무서운 광야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역으로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인하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불평과 그들의 불신앙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시어 그가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출 16:4-12). 출애굽기 16:13-36은
우리에게 빵과 고기를 보내는 것과 그것을 모으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40년 동안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유>: Reason for the Law: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둡니다. 출애굽기 19:1-8. 여행(journey) 3개월 만에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그들의 삶의 모든 단계를 지배할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They are still
spiritually dead, and a Law must be given to them that will govern every phase
of their lives).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모세는 그 산(the Mount)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언약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을 모세에게 복습하십니다(review).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분을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순종할지 안할지 여부를 알게해야 합니다. 이 석 달 동안 그들은 언약에서 그분의 역할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배웠습니다(출
19:8). 이스라엘은 순종할 것을 약속합니다. 출애굽기
19:9-25은 우리에게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 (manifestation)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 자신의 나타나심이 다시 그들의 육체적 감각의 수준에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들은 연기와 불을 볼 수 있었고 커져가는 그 나팔(the trumpet)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죽음 때문에 그 산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주어졌던 율법은 언약의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이 율법에서 나오는 세 가지 부분(divisions)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뜻(Will)을 표현하는 계명들(Commandments), 출애굽기
20:1-27;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생활(social life)을 지배하는(governing)
심판들(Judgments),
출애굽기 21:1-24; 종교적인 생활(religious life)을 지배하는 규례들(ordinances), 출
24:12-31. 율법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는 계명, 규례,
희생 제사(the Commandments,
the Ordinances, and the Sacrifices)입니다. 계명은 정죄(condemnation)와 죽음(death)의 사역(ministry)이었습니다(고후 3:7-9). 그들은 사람의 마음(heart) 안에서
다스렸던 영적 죽음을 드러냈습니다. 규례(or 의식)는 대제사장 안에서 여호와와 함께 하는 사람들(the people)의 한 대표자를 주었습니다.
희생 제사는 깨어진 율법과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을 위한 덮음(covering)을
주었습니다.
<율법의 수여>: Giving of the Law
삼중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최초로 출애굽기 20:1-17에 기록된 구두로(orally) 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직분과 제사를 위한 규정 없이 주어졌으며 심판(judgments)이 수반되었습니다(출 21:1-23). 히브리인과 함께
히브리인의 관계(relations)와 관련하여 세가지 연간 절기들(feasts)을 지키라는 지시(direction: 출애굽기 23:14-19)와 가나안의 정복을 위한 지침(출 24:3-8)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모세는 돌판(the Tables of Stone)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출 24:12-18). 그 산에서 모세는 성막, 제사장직, 제사 희생(the
Tabernacle, Priesthood and Sacrifices)에 관한 은혜로운 지침(instructions)을 받습니다(출 25:31). 한편 아론에 의해 인도받은 백성들은 첫 계명(the first Commandment)을 깨뜨립니다(break:
출 32장). 모세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그 돌판들(Tables)을 깨뜨립니다(출 31:18;
32:16-19). 셋째, 두 번째 돌판들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졌고 율법은 다시
여호와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출 34:1, 28, 29). 읽어야 할 성경구절: 로마서 3:21-27; 6:14-15; 갈라디아서 2:16; 3:10-14, 16-18, 24-26; 4:21-31; 히브리서
10:11-17.
<성막에 대한 이유>: The Reason for the Tabernacle:
출애굽기 25:8.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hearts)에 거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영생(Eternal
Life)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해석 주의: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인 것처럼 들림.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들을 예표하기 때문에, 그들, 즉, 그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분의 임재(Presence)는 그들의 육체적 감각에 나타나져야만 합니다(manifested). 그분에 대한 그들의 예배도 같은 수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분이 거하실 물리적 거처(physical dwelling place)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육체적인 제사장 직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성막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원하는 예물을 요구하셨습니다(출 25:2). 그들의 마음(hearts)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기꺼이 갖는 것이어야만 합니다(출 25:9).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대로 정확하게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었던 때부터 하나님은 그의 구속을 위해 일해 오셨었습니다. 이제 이 성막은 그리스도의 모형(type)과 그분이 인간을 위해 행하셨던 구속의 모형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부 사항은 그분의 정확한 패턴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매우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에 주목해 봅시다. 창조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 장(페이지)도 안 되는 장으로 우리에게 설명을 주셨지만
성막을 만드는 지침은 열한 장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조 사업이 성막 건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역사는 강력했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훨씬 더 강력한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하는데, 그것은 그 위에 무대를 세우는 역사,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속의 역사(the
work of our Redemption in Christ)였습니다. 한 극장에서 배우가 무대보다 더 영광스런 것처럼, 그 강력한 일을 수행했던 주인공은 그가 그
위에서 그것을 수행했던 무대보다 무한히 더욱 영광스럽습니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성막>: The Tabernacle, As It Stood among Them:
그 성막 집(Tabernacle proper)은 그 뜰(the court)의 서쪽 끝(the western end)을 향하고 있었습니다(성막 집은 성막 뜰의 반대편인 서쪽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말임). 그것은 길이가 52피트(15.8 미터), 너비가 17.5피트(5.3 미터), 높이가 17.5피트(5.3 미터)였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둘 중 더 큰 것을 성소(the Holy Place)라고 불렀습니다. 더 작은 것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입니다. 더 큰 성소에는 금 제단과 금 등잔대와 금상(the Golden Altar of Incense, the Golden Lampstand, and the Golden Table of Showbread)이 있었습니다. 더 작은 성소에는 법궤와 속죄소(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Mercy Seat)가 있었습니다. 성막이 세워졌을 때 보이는 유일한 덮개는 오소리 가죽(badger skins)으로 만든 바깥 덮개였으며 문 위에는 한 폭의 염소 털 휘장(curtain)이 있었습니다. 처음 64개의 휘장(curtain)은 세마포(fine linen)로 짰습니다. 파란색, 보라색, 흰색, 진홍색. 그 위에는 붉게 물들인 염소의 가죽이 있고 그 위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성막이 쉬고 있는 동안, 신성한 임재의 상징인 구름은 성막의 뒤쪽 끝에 쉬고 있었고, 그것은 진영(camp)을 덮는 거대한 우산과 같았습니다. 이 구름은 항상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이 행진할 때에 그것(구름)은 성막 꼭대기에서 일어나 하나님이 그들이 여행하기를 원하셨는 방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캠핑 땅에 이르렀을 때에 구름이 멈추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 구름은 그들에게 방향을 보여주었고, 얼마나 멀리 그들이 가야만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인도하였고, 또, 언제 그들이 진을 쳐야만 할지를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었기 때문에(해석 주의), 하나님은 그들의 육신의 감각에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했습니다. 그 뜰(the court)은 세마포 휘장 외벽을 받치고 있는 조각목 기둥 육십 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막은 비교적 작은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사람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실 수 있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장소가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It was designed to be a place where God could dwell with and meet Israel in the person of their High Priest). 그래서,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위한 그런 한 장소와 같은 강당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의 휘장과 덮개>: The Curtain and Coverings of the Tabernacle:
덮개와 커튼을 연구할 때 우리는 외부에서 시작합니다. 태버내클(성막)을 밖에서 보면 그 모습이 흥미롭지 않습니다. 매력이 없슴을 강조하듯 유려한 선이나 곡선이 없는 긴 상자 모양의 건물이었습니다. 보기 흉한 오소리 가죽이 그것을 외부에서 덮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양쪽에 금으로 입힌 널빤지가 일곱 가지 등잔대의 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아름다운 휘장과 청색, 자색, 홍색실의 그룹들이 수놓아진 천정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베일(the veil: 칸막이)이 있습니다. 우리 뒤에는 무지개의 모든 색조가 섞인 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소를 그 향기로 채우는 금 향단과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진설병(떡) 열두 덩이가 있는 금상이 있습니다. 이들 덮개(coverings)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다른 방면의 그림을 봅니다. 성막의 밖을 보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해달의 가죽 휘장으로 성막의 아름다움을 덮고 있습니다. 이사야 53:2. 그리스도는 자연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사람이 그분을 바랄 만한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과 공통적인 것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오소리의 가죽은 그분이 인간과 분리된 엄격함의 전형입니다. 자연적인 눈에는 그에게 제한과 심함(reserve and severity)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이해하거나 즐기는 것은 그들의 범위, 즉 인간의 범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4:44과 마태복음 16:17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소수의 사람(an inner few)만이 그분을 알았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실, 베실. 에스겔 16장 10절은 “내가 해달의 가죽으로 네 발을 신겼노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암시할 것입니다. 샌들은 땅에서 발을 보호하고 땅에서 분리시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셨고, 지상과 지옥에 있는 인간과 마귀의 모든 세력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그분을 이기거나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은 그분의 중보 사역인 그분이 흘리신 피의 전형입니다. 안쪽 휘장은 두 세트로 되어 있었는데, 한 세트에 다섯 장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50개의 청색 고리에 고정된 50개의 금 타치(taches)로 함께 고정되어 우리가 읽은 것처럼 하나의 성막을 형성했습니다. 청색 고리와 금 50타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게 해주는 하늘의 은혜와 신성한 에너지의 전형이었습니다. 이 커튼은 모두 한 척이었습니다. 미묘한 파란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참 사람이셨지만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한 사명에 대한 의식과 존엄성을 가지고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보라색은 그의 왕족의 전형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분은 정복자로서 천국에 영접되셨습니다(시편 2, 빌립보서 2:9-11). 진홍색은 그분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진홍색은 죽음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 그분의 성육신은 우리의 구속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합니다. 그분은 그분의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power)을 잡은 자를 소멸하시고 그(마귀)의 통치에서 사람을 건지셨습니다(히 2:14: By His death, He brought to naught him who had the power of death, and delivered man from his reign). 가늘게 꼰 세마포(linen)는 한 사람으로서 흠 없는 순결(purity)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y) 안에는 깊은 영적 진리들(truths)이 있습니다. 그분이 공의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분이 절대적으로 인간(human)이 되어야 되고, 동시에 한 사람(man)으로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야 하고 여전히 완벽한 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걸어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걸어야 했습니다. (성막 연구는 다음 공과에서 계속됩니다).
<질문>: Questions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2. 언약의 하나님은 그들의 양식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키셨습니까?
3.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연기와 불과 구름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성막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6. 재물은 어떻게 모아졌나요? 왜요?
7. 모세에게 주어진 정확한 모형에 따라 그것(성막)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오소리 가죽 덮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까?
9.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10. 안쪽 휘장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지 보여주십시오.
제13과. 성막(계속): THE TABERNACLE (Continued)
성문(The Gate): 출애굽기 27:16-19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그 문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하나님은 그 성막 건축에 관하여 모세에게 주셨던
그분의 지시(지침: instructions)를 그 문에서 마치십니다.
그분은 법궤와 그 속죄소에서 시작하여 이것들로부터 물두멍, 놋제단,
그리고 성문에 이르기까지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단하신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으며(complete)
그 완성된 작업과 함께 우리는 시작합니다. 우리가 뜰의 담장을 볼 때 눈에 띄는
것은 문입니다. 이 문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밖에 있고 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성한 길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분의 면전에서 몰아내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그분은 돌아가는 길을 제공하십니다.
그 뜰(court)에는 문이 오직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쪽이나 북쪽이나 서쪽 끝을 보면 끊어지지 않은 하나의 길게 펼쳐진 흰 리넨(linen: 세마포)이 우리의 시선과 마주할 것입니다. 단지 리넨(세마포
천)이었지만 입구에 강제로 진입하는 것은 확실한 파괴로 달려가는 것입니다(죽는 일이라는 말임). 세마포가 성소를 표시하기 위해 서 있었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합당한 길을
따라 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동편 끝에 이르러 문을 볼 때 우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문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과 요한복음 10:7-9을 읽으십시오.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든지 그 문(gate: 성막의 출입문)으로 들어와 제단에 그의 제물을 가져올 수 있지만
오직 제사장만 그 도어(door: 성소의 문)를 통해 성막(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구>: The
Furniture of the Tabernacle:
우리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시를 내리실 때 법궤에서 시작하여 놋 제단을 향해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에서 땅으로 오셨고, 그 다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만난, 십자가로 오셨고, 여기서, 그분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만나셨고 그 다음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지성소에 있었던 법궤로부터 성막 문 근처에 서 있던 놋 제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에서 십자가까지 걸어가신 길을 봅니다. 여기서 그분은 그 자신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과 동일시하셨고 그 다음 다시 그 아버지께로 돌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던 완전한 구속(complete Redemption)을 보여줍니다.
<놋 제단>: The Brazen Altar: (Altar of burnt offering)
출애굽기 27:1-8을 읽으십시오. 놋 제단을 주목합시다. 그것의 위치는 문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만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 재료는 놋쇠와 아카시아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는 썩지 않는 나무라고 합니다. 그것은 죄를 범하지 않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나무는 놋쇠로 덮여 있었습니다. 촛대, 분향단, 진설병 상, 법궤는 금으로 만들었지만 그 제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놋쇠(Brass)는 죄에 관해 말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떨어진 곳은 십자가의 제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At the Cross)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forsaken). 놋 제단(The Brazen Altar)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인간과의 동일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 보좌였던 속죄소로부터 제단까지 오셨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제단에 완전한 제물을 가져왔던 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God came from the Mercy Seat, which was the throne, to the Altar where He met the guilty Israelite who had, in his obedience to God's command, brought to the Altar a perfect sacrifice). 그 제물을 가져왔던 사람의 행동은 얼마나 표현력이 있었습니까!! “그는 그 염소의 머리에 그의 손을 놓을(안수할) 것이요” (레 4:24). 그것은, 그가 죽어 마땅했지만 하나님께서 대속물을 마련해 주셨다고 고백하면서, 그 자신을 그 희생제물과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That was identifying himself with the sacrifice, confessing that he deserved to die, but that God had provided a substitute). 그 불이 그 제물을 살랐기 때문에 죄인에게 내릴 심판이 전혀 없었고 그 제물을 가져왔던 사람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고 제단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 4:26)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모든 것과 동일시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놋쇠 물두멍: 대야>: The Brazen Laver: (or Bronze Basin)
출애굽기
30:17-21을 읽으십시오. 놋제단 너머에는 놋대야가 있었습니다. 이 물두멍도 놋쇠로 만들었으니 다시 죄를 말합니다. 그것은 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그 물로 그들의 손과 발로부터 저주받은 땅의 먼지를 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물로 씻어야 할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진설병 테이블>: The
Table of Shew Bread:
출애굽기 25장 23-30절을 읽으십시오. 성소 안에 열두 덩이의 떡을 가진 진설병의 테이블(상)이 있었습니다. 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10:17,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떡과 한 몸이니.” 우리는 빵
속의 밀과 같이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밀이 굽는 과정을 통해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을 근거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고, 하나님과 분리된 끔찍한 사흘 밤낮 동안 우리의 형벌을
지불하며 장사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심에서(In Crucifixion)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모습 그대로 봅니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모습 그대로 우리 자신을
봅니다. 로마서 6장 5~6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그와 연합되었으면,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그와 연합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앎으로, 그 죄의 몸은 멸하여 질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For if we have become united with Him in the likeness of His death,
we shall be also 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knowing this, that our
old man was crucified with Him,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that
so we should no longer be in bondage to sin). 그분은 생명의 빵(떡)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생명을 세상에 전하는 운반자가 됩니다.
<금 등잔대>: The
Golden Lampstand:
출애굽기
25:31-40을 읽으십시오. 성소 안에 있었던 이 금 등잔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양으로 그와 동일시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그의 몸과의 연합을 봅니다. 우리가 "그의 가지들"이라는 말을 읽을
때 중심 축이 등잔대이고 가지들이 거기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 장사, 부활과 동일시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등잔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그것을 주조하면, 비교적 쉽게 만들어졌을텐데,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망치질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의 구타 작업." 우리가 장인이
귀금속을 상하게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는 이사야 53장 5절의 성경구절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직 이 상함을
통해서만 등대의 가지들이 존재하게 될 수 있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영적 죽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오직 그분이 우리의 형벌을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절대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의 한 아들로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우리 대신에, 우리의 심판 아래 상함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It
was by His being bruised in our stead, under our judgment, that we are able to
take His place as a son of God before the Father).
<부활 계시>: Resurrection
Revealed:
이 등잔대에, 그가 그의 부활에 있어서 우리가 그분과 동일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 우리는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과일 꽃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어떤 열매를 택하실까요? 그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넓은 밭이 있었고
우리는 그분이 아몬드 나무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민수기 17장에는 아론의 지팡이의 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열한 개와 함께 밤새도록 여호와 앞에
두어졌습니다. 아침에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아몬드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분과의 연합으로 인해 열매를 맺는 가지들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살아 계신 분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찍히셨습니다.
. . 우리의 형벌이 지불될 때까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의 나뭇가지들이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된 큰 그릇을 두들겨 패는 것은 상당한 어려운 일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왜 스탠드와 나뭇가지를 분리하여 만들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그들을 조작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그 가지들은 줄기에 납땜될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의 참된 유형이 아닐 것입니다. 그 연합은
생명이 있고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조각의 금에서 ... 등잔대 전체가 두드려집니다. "순금으로 두드려 만든 하나의 작품." 금은 신성(Deity)의 상징(symbol)입니다. 우리는 제단과 물두멍이
놋쇠로 된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행동하셨을 때 그 위에 임했던 심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충만한 신성으로 일어나시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놋쇠는 그분이 죄가 되셨슴을 보여줍니다. 금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보완 자료>: from [Teaching from the Tabernacle] by
C. Sumner Wemp
<등잔대(램프 스탠드)에서의 빛>:
오래된 많은 저택과 성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웅장한 샹들리에였습니다. 이 화려한 천장고정물에 수천 달러가 사용되었지만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빛은 필수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서는 내부의 빛에 못지않게 중요성이 부여되었습니다.
등잔대의 그림:
등잔대(램프 스탠드: 금촛대)는 하나님이 지혜를 가지고 채우셨던 장인의 손으로 두드려진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출 31:1-11). 여섯(6)개의 가지가 주축의 측면에서 나왔습니다. 각 가지와 줄기는 꽃과 마디가 있고 끝에는 기름과 심지(wicks)를 담을 아몬드 모양의 대접이 있어 정교하게 쳐서 만들어졌습니다. 등잔대는 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졌습니다.
출애굽기 25:31-32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순금으로 촛대를 만들어라. 그의 축과 그의 가지들... 그리고 여섯 개의 가지가 그 축의 양 옆으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등잔대"의 모형에 대해 우리 자신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12에서 요한은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이때 보셨던 주 예수님은 그에게 이 환상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b절). 촛대(or 등잔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교회가 표현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측면에서 나오는 6개의 가지가 있는 하나의 주축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축으로, 교회는 가지로 대표됩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곳에서 포도나무로 묘사되며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가지입니다. 또는 그분은 머리이시며 우리는 머리와 영원히 연결된 몸입니다. 등잔대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또 다른 그림입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교회의 그림을 발견하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는 여러 가지 교회의 유형이 표시되거나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로서의 교회의 여러 유형이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삭의 신부, 리브가, 이집트의 요셉의 이방인 신부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당시 교회의 유형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이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유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아름답고 완전한 그림이 있습니다.
육(6)은 사람의 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연합된 사람들로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많은 지체이지만 몸이 적절하게 기능하려면 모두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등잔대의 가지는 스스로 성막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설 자격이 없습니다. 일(1)은 통일성, 신성, 주권의 수입니다. 단일 축은 성령의 거듭남과 역사로 우리가 연합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축과 가지가 합쳐져 완전한 숫자인 칠(7)이 되었습니다. 축이 있는 가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 안에서 충만해 졌으니" (골 2:10).
등잔대 계획:
"너는 순금으로 등대를 쳐 만들되… 그리고 그 가지들은…동일한 것(같은 축)에 연결되게 하라." 성막의 금은 신성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신성의 많은 부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축(자루)은 순금이었는데, 이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때문입니다(요 1: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니와"(요 14:9)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 육체로 나타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딤전 3:16). 성막 밖에 있는 놋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았고 이제 금에서 우리가 따를 영광을 봅니다”(벧전 1:11). 여기에 참된 신성이있습니다.
가지들은 동일한 것(동일한 축을 말함)으로 연결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신적인 것을 의미합니까? 적어도 지금은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4). 이것은 실제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본성, 욕망의 새로운 세트- 신의 본성으로부터 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가 살고 결코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 굴욕의 (천한) 몸에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오시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 우리는 본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온전하게 그분과 같을 것입니다. 그날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등잔대 제작 절차:
등잔대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습니까? "너는 그 등잔대를 두드려 만들되… 다 순금으로 두드려 만들라"(출 25:31, 36). 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빚었습니다. 우상 숭배적이고 사람이 고안한 것은 쉽고 빠르게 모양을 만들 수 있지만 등잔대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많은 노력으로 두들겨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 53:5).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느니라”(벧전 3:18). 구원은 거저 주어지지만 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 1:29).
우리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빚어지고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축(자루)처럼 "두들겨야"합니다. 아홉 꼬리 줄무늬가 아닐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것은 불을 통해, 어떤 것은 깊은 슬픔을 통해 우리를 형성하는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셨느니라"(신 8:2). 우리는 "한 번 두드린 일"에 속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축(샤프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한 번 두드린 일"에 있을 때 더 이상 주 예수께서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멸망할 수 없습니다.
등잔대의 목적:
등불은 "등잔대 위에 두어 그 앞을 비출 수 있도록" 켜져야 했습니다(출 25:37). 모든 등잔대에는 빛을 비추는 한 가지 주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등잔대의 축(shaft) 이신 그리스도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의 빛"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요 1:4). "빛(light)이 어둠 안에서 비치되 흑암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지금 우리가 뒤돌아보며 그분이 하나님과 영생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해 가져오신 빛의 불꽃을 볼 때, 그들이 그분의 기적과 생명을 보았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거나 붙잡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로 죽었다"(엡 2:5)고 말씀하실 때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하십니다. 그들의 생각(minds)은 사탄에 의해 눈멀었습니다(고후 3:14).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heart)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더라" (엡 4:18).
베드로가 말하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빛을 보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등잔대의) 주축은 그 끝에 그릇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가지도 그 끝에 그릇과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 대접에는 기름과 불을 밝히는 심지가 있었습니다. 기름은 성령의 한 유형입니다. 심지는 하나님을 위해 불타고 있는 각 신자의 삶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자신이 여기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가셨으므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는 그분의 말씀이 유효합니다. 세상에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구절에서 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 (v. 14b-15). 당신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십니까?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라는 것을 알았듯이, 사람들에 의한 주 예수님에 관한 인식과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낳음을 받았다"(요일 5:1)는 것을 우리의 삶과 행동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훈계는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빛나도록 허용해야 할 빛과 증거(testimony)를 갖고 있습니다. "부셸(bushel)" 아래에 두어 그것을 숨기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빛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한 그의 선행을 통해 비춥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마 6:1) 행한 일이 사람들의 칭찬을 위한 것이 아님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행해져야 합니다. 그의 동기는 순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동기를 아시고 그의 심판대에서 그 동기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3; 4:5).
지역 교회의 한 무리의 신자로서 당신도 증거(testimony)나 등잔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증거가 밝게 타지 않거나 죄로 인해 여러분의 회중(assembly)에서 "하나님의 등불"(삼상 3:3)이 꺼지면 하나님이 당신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것입니다(계 2:5).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슬프게도 한때 부흥의 불이 타오르고 하나님의 빛이 빛났던 많은 교회들이 이제는 "영광이 떠났다"는 뜻의 "이가봇" (Ichabod)이 그 위에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았는지 알아보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 2:4-5)는 옛날 방식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어두운 데서 그의 기이한 빛에" (벧전 2:9) 인도된 사람 없이 몇 주 동안 계속할 수 있다면 진정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연민으로 보여야 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 너희가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 2:15-16).
(불을 밝히는 계획):
"등잔(등불: lamps) 일곱을 만들어 그 등잔대 위에 두어 그 앞을 비추게 할 것이요" (출 25:37).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그들(제사장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6-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보이실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 등불을 밝힙니다. 설교와 권면으로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날마다 서로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히 3:13) 사람의 삶에 불을 붙입니다.
개인은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책임이 있습니다(약 4:8). 이사야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나이다"
(사 64:7)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때는 참으로 슬픈 날이었습니다. 그 때의 필요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에서 떨쳐나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6).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라"
(고전 15:34).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이러한 훈계는 그분이 어려운 길로 우리를 징계하시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권면합니다.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램프 준비:
"그 부젓가락과 불똥 그릇은 순금으로 할 것이요"(출 25:38). 불집게는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심지를 자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있는 트리니티 침례 교회의 밥 그레이 목사는 “스너프접시들” 이나 "상자들"이 불탄 심지들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리고 아마도 하늘에 있는 참 장막에서 하나님은 그분 앞에서 특별한 기념을 위해 그것들을 보관하고 계시다고 제안합니다. 참새가 하나님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사람은 특별한 주목이 취해지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위해 결코 타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멀리 떨어져서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않고, 희생적으로살고, 하나님을 위해 불타면서, "스너프접시들"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심지들은 땅에 던져지지 않고 금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손질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보살핌으로 금집게로 이루어집니다.
이제 심지(wick)는 보이지 않고 불을 빛나도록 하기 위해 태울 뿐입니다. 불이 꺼질 때 심지가 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삶에서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불타고 있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보입니다. 우리의 빛이 비쳐서 사람들이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를 영화롭게 할 때 우리는 배를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빛, 우리의 증거는 사라졌고 그 보상은 하나님의 칭찬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입니다.
그 빛의 원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등불을 항상 켜 놓을 수 있도록 감람으로 찧은 순결한 기름”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7:20). 그 등잔대는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을 태울 기름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지는 기름 없이는 빛을 발하지 못하므로 기름은 무엇보다 필수적이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만일 개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그리스도를 위해 비추이는 빛을 가져야만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그분(성령)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봅니다. 제자들은 그 오순절 날(the day of Pentecost)까지 연약했었는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이 권능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성령 충만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잔치할 때 금식했고, 우리가 놀 때 기도했고, 너무 자주 우리가 미워하는 영이나 부주의한 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등불을 태우는 것은 기름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교회나 우리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위해 삶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책임은 등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복음의 "보물"이 담긴 그릇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고후 4:7), 공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우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8)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심지를 가질 수 있었지만 기름 없이는 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훈련과 재능과 노력은 기름인 성령 없이는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교회로서 우리의 증거는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허용되어 "등불이 타게 할" 때만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등불을 위하여 감람나무를 찧은 순결한 기름을 네게 가져오게 하여 등불을 항상 켜게 하라"(출 27:20). 등불을 밝히는 데 분명히 기름이 필수적이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기름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이므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명령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성령을 완전히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행하시는 그분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육체의 욕망을 너무 많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이 명령을 성령께 굴복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반역이요 죄입니다.
(깨끗한 기름):
출애굽기 27:20에서 그것이 순수한 기름, 즉 히브리어로 깨끗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빛이 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불순물이 없어야 했습니다. 섞이지 않고 순수한 기름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위해 빛나고자 한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불순물이 우리 삶에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불순함은 그렇게 지명된 그분을 슬프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평강과 임재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소위 작은 일을 그들의 삶에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사이에 있는 모든 시기, 질투, 다툼, 미움으로 인해 일반 교회에 힘이 거의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은 신자를 통하여 죄인을 회심시키는 대신에 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역사하셔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자백하였을 때 하나님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구했습니다(시 51:12). 하나님의 자녀일 때 알았던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도 성령을 근심케 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기름의 연속적으로 탐:
기름은 "등불을 항상 켜두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불타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등불이 어느 날 밝게 타다가 다음 날 꺼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시대에 여호와의 성전에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훈계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에 대해 가졌을 수 있는 어떤 충동, 갈망 또는 욕망을 하나님은 거기에 두시고 우리가 응답하고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께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단 하나의 소망이라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신성한 일입니까!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증거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기에 두셨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 욕망을 꺼뜨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롬 3:11). 당신이 처음 그리스도께 왔을 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그분께 오는 것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 소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문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마저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소망을 주셨는데 우리가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성령을 소멸한다면 우리는 그 소망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엄숙하고 엄숙한 사실입니다.
(램프의 지속적인 충전):
램프를 한 번 채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출 2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이 처음 세워졌을 때 틀림없이 그들은 등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등불을 내버려 두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침 저녁으로 등불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번에 빛을 계속 태우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이 필요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라는 신약 용어를 서로 혼동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나쁜 것은 표현을 놓고 다투다가 성령 충만의 체험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섬김을 위해 믿는 자의 삶에서 가능하게 하고 활력을 주며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삼손처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을 모르고 힘없이 나가 패배를 당합니다(삿 16:20-21). 우리의 빛이 빛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령 충만(a continuous filling of the Holy Spirit)이 있어야 합니다. (발췌: 성막으로부터의 가르침 by C. Sumner Wemp)
<분향단>: The
Altar of Incense:
휘장 앞 성소에는
금으로 된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그 단어, "단"은 도살하는 장소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제물이 드려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놋 제단과 물두멍이 그리스도의 우리의 영적 죽음과의 동일시를 나타내고, 진설병
상과 금 등잔대가 부활 안에서 우리의 그분과의 동일시를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we saw the Brazen Altar and
the Laver showed forth Christ's identification with our spiritual death, and
that the Table of Shew Bread and Golden Lampstand show our identification with
Him in Resurrection). 이제 이 분향단은 그분이 아버지께로 승천하는 것을 말합니다(참조: 분향단은 기본적으로 제사장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기도의 향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단을 말합니다: 계 5:8; 8:3-4: 성도들의 기도의 향이 분향로에 담겨 천사의 손에 의해 하나님 앞으로 올려짐). 그 단은 흘려지셨던 그분의 피를 암시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얻으시면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피로
하신 일입니다. 그 단의 재료들은 그분의 인격(person)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금은 그분의 신성을
선포합니다. 그 나무(wood)는 그의 인성(humanity)을 다시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한 사람이 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딤전 2:5).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 한 사람으로서 하늘에서
우리의 소송사건(cause: or 돌봄)을 중재하고 유지하고 계시다는 진리를 상기합니다.
<언약궤>: The
Ark of the Covenant:
출애굽기
25:10-22. 속죄소는 법궤의 덮개를 이루었습니다. 양쪽 끝에는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는 케루빔(Cherubim)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24-25절에 “하나님이 화목제물(propitiation)로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 라고 했습니다. 칠십인역(the Septuagint)에서 "화목제물(propitiation)"로 번역된 단어는 "속죄소(mercy seat)"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속죄소로 세우신 분" 이라고 읽을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속죄소가 될 수 있습니까?" 레위기 16장은 우리에게
속죄일에 대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그 날에 염소 두 마리가 여호와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 염소 중 하나는 희생 염소(scape
goat)였습니다. 아론에 의해 그것에 대해 회중의 죄들이 자백되고 나서 그것이
광야 사람 없는 곳으로 보내어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특히 해야
할 일은 다른 염소입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위하여" 라고 했습니다. 속죄염소가 대속(Substitution)을 말했다면 이 염소는 화목(Propitiation:
화해)을 말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정죄받은 인류를 은혜로 다루실 수 있는 근거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속죄소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염소,
즉, 화해에 관해 말한 염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것입니다(We
shall look at what was done with the goat which was for the Lord, or the one
which spoke of Propitiation). 그것은 죽임을 당한 다음 그 피의 일부가 지성소로 옮겨져 그 (대)제사장에
의해 속죄소(은혜의 보좌) 위에 일곱 번 뿌려졌습니다. 우리가 (그것이) 진영 밖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죽으신 주 예수를 예표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 염소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그 제사장의 예표에 대해 어떤 대답을 갖습니다. 속죄소
위에 있는 케루빔의 태도에는 매우 암시적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룹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우리의 첫 조상이 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케루빔이 화염검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이지만 이 장면에는 검이 없으며 "바깥에 머무르시오(Keep away)"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의 시선이 대제사장이 거기에 넣은 핏자국의
의미를 읽고 싶어하는 것처럼 속죄소를 바라보고 있음을 봅니다. 그 핏자국은 어떻게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속죄소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그 피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의 죽음으로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실 자의 피의 모형을 보셨습니다.
그 피 때문에 그분은 대제사장의 인격으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심판을 받아야 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었습니다.
법이 어디에 있는지 주목하는 것이 가장 유익합니다. "그리고 속죄소를
궤 위에 놓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그 궤 안에 두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그 율법은 정죄만 할 수 있는데, 그 위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의로운 일을 생각나게 하는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그 문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징합니까?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의 어떤 큰 특징이 성막 기구의 일반적인 계획으로 예표됩니까?
3. 놋 제단과 물두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진설병(Shew Bread)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했습니까?
5. 금 등잔대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 드러냈습니까?
6. 그것은 그분의 부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여 주었습니까?
7. 법궤의 어느 부분이 속죄소였습니까?
8. 왜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속죄소가 될 수 있었습니까?
9. 케루빔의 태도는 무엇을 암시했습니까?
10. 법궤에 율법이 들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14과. 제사장직: THE PRIESTHOOD:
성막과 그것의 기구들(vessels), 그리고 제사장 직분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역들은 비록 우리가 각 부분을 숙고하기 위해 그것을 나눌지라도, 단 하나의 주제를 형성했습니다(실제 그 주제가 하나라는 말임). 그 성막은 그것의 기구들(vessels: 그릇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그릇들을 가진 성막이 성소 안에서 다양한 거룩한 그릇들 주변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는 하나의 살아 있는 제사장들 가족이 없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보자들(mediators)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8장은 우리에게 그 율법에 따라 예물(gifts)을 드렸던(offered) 제사장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example)과 그림자(shadow)를 섬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28:1은 제사장 가족에 관하여 모세에게 주어진 지시(instructions: 가르침)를 우리에게 줍니다. 모세와 그의 아들들은 율법 아래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그것 아래에서 제사장의 어떤 직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 중보자의 직분은 물론, 모세의 지도력(leadership)이나 왕권(kingship)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만 국한되었던(confined) 제사장직분(제사장직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만 주어졌슴)과는 별도로 그(모세) 안에서 유지되었습니다. 즉, 이들(제사장직) 지위(dignity)는 (모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한 서신(히브리서)은 주 그리스도(the Lord Christ)를 그분의 부활안에서, 주님, 중보자, 사도, 보증인, 대장, 목자의 다양한 직분과 지위를 그 자신 안에 결합하여 가리킵니다(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그토록 다양하다는 말임). (2) 첫 번째 구절의 표현은 놀랍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서 섬기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제사장 직분에서 하나의 사역만을 구성했지만, 그는 그의 아들들이 그와 함께 직분이 맡겨지지 않았다면 그의 사역(service)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안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집의 제사장 직분에서 그 연합(the union)에 대한 암시(intimation)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제사장 직분의 한 가지 큰 목적이 그분이 그분의 집에 관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히브리서 3:1-7). (3) 율법 아래에서 대제사장은, 무지하고 그 법에서 벗어난 자들에 관해 동정심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스스로 안에서 연약함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대제사장)이 죄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그 제사장 직분을 위한 하나의 자격(qualifications)이었습니다(히 5:1-5). 주 예수님은 인간의 삶(human life)을 통해 제사장 직분을 위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perfected). 그는 우리가 그런 것과 같이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으니 그러므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분이 원수의 무서운 속삭임을 견디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영혼을 거룩한 혐오감으로 가득 채웠고 그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사탄의 공격에 종속된 우리를 위해 긍휼함을 느끼도록 가르쳤습니다(히 4:14-16). (4) 레위 집의 제사장들은 맹세가 없이 만들어졌고, 결과적으로 그들 중 일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리의 가계의 경우처럼 제사장 직분에서 끊어졌습니다(cut off). 주 예수님은 하나의 맹세(oath)와 함께 제사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치 아니하시리니" (히 7:21; 시 110:4).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의 불변성은 주 예수를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 세우셨습니다(히 7:20-25). 히브리서 7:11-17, 아론은 육신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 곧 영광스럽고 영원한 부활의 능력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죽음에서 얻은 생명과 죽음에 대해 그분의 승리를 나타나게 만드는 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constituted).
<대제사장의 의복>: Garments of the High Priest:
이제 출애굽기 28장 4절로 진행합시다.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수놓은 속옷과 관과 띠라..." 이것이 없으면
아론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 직분과 관련된 다양한 권한,
책임 및 자질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성막의 일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은 대제사장의 기능과 자질을 나타냅니다. 재료는 금과 세마포로 짰습니다.
나머지 청색, 자색, 홍색은 고운 세마포 위에
장식을 달았고 모든 곳에 금을 엮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출애굽기
39:3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금을 얇게 쳐서 실을 만들고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에 공교히 짜고.” 남성다움(manhood)의 다양한 단계는 색상으로 대표됩니다. 금은 그분의 신성을 나타냈습니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개별적(distinct)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인성과 신성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연합(union)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과 신성 사이에는 신비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쉽게 그분의 인간 능력의 영역에서 그분의 신성의 영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나
다른 것에서(within one or the other) 동등하게 용이했습니다(at home).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분은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으로 보였습니다. 대제사장의 의복(robe)인 에봇은 견갑과 흉패(the shoulder pieces and the breastplate)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깨의 힘과 마음(heart)의 애정은 그가 대표하셨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바쳐졌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힘과 무한한 사랑은 계속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주를 지탱하는
어깨는 그분의 몸에서 가장 약한 지체를 지탱해 줍니다.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면전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머물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공급(provision)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급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15-29과 출애굽기 39:8-21은 보석에
새겨진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흉패에 대해 말합니다. 보석의 독특한 우수성은 빛이 강할수록
더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부여한 위치에 속한 감소되지 않는 광택과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신성한 임재 안에 유지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무엇이든 그들의 이름은 그분 앞에서
빛났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아무도 뽑을 수 없는 곳에 두셨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광채를 흐리게 하기 위해 성소(the Holy place)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각 지파마다 그것의 자리(place)와 그것 자체의 돌(stone)을 가졌습니다. 각 돌에는 고유한 영광과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지 않고 서로 달랐습니다. 그리고 각자 하나님 앞에서 정해진 자리를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열등성을 포함함 없이 다양성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이 침입하지 않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각자는 그 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확대시킬 책임을 갖습니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그 몸은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바로 그 광채로 빛을 냅니다.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의와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양의 그 위대한 목자이신 그분은 양 떼 중 가장 연약한
양을 어깨와 마음에 짊어지시고 마침내 아버지 앞에 흠 없고 비난이 없는(faultless, without blame) 모습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올 때 구속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대제사장의 어깨에 지금 대표적으로 올려져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기념>: The
Memorial:
출애굽기 28:12, “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니라.” 이스라엘은 "기념"이라는 단어가 특이하게 붙은 하나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 . 유월절. "이 날을 너희가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13:9).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두 가지 변함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된 것과, 또, 대제사장의 어깨 위에 있는 (주님 앞에서의) 보석의 광채와 영광을 그들이 영접한 것(acceptance)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두 가지 기념(memorials)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하여 흑암의 왕국으로부터 우리가 절대적으로 구속된 것(골로새서 1:13)과 또,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모든 영광과 의(righteousness) 안에서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유 1:24). 아론이, 이스라엘이 그분 앞에 받아들여진 곳에 서서, 여호와께 사랑과 완전함을 일깨워 주지 않고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그분 앞으로 인도하시는 위대한 대제사장 안에서 그분 앞에서 변함없는 기념(memorials: 기념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의로움이요, 우리의 성화요, 우리의 구속이십니다(참고: 고전 1:30).
<우림과 둠밈>: The Urim and Thummim
출애굽기
28:30. 흉패는 에봇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우림과 둠밈(The Urim and Thummim)을 넣은 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두겹으로 했거나 접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중요한 이름을 가진 보석이었습니다. 우림은 "빛"을 의미하고 둠밈은 "완전함(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흉패의 이 신비한 내용물은 우리의 생각(thoughts)을 모든 빛과 완전함, 모든 은혜와 진리, 모든 자비와
의를 담고 계신 주 예수님의 마음(heart)으로 향하게(direct)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5장
13절에서 "나타내는 것마다 빛이니라" 고 말합니다. 가슴받이에 우림이 있는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려 주십니다. 그는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없으시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골든벨과 석류>: The
Golden Bells and Pomegranates:
출애굽기
28:33-35. 옷자락 둘레에는 청색, 자색, 홍색 세 가지 석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석류와
번갈아 가며 순금으로 된 방울이 있었습니다. 이 천상의 장신구는 땅에서 모은 열매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자신이 세상에서 왔다고 선포하고 땅을 걸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석류는 특히 성지의 과일로 언급됩니다. 석류 두 개 사이에는 금종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금빛 소리는 풍성하고 즙이 많은 열매와 연결되어 있었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다가갈
때 그의 발걸음은 하늘의 선율을 내보냈고, 그가 영광의 임재로부터 진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물러서는
발걸음은 이상한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들은 지성소에서 그분의 천상 행보를 선포했습니다. 대제사장이 그분에게 다가갔을 때, 비록 그가 세속적이고 혼란스러운 소란 속에서 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이 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셔야만 했습니다. 그의 행보는 비록 이러한 죄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열매를 존중해야 하며 지상의 야망이나 영광이나 번영과 관련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에서 물러나는 그의 발걸음은 같은 진리를 말해야 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늘에서 온 발자취를 남기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관>: Mitre
출애굽기 29:39
및 출애굽기 39:28 "관(Mitre: 두건: 머리띠)"이라는 단어는 대제사장의 머리 장식으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구르다" 또는 "감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아마도 대제사장의 관이 그의 머리에 감겨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의 머리를 덮고 있는 관은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소명을 잊지 않고 성막에서 보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만든 희고 가는 세마포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야 할 의와 순결의 상징입니다.
<골든 플레이트: 금판>: The
Golden Plate:
출애굽기
28:36-38 및 출애굽기 39:30-31: 금판은 관 앞에 묘사되어 있는데, 관의 목적은 대제사장이 주님 앞에서 이 금판을 착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금판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이 깊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님 앞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는지. 그것을
감당할 권리를 홀로 가지신 분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 . 진정한 대제사장. 이마는 특히 목적(purpose), 의지(will) 및
마인드(mind: 정신: 혼)로 묘사되는 인간의 얼굴(countenance) 부분입니다. 그분의 지상 봉사 기간 내내 여호와께 성결(거룩함)이 그리스도의 마인드(생각: 정신)의 지배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아론은 그의 이마에 있는 거룩한 면류관에 새겨진 여호와께만 성결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께 성결이십니다. 아론은 오직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섰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서실 뿐 아니라 그들은 그의 삶에서 그분과 연합합니다.
<질문>: Questions
1. 왜 제사장직이 필요했습니끼?
2. 구약의 대제사장과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 또는 유사점을 적어도 세 가지 제시하십시오.
3. 제사장의 옷은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4. 히브리서 7:11-17을 설명하십시오.
5. (a)
보석의 이름과 함께 흉패의 의미를 말하십시오. (b)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어떤
진리가 여기에 계시됩니까?
6. 이스라엘의 두 가지 기념물은 무엇이었습니까?
7. 그들에 상응하는 어떤 두 기념물이 있습니까?
8. 우림과 둠밈을 설명하십시오.
9. 금종과 석류는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10. 대제사장의 머리에 있는 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15과. 제사: OFFERING
<제사장의 의복>: The
Priest's Garments:
출애굽기 39:27; 28:31-34 "외투(Coat)"라고 불리는 대제사장의 의복 부분은 더 적절하게는 튜닉(tunic)이었습니다. 그것은 "덮다"또는 "숨기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겉옷은 분명히 대표적인 성격을 띱니다. 즉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감당했습니다(bore). 옷자락에 둘린 석류는 그 백성이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언더 튜닉에서는 분명히 사람들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제사장의 개인적인 옷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atonement)였습니다. 고운 흰 세마포 코트는 그 의(righteousness)에 관하여 예표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커버되었습니다(그가 세마포 옷으로 덮여서 의롭게 되었다는 말임).
<거들>: The Girdle
출애굽기 28:4;
39:5: 거들(허리띠)의 목적은 서비스(사역)를 위해 허리(loins)를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의 지상 사역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지옥의 모든 세력들이 흔들 수 없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열심으로 그 자신을 두르셨습니다.
<제사들>: Offerings
두 가지 구별된
종류의 제사(오퍼링)가 있습니다. 한 유형은 대 속죄일과 관련된 제사를 포함합니다(레위기 16장). 다른 유형은 레위기
1-4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제사들 중 처음 세개와, 깨어진 교제(Broken
Fellowship)를 위한 나머지 두개 제사를 포함합니다(레위기 4-7장). 처음 세가지 제사는 교제(fellowship)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조의 이유가 교제를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의 부르짖음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영적 죽음이,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에게 그들 가운데 거하실 성막을 지으라고 요청하실 때 다시 나타나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부분에서 교제를 위한 열망을 봅니다. 그분은 그들이 아론의 제사장직과 제사를 통해 그분께 접근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다섯 개의 제사 중 처음 세 개는 예배 또는 교제 제사들(Worship or Fellowship offerings)이었고 마지막
두 개는 깨어진 교제 제사들(Broken Fellowship offerings)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경우 모두 그 목적(object)이 교제였다는 것을 봅니다. (레위기의 다섯가지 제사 도표 참조 요망: 아래의 도표 위를 한번 클릭하셔서, 도표를 좀더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전체(전) 번제>: Whole
Burnt Offering:
레위기 1장. 번제에 관한 법 - 레위기 6:8-13을 읽으십시오: 전체(전) 번제는 순전히 화목제(Fellowship Offering)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제사(Love offering)였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해 드려졌습니다. 그것은 회막(만남의 천막) 문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 사람은 헌물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위해 속죄할(make an atonement) 제물과 그를 동일시했습니다(레위기 1:34).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은 먼저 그를 위한 덮개(a covering: 죄를 덮는 것을 말함)가 마련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레위기 1:5-9. 그 사람이 제물을 가져다가 죽이고 각을 뜨고(조각으로 자르고) 제사장들은 놋 번제단(Brazen Altar) 주변에 피를 뿌립니다. 그는 대속죄일을 근거로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여기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제사장들만이 관여합니다. 내장(innards)과 발을 씻습니다. 발이 저주받은 땅에 닿았고 저주받은 땅의 열매가 내장에 가득 찼습니다. 제물에 삼중적인 심판(a threefold judgment)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을 명령한 사람은 그것이 흠이 없는지 알아보려고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제사장이 그것을 살펴보았고 하나님도 그것을 살펴보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번제)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는 율법으로 심문을 받았고 흠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He was examined by the Law and found faultless). 그분은 그분 자신을 제물로 드렸던(offered Him) 그 제사장직에 의해 조사를 받았고 흠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그 당시의 제사장들)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무런 결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고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흠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여러 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외쳤습니다(cried).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어떤 흠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이 오나니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나니" (요 14:30: 사탄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권세도 가지지 않았고 어떤 영향도 끼칠 수도 없다는 말임.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임).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예수님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말임). 이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눈에는 물론 예수님 자신의 눈에도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레위기 1:9. 그것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기 위하여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달콤한 향기의 교제였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것(그의 희생)이 사람에게 의를 회복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신 것을 기뻐하셨더라."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분이 고난 당하는 것을 기꺼이 하게 하였고, 그분의 아들이 고난 당하는 것을 기꺼이 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사람은 아들됨의 권리(the right of Sonship)를 다시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소제>: The Meal Offering:
레위기 2장: 이 제사, 역시,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 즉, 자원하는 제사(free-will offering)였습니다. 예배자는 훌륭한 식사가 담긴 대야를 가져와야 합니다. 조잡하고 보기 흉한 모든 것은 제거됩니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그의 몸인 교회의 아름다운 예표입니다. 기름이 그 위에 부어졌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기름(oil)을 부으시는 것(anointing)의 예표입니다. 그것은 기름안에 담겨졌습니다(soaked). 그분은 측량하여(by measure)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다(성령을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말임). 그 위에 유향(frankincense)이 얹혀졌습니다. 예배자는 소제를 제사장에게 가져왔습니다. (여기에는 대제사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한 움큼의 소제물을 모든 유향과 함께 가져다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것은 불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여호와께 달콤한 맛입니다. 유향은 예배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이 여호와께 드린 몫과 함께 불살라졌습니다. 그분은 예배(Worship)와 사랑(Love)과 경배(Adoration)를 모두 받으셨습니다. 소제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성(humanity)을 봅니다. 그 성육신은 기름과 함께 섞인 좋은 소제(the fine meal)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는 많은 소금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모든 대화에서 그분의 놀라운 지혜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방종의 전형인 꿀이 없었습니다. 누룩도 없었고 거짓 메모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사람들의 무지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진정한 대변자이십니다(the true Spokesman from God). 그분은 모든 유향(Frankincense)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영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유향의 향기를 내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남았던 것은 성소에서 제사장에 의해서 섭취되어야만 했습니다. 이 소제는 우리가 말씀을 먹는 것의 예표입니다(This meal is a type of our feeding upon the Word).
<화목제의 법>: Law of Peace Offering
레위기 3장; 7:11-36: 화목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분과의 교제를 위해 만드신 은혜로운 공급(provision)을 봅니다. 화목제는 다른 유형의 교제(Fellowship)입니다. 소제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분깃(portion: 몫)을 갖고 제사장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분깃(몫)을 갖습니다. 화목제에서 예배자는 또한 자신의 몫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동물의 모든 기름을 가집니다. 제사장과 그의 가족, 예배자는 가족과 함께 각자의 몫을 가집니다. 우리는 여기에 일종의 교제(Fellowship)가 있습니다. 바깥뜰에서는(inside the Outer Court), 여호와께서 자기 몫을 받으셨던 동안(하나님께서 그들의 화목 제사를 받으신 후에는), 제사장과 그의 가족이, 그리고, 예배자와 그의 가족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먹는 것은 보다 높은 수준(order)의 교제(Fellowship)의 한 형태입니다. 적 앞에서 음식을 먹고 즐길 수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먹는 것"은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사람과 함께 그들의 집을 만들 때, 사람과 그들 사이의 교제를 나타내는 예표로 사용됩니다("eating" is used as a type to show forth the Fellowship between the Father and Christ with man as they make their home with him). 이스라엘의 예배는 육체적 감각의 수준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교제 또한 같은 수준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그의 언약의 하나님께 그의 감사(his thanksgiving)를 표현하기를 원할 때만 교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ungrateful) 사람들은 아마도 자원 예물(Freewill offerings)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이 독재자가 아니었음을 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모세 앞에서 언약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석 달 동안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들이 그분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분과 함께 걸을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the permission of choosing)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출애굽기 19:3-9). 출애굽기 24:1-8. 언약의 율법이 실제로 발효되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그것을 승인했습니다(ratified). 하나님이 율법을 모세에게 구두로 주셨고 모세는 그것을 백성에게 주었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헌물로 만들어져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화목제에서도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드려야 했습니다. 화목제의 교제는 하나님과 제사장과 사람 사이의 삼중적 교제(Fellowship)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제(Fellowship)의 한 예표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합니다(요일 1:3). 우리는 또한 서로 교제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The Sin Offering and the Trespass Offering
레위기 5장과 6장: 속죄제와 속건제의 목적은 교제를 유지하는 것(to maintain Fellowship)이었습니다. 속죄 제사(Sin
Offering)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나 통치자나 일반 백성이 여호와께 직접 죄를 지었을 때 바쳐졌습니다. 레위기 6:1-2은 어떤 보증금이나 담보물이나 도둑질 때문에 이웃을 속이는 것,
또는 재산 손실이나 거짓 맹세와 관련하여 이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속건 제사(Trespass
Offering)는 그 자신의 이웃을 직접적으로 대적했을 때 바쳐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다섯 가지 화목제사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1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속죄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5장과 6장을 읽으십시오.
<나답과 아비후의 죄>: The Sin of Nadah and Abihu:
레위기 10장: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죽었고 속죄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레위기 10장 1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해석 주의: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했다고 단언하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으므로, 그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봄). 언약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의 교제를 원하셨지만 그들의 영적 죽음의 상태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해서만 그분께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해석 주의: 앞 부분과 같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임). 영적으로 죽은 사람(여기서는, 제사장을 지칭함)이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해석 주의: 저자는, 당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단언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제사장을 두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영적으로 죽은 제사장이 그 당시 성막에서 어떻게 죄인의 중보자의 역할을 계속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아론과 모세도 영적으로 죽은 자에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에, 그러한 주장은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축복이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였습니다. 제사장 직분을 봉헌한 후에 여호와의 영광이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레 8, 9장). 이제 아론의 가족에게 비극이 닥쳤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감히 초대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여호와께 접근했지만(레 10:1) 그들은 그들을 삼키는 불에 치였습니다(레 10:2). 이스라엘은 그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질문>: Questions
1. 그 겉옷(the
coat)은 대제사장의 속죄의 필요성을 어떻게 드러냈습니까?
2. 그 띠(girdle)는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까?
3. 구별되는 두 가지 유형의 제사는 무엇이었습니까?
4. 다섯 가지 화목제사들의 이름을 지정하십시오.
5. 온전한 번제에 가해진 삼중 심판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까?
6. 소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7. 화목제는 어떻게 교제의 수단이 되었습니까?
8. 속죄제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9. 속건제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10. 나답과 아비후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제16과. 대 속죄일: THE GREAT DAY OF ATONEMENT: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에 대한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대속죄일은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레위기 16장을 아주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대속죄일의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속죄제사(sin offering)를 위해 수송아지가 죽임을 당합니다. 대제사장은 피 대야를 물두멍까지 가져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몸을 씻고 흰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다시 한 번 그 (피) 대야를 가져다가 성소로 옮깁니다. 그곳에서 그는 활활 타는 숯불이 가득 담긴 향로(censer)를 가져다가, 그 위에 향기로운 향(sweet incense)을 한 움큼 얹습니다. 타오르는 향에서 나오는 연기(smoke)가 성소를 가득 채웁니다. 이제 그는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무거운 휘장(curtain)을 뒤로 밀고 향 구름 속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립니다. 당신은 속죄(Atonement)라는 단어가 "덮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운반했던 피로 속죄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향 연기 아래 있었습니다. 이 희생(sacrifice: 제사)은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spiritually-dead Israel)을 덮기 위해 1년에 한 번 바쳐졌습니다(해석 주의: 앞 단원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단언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슴. 왜냐하면,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았고, 마귀의 상징인 애굽의 바로왕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고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함을 받으며 천국의 상징인 가나안 땅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속죄일에 있어서, 그들은, 죄로 인해 끊긴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속죄제사를 드려야만 했다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대제사장 아론)는 지성소를 떠나 젊은 사람(제사장)에 의해 붙잡혀진 속죄염소(the scapegoat)에게로 갑니다. *<참고: 이 염소는 아사셀(의미: 전체 죄들의 제거: entire removal)을 위한 염소라고 불렸다. 그러나, 또 다른 염소, 즉,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이미 하나님과 그들의 교제의 회복을 위해 속죄제물로 드려졌다>. 그리고, 아론은 자기의 두 손을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얹고 이스라엘 자녀(자손)들의 모든 죄악을 그 위에 고백합니다(confess). 그가 그 모든 죄와 허물들을 그 산 염소의 머리 위에 둡니다. 그것은 야생짐승들(wild beasts)에 의해 멸망당하도록(to be destroyed) 광야로 인도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무엇인지(that is, Spiritually Dead: 즉, 영적으로 죽은 것)와, 이스라엘이 무엇을 행하는지(that is, the sins that are a result of spiritual death: 즉, 영적 죽음의 결과인 죄들을 범함)를 서로 구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참조: 하나님께서 대속죄일을 제정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신 것인데, 대속죄일의 속죄의 방법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죄가 두가지 측면에서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측면은, 우리의 죄성 or 타락이다. 이 죄는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성품으로서, 이 죄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흘림으로써 제거가 된다. 우리의 죄의 두번째 측면은 우리가 범해왔던 자범죄이다. 이 죄는 우리가 물려받은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범할 수 밖에 없었던 죄의 행위들로서 이것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다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제거되어 진다. 따라서, 우리는 대속죄일의 목적을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원죄에 대한 속죄이고, 두번째는 자범죄(들)에 대한 속죄이다. 레위기 16:7-10 참조). 그 죄들(the sins)은 속죄염소(the scapegoat)의 머리에 짊어져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성을 버리셨고,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죄들의 사함을 위해 공급을 만드셨습니다(Jesus put away our sin nature and made provision for the remission of our sins when we are born again). 그 대제사장이 그 성소에 들어가 해마다 속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속죄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죄를 위하여 한 번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 10:1-21).
<참고 사항>: NOTE TO THE STUDENTS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구속(Redemption)을 공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빛 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속이 성육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구속이 가능해질 때를 향해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탄의 속박에서 구원받아야 했습니다. 그분이 언약의 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인간의 구속주가 오실 의로운 계보를 보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언약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집트에서 구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언약 안에서 그들의 권리들(rights)을 감사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웠습니다.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자원이 그들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과; 중보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직; 그리고 제사들(the offerings)을 연구했습니다. 그 제사(the offerings)는 그들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God's provision)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사역(Redemptive work)을 예표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백성의 더 많은 역사를 계속 연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이를 때까지 간단히만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공과에서는 창세기 1장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의 여섯 부분으로 된 연대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참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이 연대기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연대기 생략)
<복습 질문>: Review
Questions
1.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이 성취되었습니까?
2.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향해 일하셨습니까? 왜입니까?
3. 당신은 그 언약과 그것의 존재 이유와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십시오.
4. 성막, 제사장 직분, 제사들이 사람과의 교제를 위한 하나님의
열망(hunger)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를 보여 주십시오.
제17과. 구약성서의 개요와 이스라엘 역사의 하이라이트: SYNOPSIS OF OLD TESTAMENT BOOKS AND
HIGHLIGHTS OF ISRAEL'S HISTORY
<민수기>: Numbers
이 책은 이스라엘의 계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수기는 출애굽기가 남긴 이야기를 다루며 언약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결과 광야 방랑에 관한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을 다음과 같이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창조와 타락에 관한 책; 구속의 출애굽기; 예배와 친교에 관한 레위기; 따라야 할 것-사역(service: 섬김)과 동행(walk)에 관한 민수기.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유형론(typology)으로 그 책들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었었고 광야 경험에서 시험을 받았으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영역과 권세로부터 생명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안으로 절대적으로 넘어갔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왔던 그 사람의 승리의 행보와 삶의 예표로서 사용될 수 없습니다(This cannot be used as a type of the victorious walk and life of the man who has become a New Creation in Christ Jesus, who has passed absolutely from the realm and authority of Satan, into the realm of Life and Christ Jesus). 민수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1) 호스트의 순서 - 1:1부터 10:10까지. (2)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 10:11-12:16. (3)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이스라엘 - 13:1-19:22. (4) 광야 방황 - 20:1-33:49. (5) 닫는 지침 - 33:50-36:13 장. 민수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39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신명기>: Deuteronomy:
신명기는 일곱
부분으로 나뉩니다. (1)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의 요약. 1:1에서 3:29까지.
(2) 경고와 권면과 함께 율법의 회복. 4:1-11:32. (3) 지침,
경고 및 예측. 12:1~27:26. (4) 그리스도의 재림과 팔레스타인 소유에
대한 약속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는 위대한 마지막 예언들(great closing prophecies). 28:1~30:20. (5)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여호수아에게
마지막 조언. 31장. (6) 모세의 노래와 작별 축복.
32장과 33장. (7) 모세의 죽음.
34장. (34:7, 모세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120세였습니다.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언약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Joshua: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신정주의입니다(theocratic: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정부형태를 말함). 여호수아에 기록된 사건들은 26년 동안의 기간을 다룹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정복. 1장에서 12장. (2) 상속 재산의 분할. 13:21. (3) 초기 불화. 22장. (4) 여호수아의 마지막 조언과 죽음. 23장과 24장.
<사사기>: Judges:
이 책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뒤이은 타락과 분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난 열세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스라엘 정부를 계속 통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핵심 구절은 17장
6절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영적으로 죽은
언약 백성의 완전한 실패와 언약 하나님의 은혜라는 두가지 두드러진 사실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곱 번의 배도, 일곱 이방 국가에 대한 일곱 번의 예속, 일곱 번의 구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305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룻기: 이 이야기는 사사기 전반부와 관련하여 읽어야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생활상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사건들은 10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사무엘상>: I Samuel:
이 책은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의 개인 역사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엘리 치하의 제사직의 도덕적 실패와 사사들의 실패,
사무엘의 그 직분을 만드는 시도를 기록합니다. 그의 예언자 직분에서 사무엘은 신실했고,
그에게서 기록하는 예언자들의 계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두드러집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왕 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주변 열방과 같은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울 왕을 주십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사무엘에서 엘리의 죽음까지의 이야기. 1:1에서 4:22까지. (2) 법궤를 가져가는 것부터 왕을 요구하는 것까지. 5:1~8:22.
(3) 사울 통치부터 다윗의 소명까지. 9:1-15:35. (4) 다윗의 소명부터
사울의 죽음까지. 16:1-31:13. 93 이 사건들은 115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사무엘하>: II Samuel:
이 책은 하나님의
왕 다윗의 즉위를 통한 질서의 회복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를
세우는 것을 제공합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부터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리는 기름부음까지. 1:1-27. (2) 헤브론에서
기름 부음부터 연합된 이스라엘 위에 다윗이 세워지기까지. 2:1에서 5:25까지. (3)예루살렘 정복부터 압살롬의 반란까지. 6:1-14:33. (4) 압살롬의 반역부터 성전 부지 매입까지. 15:1~24:25. 사무엘 11장의 사건들은 38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열왕기상>: I Kings:
열왕기상은 다윗의
죽음, 솔로몬의 통치, 성전 건축, 솔로몬의 죽음,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아래 왕국의 분열, 여호랍(Jehorab)의 통치까지
두 왕국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유다와 아하시야. 여기에는 엘리야의 강력한 사역도 포함됩니다. 17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 언약의 사람의 두려움
없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에 기록된 사건들은 118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열왕기하>: II Kings:
열왕기하는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엘리야의 마지막 사역과 승천.
1:1에서 2:11까지. (2) 엘리야의 승천에서
예후의 기름부음까지의 엘리사의 사역. 2:12-9:10. (3) 이스라엘에 대한 예후의 통치.
9:11-10:36. (4) 유다에 대한 아달랴와 여호아스의 통치 11:1-12:21. (5) 여호아하스(Jehoash)와 요아스의
이스라엘 통치와 엘리사의 마지막 사역. 13:1-25. (6) 엘리사의 죽음부터 이스라엘의 포로까지.
14:1-17:41.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포로 생활에서 열 지파는 결코 팔레스타인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7) 히스기야의 즉위부터 유다의 포로까지. 18:1-25:30. 열왕기하에 기록된 사건은 308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이 기간 동안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스라엘에서 예언했습니다. 유다에는 오바댜, 요엘, 이사야, 나훔,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역대기 상하>: I and II Chronicles:
역대기의 두
책은 함께 사울의 죽음부터 포로 생활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마도 바벨로니아 포로 기간 동안 기록되었을
것이고, 유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과 많은 세부 사항이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열왕기의 두 책과 구별됩니다.
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468년의 기간을 다룹니다. 유다는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에스라>: Ezra:
에스라는 기원전 536년에 성전의 기초를 놓은 고레스(Cyrus)의 칙령에 따라 스룹바벨 치하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을 기록합니다. 나중에 B.C. 458년에 에스라가 (그것을) 따랐고, 율법과 의식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대중과 대부분의 방백들은 그들이 번창하고 있었던 바빌로니아와 앗수르에 취향에 따라(by preference) 남아 있었습니다. 포로 이후의 책들은 언약의 하나님만을 기억하는 남은 자들을 다룹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고레스의 조서부터 회복된 성전 봉헌까지.
1:1에서 6:22까지. (2) 에스라의 사역.
7:1-10:44. 에스라서에 기록된 사건은 80년 동안의 기간을 다룹니다.
<느헤미야>: Nehemiah:
구약의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느헤미야는 정말 자신에게 속한 그 인정(recognition)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의 황제의 개인 비서(private secretary)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웅적이었습니다. 그는
리더였습니다. 그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수산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러 용감함(bravery)과 용기(courage: 담대함)로 성벽을 재건하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고 일반 백성에게 율법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들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이 책은 약 10년의 기간을
다룬다.
<에스더>: Esther:
에스더서는 가장
아름다운 구약 문학 중 하나입니다. 비록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다른 어떤 책도 거의 보여주지 못한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가
총애하는 아내가 됩니다. 숙부(uncle?)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인 복종으로 그녀는 그 선민(the chosen people)의 구원자가 됩니다. 구약 연대기에서 더 이상 아름다운 인물이나 여주인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약
11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가서>: The Poetical Books: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사책을 공부했고, 이제 시집 공부를 시작합니다. 시가서들은 하나님의 노래 책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믿음과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의 부르짖음(the heart cries)을 발견합니다. 욥기는 처음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창세기 이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기원전 1700년경입니다. 욥은 아브라함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들(the
universal desires)을 모아 그들을 이 위대한 고뇌의 시에 담았습니다. 그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겠습니까?” 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타락에 대한 암시를 줍니다. 인간의 반역의 정도를 보여주면서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별들도 깨끗하지 않다" 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오, 우리 둘에게 손을 얹을 수 있는 심판자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면" 이라고 외칩니다. 그는 의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욥의 이러한 갈망에서 우리는 각 종족이 가지고 있고 인간
종교에서 표현한 갈망을 봅니다. 욥은 사탄의 시험을 견뎌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묘사된 구속의 전체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고통당하는 인간의 기나긴 투쟁의 고뇌를 겪습니다. 그는 회복된 에덴에서
끝나는 구속의 제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시편>: The Psalms:
시편은 이스라엘의
노래 책입니다. 그것은 첫 언약 백성의 표현, 갈망, 상심,
눈물, 욕망입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일상적인
경험을 나타냅니다. 다른 것들은 그것들을 완전히 넘어서는, 오직 새
창조 안에서만 발견되는 어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책은 일반적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1에서 41; 42 에서 72; 73-89; 90 에서 106; 그리고 107에서 150까지. 저주하는 시편은 적들에게 복수를 외치는 외침입니다. 이것들은 많은 독실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거듭난 적이
없으며 단지 황소와 염소의 피 아래 유대인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시편이 어떻게 기록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시편 23편, 27편,
37편, 91편과 같은 시편들을 자연인에 의해서 쓰여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증거합니다.
<잠언>: The Proverbs:
잠언은 옛 언약의
지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에 있는 야고보서의 내용입니다.
야고보는 새언약(New Covenant)의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고 그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잠언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모든 소년 소녀들, 우리 문법 학교들의 모든 청소년들은 잠언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잠언의 지혜를 흡수하는
사람은 현대 생활의 올무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전도서>: Ecclesiastes:
전도서는 구약에서
가장 독특한 책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쾌락을 찾으려고 애쓰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그림입니다. 그는 건물에서,
건축적 야망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훌륭한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는 원예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당시까지 세상이 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대한 공공 사업에서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와인으로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여자와 노래로 그것을 시도했고,
그것들의 결론에서 그는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인간 영의 욕망(the desires of the human spirit)을 성취하기 위한
자연인의 실패의 노래를 부릅니다.
<솔로몬의 노래: 아가서>: The Song of Solomon:
솔로몬의 노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짧은 서사시와 소네트(Sonnets)입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적 표현으로 표현된 사랑의 꿈입니다. 그것은 깨어진 교제와 그 사랑을 잃은 마음(heart)의 외로움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그것의 특권의 충만함 안에서 걸을 때 그것은 교제의 승리를 줍니다.
<질문>: Questions
1. 민수기와 신명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까?
2. 사사기에 계시된 두 가지 두드러진 사실은 무엇입니까?
3. 마지막 사사들은 누구였습니까? 최초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4. 열왕기상 17장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과 함께하는 엘리야의 능력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5.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6. 느헤미야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7. 욥은 인류의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8. 시편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까?
9. 잠언서는 어떤 목적에 기여했습니까?
10. 전도서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제시합니까? 솔로몬의 노래에서?
제18과. 성육신: THE INCARNATION:
우리는 이제
가장 놀라운 창조의 기적인 성육신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구속되려면 성육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필요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요구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사탄의 자식이었습니다. 신성과 인성의 성육신은 성육신하신
분이 사람의 중보자로 서실 수 있도록 결합된 신성과 인성의 대리자를 제공할 것입니다(딤전
2:5).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연합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둘을 하나로 모으실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틈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요
14:6). 또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사람으로서 인간 반역의 의무를 지고 형벌을 지불할 수 있었고 정의의 요구를 만족시켜서
그 결과 인류는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히브리서 2:14, 골로새서
1:13-14), 하나님의 성품을 받을 권리가 주어질 것입니다(요한복음
1:12).
<성육신 사실>: An
Incarnation Fact:
성육신하신 분은
자연 발생으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연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오셔서 그를 성육신으로
만드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사탄의
본성)이 세상에 들어와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에
의해 온 인류가 영적으로 죽었고 이 영적 죽음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이와 같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만일 예수가
자연 발생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이 그분 안에 오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그분 안에 거하시는 사탄의 자녀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육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육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한 사람의 영에서 영적 사망을 근절하고 그 안에 거하여 그 사람을 성육신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그는 같은
방식으로 전체 인류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탄에게 부당한 일이 되었을
것이며 그 자신에게도 불의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사람의 범법에 대한
형벌이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속자는 사탄이 그에 대해 법적 권리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분이어야 합니다(죄인의 구속주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 성육신이 필요했다는 말임). 이것은 베들레헴의 아기처럼 잉태되고 태어난 구속주에 의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나다>: Born of a Virgin:
성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은 인간의 대반역죄 직후 사탄과의 대화에서 주어집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리니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가 오직 그분의 아들의 성육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음을 아십니다. 성육신하신 분이 육신으로 나실 수 없음을 아시고 여자가
육신의 씨와 무관하게 아이를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여자의 씨라 일컬으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이사야
7:13, “이르시되 다윗의 집이여 들으라 너희가 사람에게 피곤하여 내 하나님도 괴롭게 하는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보이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이는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것이며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네게 주실 것" 입니다. 여기서 그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기적의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이게 뭐야?"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처녀가"
(마치 그분이 그녀를 표시하신 것처럼)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처녀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또는 성육신 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31-36, "보라 네가 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이르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아시다시피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탄생입니다. 그녀는 다윗의 가족이기도 한 요셉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오,
다윗의 집이여,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작은 일이냐? 내가 너희에게 표적을 보이리라." 그는 750년 후 베들레헴의 구유 요람에서 놀라운 존재를 낳을
다윗의 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여자가 남자를 에워싸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성육신하신 분은 자연적인 세대에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한 존재이고
그의 씨는 사탄에게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이 씨는 사탄의 속박이 아닌 자의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이 놀라운 존재는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며, 동정녀의 태는 그가 오실 때까지 단순히
그 거룩하신 분의 그릇(receptacle)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6절은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네 손을 잡고 너를 지어 너를 주어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창조되었습니다. 나머지 인류는 자연적 과정에 의해 생성되었지만, 태어나게 될 이 아이는 신성한 힘의 특별한 행위에 의해 "형성"(formed)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그 형상을 가지사
종의 모양으로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용어들에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항상 하나님의 모양으로 계셨으나(He had existed always in the form of God) 이제는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세대(natural generation)와는 다른 하나님의 분리되고
구별된 작용(operation)을 암시합니다. 여기에 한 존재가 있는데,
그와 함께 하나님은 신격이나 하늘의 신격에서 그를 빼내어 그가 독특한 임신으로 육체와 연합되도록 동정녀의 태중에 그를
둠으로써 기적을 행하십니다(Here is a being with whom God performs a Miracle by
taking Him out of the Godhead or from the Godhead in Heaven, and placing Him in
the womb of a virgin to be united with flesh by a unique conception). 다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주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5). 하나님은
몸, 특별한 몸을 예비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이 사람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선재>: Pre-Existence of Christ:
성육신은 성육신한 이 존재가 이 땅에 오기 이전에 별도의 존재를 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땅에 오셨다가 다시 땅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다고 열일곱 번 선포됩니다. 요한복음 전체는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이전의 삶(a previous existence: 선재)을 가졌다는 사실과 그가 지상을 거니는 동안 다른 세상에서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이러한 경험에 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린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다시 생명을 취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을 기억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3:16; 8:42; 13:3; 및 16:28-30. 미가서 5장 2절은 그리스도의 선재와 그분의 지상 재림에 대한 놀라운 예언적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 유다 족속에서 나실 자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실 것이니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을 통해 위아래로 여행했으며 여러 시대에 그의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이 존재는 태초에, 영원 속에 존재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이 영원하신 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교제와 목적 안에서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 "... 그가 또한 세상을 지으셨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리는 첫 수업에서 창세기 1:1의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보았습니다. "엘로힘" 은 창조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복수형 단어입니다. 창세기 1:26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는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창조를 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반하는(in fellowship and companionship) 이 영원하신 존재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같은 본성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같은 형태로 존재하셨습니다(빌립보서 2:6).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니라." 이 존재가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다른 어떤 것이 아니셨던 것처럼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전의 자신이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셨습니다(골 1:15). 그는 하나님의 존재의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히브리서 1:3, Rotherham). 영적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때부터 그분이 탄생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성육신을 향해 일하고 계셨고 그리스도의 오심, 사역, 죽음, 부활에 대한 약속을 반복적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의 고난(Sufferings): 창세기 3:15; 시편 22:1-8; 31:13; 89:38-45; 이사야 53:1-12; 다니엘 9:26; 스가랴 13:1; 6:7. 그분의 죽음과 장사(Burial): 민수기 21:9; 시편 16:10; 22:16; 31:22; 49:15; 이사야 53:8, 9, 다니엘 9:26. 그분의 부활: 시편 17:15; 49:15; 73:24; 요나서 2:1-10. 그분의 승천: 시편 8:5, 6; 24:7; 47:5; 68:18; 110: 1. 그분의 미래의 승리(Future Triumphs): 이사야 40:10; 다니엘 2:44; 7:13, 14, 27; 호세아 3:5; 미가 4:1-7. 102. 구속주: 욥기 19:25-27; 창세기 48:16; 시편 19:14; 이사야 41:14; 43:1; 44:22; 59:20, 21; 62:11; 63:1-9; 예레미야 50:34; 창세기 22:8; 이사야 53:7.
<영원히 연합>: Eternally
United: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안에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은 영원토록 사람이 되셨음을 주목합니다. 그분은 인성을 삼십삼 년 동안 입을 옷으로 취하신 다음
그것을 버리고 제쳐놓치 아니하셨고, 영원히 한 사람(man)이 되도록
사람(man)이 되셨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 만이 아니라 영원한 사람이라는
말임). 오늘날 성육신의 결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오른편에 한 사람이 계십니다. 디모데전서
2:5,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 Man in God's Image
신성과 인성이 한 개인 안에서 영원히 연합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그 첫 사람(아담을 말함)이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한 그림자 낮은(just a shade lower than Himself),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in His Own Image)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및 시편 8:5). 사람은 거의 하나님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한 개인 안에서(in one individual) 영원히 연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우리의 영에 나누어 주실 수 있고 우리 인간의 몸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God can impart His life and nature to our spirits and dwell in our human bodies). 예수가 성육신이었다면 불멸은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에 대해 영생을 얻는다면(If we receive Eternal Life for our spirits), 우리는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몸이 불멸이 될(become immortal) 것이라는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성육신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초자연적입니다. 거듭난 모든 사람은 성육신입니다. 신자는 나사렛 예수만큼이나 성육신입니다. 정의의 요구(the claims of Justice)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사람의 영에서 영적 죽음을 근절하고 사람에게 그분의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을 의심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의 부르짖음에 대한 유일한 응답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고통, 질병, 죽음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증명하며 이후의 모든 신적 능력(POWER)의 기적적인 나타남의 기초이자 이유입니다. 성육신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기적입니다.
<질문>: Questions
1. 성육신하신 분은 왜 자연적인 세대로 태어나실 수 없습니까?
2. 이사야 7:14을 설명하십시오.
3. 빌립보서 2:6-8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 무엇을 계시합니까?
4. 요한복음 1:14을 설명하십시오.
5. 그리스도의 선재를 보여주는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제시하십시오.
6.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셨습니까?
7. 다음에 관한 예언적인 성경 구절을 제시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탄생,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이 인간의 구속주 되심.
8.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셨습니까?
9. 아버지의 오른편에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는 성경 말씀을 주십시오.
10.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무엇을 밝혀 줍니까?
제19과. 성육신이신 분의 삶: THE LIFE OF THE INCARNATE ONE:
<시간의 충만함>: The Fullness of the Time
우리의 마지막 수업에서 우리는 성육신에 대한 인간의 필요성과 성육신하신 분의 오심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약속을 공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성육신 안에서 보내셨습니다.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의 오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리스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융통성 있고 가장 표현력이 풍부한 세계적인 언어를 기독교에 제공함으로써 기독교의
길을 준비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세상의 정치 권력은 로마의 손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지중해에 접해 있는 세계의 모든 지역을 단일 정부(a single government) 아래 정복하고 통합했습니다. 평화가 이토록 널리 퍼진 적이 없었고, 생명과 재산이 이토록 안전했던 적이 없었으며,
여행이 이토록 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훌륭한 도로 건설자였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문명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은 군대를 위한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동방과의 선박 노선이 확립되었습니다. 이 길들과 노선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성육신을 위한 보편적 외침>: The Universal Cry for an Incarnation:
여기에서 우리는 구속의 기쁜 소식이 신속히 세상에 전파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로 이러한 조건을 가져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전 역사를 통틀어 타락한 도덕의 가장 개탄스러운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당시의 로마 세계에 의해 제시됩니다. 온 세상에 어두워진 인류에게 소망이나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낙담과 실패의 상황 한가운데에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구세주에 대한 소망은 바로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있었습니다. 4세기 동안 침묵했던 유대인의 예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일깨웠습니다. 이교도의 마음조차도 구원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별을 따라 동방에서 온 동방박사들은 구세주에 대한 동방의 보편적 열망을 상징했습니다. 세상의 눈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때가 찼을 때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 . 영적 죽음의 속박 아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오랜 마음의 부르짖음에 대한 반응.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셨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요구를 충족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육신이었습니다. 모든 연령대의 인간은 성육신을 본능적으로 갈망해 왔습니다. 자연인이 원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습니다. 원시인은 성육신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모든 고대 인간 종교는 그 외침에 응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Trumbull 박사는 그의 책 "The Blood Covenant"에서 성육신에 대한 원시인의 굶주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피의 교류를 통한 영감의 개념을 넘어, 원시인의 마인드(mind: 생각)에는 피에 의한 하나님과의 내적 교통을 통해 하나님과의 가능한 내적 교통에 관한 생각이 있어 왔습니다(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에게 속합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피는 생명으로서, 사람이 하나님과 내적 연합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가깝고 가장 신성한 계약(언약)들로서, 참으로 두 사람의 본성이 하나로 절대적으로 합쳐지는 것은 공통의 피가 섞임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가장 가깝고 가장 신성한 언약; 그래서,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과의 내적 연합은, 공동의 피의 흐름 안에서 처럼 공동의 삶을 제안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사람은 피, 실제로 자기 자신의 피, 또는 대체물에 의한 피를 하나님 또는 신들과(the gods)의 상호 연합의 수단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피의 유출(outflowing)이 감사나 애정의 행위, 사랑의 확신의 증거,그분과의 내적 연합의 수단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인종에 대한 보편적인 원시적 개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피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과 또는 신들과 상호 연합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사람이 믿는 증거는, 그가 희생제물의 몸의 음식 섭취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 또는 신들과의 상호 교통의 보편적인 실습이 되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제물의 피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연합의 수단입니다." 모든 원시인들은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면서 희생 제물의 피를 마셨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성육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은 불멸의 우월한 인간이었습니다. 고대 문명의 왕은 여러 번 신의 후예라고 믿어 성육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성육신에 대한 현재의 갈망>: The Present Hunger for an Incarnation:
오늘날 인간은 여전히 성육신에 굶주려 있습니다. 교육은 인간의 영(spirit)에서 이 배고픔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교육은 사람의 영의 갈망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말임). 현대의 모든 인간의 종교(human religion)는 이 굶주림에 답하려고 합니다(그러나 답할 수 없었슴). 성육신들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 남성들은 많은 추종자를 받습니다. 성육신을 추구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뿐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신적이고(divine)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 안에 거하며 인간이 그 사실을 인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는 어떤 현대 이단들(cults)은 더 지적이고 교육받은 계층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단들은, 사람들이 성육신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악용해서, '사람은 근본적으로 신적이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이 사람 안에 이미 계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해야 하고 교제해야 한다'고 허무맹랑한 거짓말 하고 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교육받은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거짓말과 사기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말임). 우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때부터 현재까지 하나님과의 연합, 신인(a God-man)을 갈망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 God Manifest in the Flesh:
사람이 얼마나 간절히 성육신을 필요로 했는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분리의 세월이 얼마나 길고 쓰라렸습니까!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본래 창조주를 알지 못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분의 본성(Nature)을 알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세상에 하나님의 본질(the nature: 성품)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분리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그분의 계시 없이는 창조주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계시를 거부했고 그의 마인드(정신)가 눈먼(blind)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얼마나 거짓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한 나라의 인식이 그 나라의 예배와 삶을 결정합니다. 이방 국가들의 무지와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어두워진 인식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하고, 잔인하고, 기괴하고, 부도덕하고, 냉담하고, 비인격적인 에너지로 생각되었으나 결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하나님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주실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계시를 소유한 이스라엘조차도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필요>: Israel's Need:
하나님에 관한 이스라엘의 인식의 산물은 교만하고 비통하고 불친절하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인식(false conception)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실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그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Rotherham).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지상에 오심을 생각할 때 영광 중에 지상에 오셔서 겪으신 자기 부인과 고난에 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 때, 우리는,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인간과의 교제를 그토록 원하셨던 그분에게는, 그의 창조주를 결코 알지 못했던 소외된 인간에게 그분에 관한 참된 인식을 주실 수 있도록 (그분이) 사람들 중에 지상에 거하시는 것이 기쁨이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단계의 그의 사명을 얼마나 분명하게 깨닫고 감사하셨겠습니까! 요한은 그분에 대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삶은 그분 이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및 종교 교사들의 삶과 얼마나 달랐습니까?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로서 왔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계시로서 오셨습니다(요 14:6). 그분은 창조주를 사랑의 하나님, 접근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전에 이 분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엄히 대하던 세례 요한이 물러가며 이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이니이다 (마태복음 3:14). 사람들 중의 최고의 인간인 이 사람(세례요한)은 이 성육신하신 분의 면전에서 그의 깊은 필요를 느꼈고, 가장 죄 많은 사람들도 그분에게 끌렸던 것을 느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와 그분과 함께 앉아서 먹기를 기뻐하였습니다(마 9:10, 막 2:15, 눅 5:30, 15:1). 그들은 그분의 거룩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에 이끌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분의 무릎 위에 앉았습니다(막 10:13). 이 성육신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을 감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교도 국가에는 어린이를 위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국가에 군사적 가치가 있는 후에야 그의 생명에 어떤 가치가 부여되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강하고 순수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어린이들을 높이는 것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여성의 높아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그들의 특권, 자유, 축복은 그분의 삶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A God
of Love:
여기 우주 뒤의 심장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삶과 말씀으로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창조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깨달음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본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창조주의 전능하심을 알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전지하심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편재하심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성품, 즉 우리에 대한 그분의 태도,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압니다. 그분이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우리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압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창조주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부서졌던 마음과 같습니다. 어떤 예일대 교수는 "내 마인드에게 질문은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와 같은 분인가 아닌가?"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사람의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살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모든 도덕적 특성을 하나님께로 옮길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조금도 낮추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인식은 그분이 그리스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용어로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것을 우리의 이 인간 영역 전체에 기록했으며,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육신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부르짖음은 예수님 안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본성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되심을 발견합니다(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말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도 나타내셨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아버지-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큰 흥분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5:18. 그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음 성구에서-요한복음 14:20; 6:46; 7:29; 8:18과 10:15- 우리는 인간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신 중심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성육신하신 분의 삶을 살펴봅시다. 그분은 완전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셨지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삶의 차이는 그분이 그들보다 덜 인간적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영적 사망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인류가 반역한 때부터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죽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탄은 그리스도를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됨 안에서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전능의 영역에서 사셨습니다. 질병은 영적 죽음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질병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의 몸은 죽을 몸이 아니었습니다. "Mortal"(죽어야 할: 필멸의)이라는 단어는 "death-doomed"(죽어야 할 운명에 놓인)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은 그가 영적으로 죽었을 때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그리스도는 영적 죽음과 무관하셨다는 말임: 그 이유는, 그분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었고, 즉, 육신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셨던 것이 아니고, 성육신 자체, 즉,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임). 그러므로 그분이 이 땅을 걸으셨을 때 그분의 몸은 죽음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성육신하신 분의 몸은 필사자도 불사자도(mortal nor immortal)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아담이 영적으로 죽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완전한 영원한 인간의 몸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분의 때가 오기 전에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먼저 영적으로 죽었었기 때문입니다(On the cross Christ died physically, because He had first died spiritually: 해석 주의: 저자가 여기에서, 굳이 예수님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죽음을 대속하셨슴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먼저 영적 죽음에서 구원받고, 마지막 날에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영적인 죽음은 익숙하지 않은 표현으로서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영적 죽음을 당한 자는, 기본적으로, 그의 영이 지옥에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을 때(고후 5:21), 그분의 영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영적 사망이 그 위에 놓여졌고, 아담이 영적으로 죽었을 때 그분의 몸은 필멸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9절에 있는 죽음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복수형으로,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중적인 죽음임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영적인 죽음이고 그 다음은 사람을 대신하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이 분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위해 계획하신 삶을 봅니다. 이 성육신하신 분의 삶은 얼마나 완전하게 자유롭고 풍요로웠습니까? 인간으로서 그분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고,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그들의 창조주를 나타내셨으며 사탄의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질문>: Questions
1. 갈라디아서 4:4을 설명하십시오.
2. 역사는 고대인이 성육신에 굶주려 있었음을 어떻게 밝혀 줍니까?
3. 오늘날에도 사람은 성육신을 추구합니까?
4. 인간은 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이 없었습니까?
5. 요한복음 1:18을 설명하십시오.
6. 그리스도의 생애는 세상의 어린이들과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7.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버지-하나님으로 어떻게 계시하셨습니까?
9. 질병과 사망이 예수의 몸을 지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부터 독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20과. 구속: REDEMPTION
<성육신의 목적>: The
Object of the Incarnation.
그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이었습니다(요 1:12).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들임으로써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요
10:10).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합법적으로 구속된 후에야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골 1:13-14). 그러므로 성육신 이후 우리 연구의 단계는 실제로 성육신의 목적인 구속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구속자의 자격이 성육신한 자를 요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육신하신
분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하셨고,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받을 수 있게 하셨는지
연구할 것입니다. 사람의 구속은 합법입니다. 그것은 식별의 법칙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swing). 식별은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아담과 동일시되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이 포함됩니다. 구속의 전체 계획은 사람을 아담과 그리스도와 이중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와 동일시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동일시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그런 말을 하는 것임).
<바울의 계시>: Paul's
Revelation: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구속 사업과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에 대한 계시를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계시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다음 성구에서 말합니다: 로마서 16:25-26. 그는 그것을 "나의 복음" 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갈라디아서 1:6-17. 이것은 바울이 어디에서 그의 계시를 받았는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침묵으로 유지되었었다가 이제야 알려졌던 하나의 계시입니다. 에베소서 3:1-12. 그는, 다른 세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비밀에 있어서 그의 이해는, 그가 계시에 의해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받은 이 계시 안에는 기본적인 기초로서 사람이 아담과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이중적 동일시를 분명히 이해할 때 그의 마인드를 새롭게 하기 위한 기초가 놓인 것입니다. 이 식별(identification)의 계시를 연구하기 전에 우리는 왜 구속의 계시가 그리스도께서 일어나(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후에 주어지는 것이 필요했는지를 연구할 것입니다.
<바울의 계시의 필요성>: Necessity of Paul's Revelation:
우리는 이 과정의 첫 번째 수업에서 두 종류의 지식(knowledge)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종류의 지식은 자연인의 지식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들을 통해 파생됩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은 성령에 의해 사람에게 주어진 지식입니다. 그것을 계시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계시입니다. 성육신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는 육체의 감각 수준에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1:1-2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심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보았던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은 그보다 먼저 살았습니다. 그는 그분이 하셨던 말씀을 그의 귀로 들었고 그의 손으로 그분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 그분에 관해 소유했던 지식은 순전히 그의 육체적 감각으로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물리적 계시 혼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나 그분 안에서의 구속에 관한 그의 이해를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This physical revelation of Christ was not alone sufficient for man's faith in Christ as the Son of God or his understanding of Redemption in Him). 마태복음 16:15-17.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본 것, 그가 들은 것, 그리고 그의 신경계(그의 육체에 내장되어 있는)의 오감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하여 그가 다루었던 것들은 이러한 (계시) 지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계시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계시(?)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의 시력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았고 아마도 그의 생명 없는 몸을 만졌을 때 모든 소망이 그의 마음(heart)에서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전에 보았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as
the Disciples Saw It:
제자들은 오직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장사와
부활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타당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장사하기 위해 누워져 있는 그분의 몸을
향료로 처리하는(embalming) 과정에서 그것을 보았고 만졌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굴려진 돌과 빈 수의(무덤 옷)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듣고 만졌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지식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및 부활의 영적 중요성의 의미에 대한 어떤 통찰력(insight)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crucifixion)에서 그들은 오직 그분의 육체적 고통(physical suffering)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죄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영적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They knew nothing of the spiritual
suffering of Christ as His spirit was made sin).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분의 육체(physical body)가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로 사탄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the Holy of Holies)로 승천하신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떠나신 후에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그 당시 제자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설명임. 저자는, 그 제자들이 그런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었슴을 전제로 하여,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왜 그런 상태에 놓여있었는지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러한 전제가 실제로 다 맞는가 하는 것이다).
<필요했던 계시>: A Revelation Needed: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이루어졌던
완전한 구속(the complete Redemption)을 계시하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6-16은 이 계시, 이른바 이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9-10절,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 필요로
했던 이 계시는,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오셨던 오순절 이후까지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속계시의 필요성을 보았으니 이제 우리는 구속의 계시의 심장(heart)인 그 동일시(the Identification)를 살펴볼 것입니다.
<아담과 동일시>: Identification with Adam:
로마서 5장 12-21절은 동일시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제공합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에게 아담의 대반역의 죄를 알려 주지만 4,000년 동안 계시는 이 주제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인류가 범법한 아담과 동일시되었음을 밝힙니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에게 들어온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사탄의 본성인 영적인 죽음임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5:14-19. 이 죽음은 한 사람에 의해, 또는 그와 동일시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반역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 위에 항상 군림했습니다. 로마서 5:18. 아담과 동일시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임했습니다. 아담의 심판은 모든 사람의 심판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5:19. 아담을 통하여, 또는 그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류(the human race)가 첫 사람 아담과 동일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죄가, 사탄이 주인인 사망의 영역에서, 왕노릇(지배)하고 있다고 밝힙니다(So Paul reveals that down through the ages and to the present day, sin has reigned in the realm of death where Satan is Lord, because of the fact that the human race was identified with the first man, Adam). (사람의) 구속(Redemption)에는 법적(legal) 측면과 생명의(vital) 측면의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법적인 측면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과거에) 하셨던 일입니다. 그 생명의 측면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안에서 (현재에) 행하시는 일입니다(The legal is what God did for us in Christ; the vital is what God does in us in Christ). 마찬가지로 사람의 타락(the fall of man)에는 법적인 면과 생명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 법적인 측면은 사탄이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과거에) 행했던 일이고, 그 생명의 측면은 본성적으로(by nature) 우리가 진노의 자녀들(children of wrath)일 때 사탄이 우리 안에서 (현재에)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는(vitally) 아담과 함께 (그 때) 동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그의 죽음, 그의 속박, 그의 심판, 그리고, 그를 만들었던 모든 영적 죽음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human race)를 그분의 아들(His Son)과 동일시(identification) 하심을 통해 아담의 반역의 모든 결과로부터 사람(man)을 완전히 구속하셨습니다(has redeemed). 이것은 이 계시가 로마서 5:12-21에서 우리에게 가져오는 메시지입니다. 만일, 인류에 대한 사탄의 주권이 인류가 아담의 대반역 범죄로 인하여 아담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었다면, 사탄의 일들이 인류가 두 번째 아담인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됨으로써 파괴되는 것은 법적으로 가능합니다(If the Lordship of Satan over the human was due to the identification of humanity with Adam in his crime of high treason, it is legally possible for the works of Satan to be destroyed by the identification of the human race with the Son of God, the second Adam).
<그리스도가 사람의 인성과 동일시됨>: Christ's Identification with Man's Humanity: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인류가 인간 구속의 법적 측면에서 동일시되는 단계를
연구할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인성을 동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성육신에서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14과 히브리서 2:14, "그러므로 자녀들은 혈과 육 (in flesh and blood)에 함께 속한 자 (-나누는 자)들이기에,
그분도 이와 같이 혈과 육을 함께 지녔습니다(-에 참여하였습니다)." 지난 수업에서 보았듯이 그분은 첫 사람이 걸어야만 했던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과의 완전한 동일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사람의 영 안에서 다스렸던 그 본성(사탄의 죽음의 본성)을 취하셨더라면 그분은 그분의 지상 사역 동안 영적으로 죽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그 사람의 영의 본성과 동일시되신 것은 그분이 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을 때인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동안이었습니다(Therefore, His
identification with the spirit nature was during His Crucifixion, when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fulfill the purpose for which He had come into the world). 이사야 53:4-6. 히브리어를 영어로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감당했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길을 잃었고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 번역은 구약성서의 유대인 번역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죄성과 동일시됨>: Christ's Identification with Man's Sin
Nature:
바울이 고린도후서 5:21에서 받은 계시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죄(sin)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감당하셨을 뿐 아니라, 죄의 본성(sin-nature) 자체가 그분 위에 놓여졌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이, 사람에게 임함으로써 나타났던 모든 일이, 그분에게도 나타났을 때까지 입니다(He not only bore our sins, but the sin-nature itself was laid upon Him, until He became all that spiritual death had made man). (*해석 주의: 저자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이, 그분의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의 영적 죽음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영적인 죽음이,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본래의 영을 잃어 버렸거나 사탄의 영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적인 죽음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 잠시 지옥에 갔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은 거룩한 영으로서 시종일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가 있었던 것은 그분의 영이 여전히 거룩한 영이었슴을 반증한다). 하나님의 마인드(생각)에는 십자가에 달렸던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에덴) 동산에서 우리는 아담과 실제로(vitally)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함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적으로 십자가 위에 있지 아니하였지만 법적으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류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담과 동일시하는 것만큼이나 완전했습니다. 인류와 그리스도의 동일시가 완성되었으므로 구속의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의 형벌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것이었던 심판이 그분에게 떨어졌고 그분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53:8, "그가 곤욕와 심문으로 말미암아 끌려갔나니 그의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음은 마땅히 내 백성의 범법으로 인함이요 그에게 채찍질이 임하였느니라 하였으리요." 그 심판, 타격은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에게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심판 아래에서 죽으셨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옥에서 우리의 형벌을 지불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시편 88편은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임한 지옥에 있는 한 의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에게 엄중히 임하였으니 이는 그분이 우리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4-28은 지옥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혼(soul)이 지옥에 남겨진 것이 아니라(27절)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pangs)에서 풀어서 그분을 살리셨다(부활시킴)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 "pangs"는 "심한 고통"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셨던 그 격렬한 고통에서 그의 영이 풀려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의롭게 하실 수 있을 때까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께서 영 안에서 의롭게 되셨다고 계시합니다(I Timothy 3:16 reveals that Christ was justified in Spirit). 그분은, 동일시에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사람의 형벌이 지불되었을 때 그분 자신이 의롭다함을 필요로 했습니다(He, in identification, had become so utterly one with us that He Himself needed justification when man's penalty was paid). (Rotherham은 그리스도께서 영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셨다고 말합니다). 구속의 다음 단계는 죄가 되셨던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The next step in Redemption was that He who had been made sin be begotten of God). 히브리서 1장 5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행 13:33,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손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사람의 형벌이 지불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죽음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처럼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만 했습니다(Jesus Christ, when man's penalty had been paid, had to be born of God and pass from death into life just as man, because He had become identified with our Spiritual Death). (*해석 주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것을 전제로 하여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영이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적 신분이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은 과도한 말이고, 오해의 소지가 충분이 있다. 예수님의 영은 영원토록 거룩하신 영으로서, 어디에 계시든지 변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영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신 후에, 사람으로서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권세 안으로 가두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4:25 (by 로더햄: Rotherham),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Who was delivered up for our offenses and raised on account of the declaring us righteous).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되었을 때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그분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셨으며, 그분의 신성의 능력으로 그분은 사탄을 만나셨고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triumphed). 골로새서 2:15, “그분 스스로 정사들과 능력들 (principalities and the powers)을 벗어버리사 그분은 십자가로 그들에 대해 승리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정사와 능력들)을 그분의 정복으로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그에 대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사람으로 부활하셨을 때 사탄의 세력들(forces)은 그분의 발 아래 놓였습니다(에베소서 1:20-23).
<질문>: Questions
1. 그 성육신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2. 바울의 계시에 관해 말하는 세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십시오.
3. 하나의 계시가 주어지는 것이 왜 필요했습니까?
4.
Redemption에서 동일시는 어떤 자리를 차지합니까?
5. 사람이 아담과 동일시됨으로써 무엇이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까?
6. 사람이 아담과 동일시를 보여주는 다섯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십시오.
7. 왜 그리스도는 그 성육신에서 자신을 사람의 인성과만 동일시하셨습니까?
8. 그리스도는 언제 우리의 영 성품(spirit nature)과 동일시되셨습니까?
9. 그리스도께서 영 안에서 살아나시는 것이 왜 필요했습니까?
10.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 언제 사탄을 정복하셨습니까?
제21과.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OUR IDENTIFICATION WITH CHRIST: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구속의 단계를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2-14, “그러나 그는 죄를 위하여 한 제사를 드리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영원히 앉으사 그의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기까지
기다리시나니 이는 그가 한 제사로 그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사람은 그의 구속 사업에서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완전히
구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사람의 영적 죽음이 그가 타락할 때 법적으로 아담과 동일시되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법적으로 영적 사망에서 구속되는 단계를 연구할 것입니다.
여섯 단계가 있습니다:
(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킹제임스 버젼은
이 구절을
"나는 십자가에 못박힙니다(I am crucified)." 라고 잘못 번역했습니다.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was crucified)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다.” 로마서 4장 25절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줍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분은 우리의 범죄(trespasses)로 말미암아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was delivered up).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감당하셨던 것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요 우리의 허물이었습니다(It was our spiritual death and our trespasses that He bore). 그분은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동일시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리자(substitute)였습니다.
(2)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I DIED WITH CHRIST: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그와 연합되었다면"; 로마서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가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의 영적 사망을 그분의 영 위에 두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육체적으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해석 주의).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동일시된 결과로서, 아담이 영적으로 죽었을 때 아담의 몸이 그랬던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몸이 되었던 그분의 몸의 죽음이 거기에 뒤따랐습니다(So there followed as a result of our identification with Him in crucifixion, the death of His body which had then become mortal, "subject to death," as had Adam's when he died spiritually).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분의 영이 그분의 육체적인 몸을 떠나 지옥으로 갔을 때 우리는 그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계실 때 강도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들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 어떤 사람들의 마인드에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번역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즉,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나,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나는 오늘 너에게 말하노니, 내가 낙원에서 너를 만날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피로 덮인 옛 언약의 범법에 대한 형벌을 지불했기 전까지는 낙원에 가실 수 없었습니다.
(3)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I WAS BURIED WITH CHRIST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통해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묻혔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장사의 예표(type)입니다. 그분의 몸은 무덤에 있었지만 그분의 영은, 그분이 사람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형벌을 지불하셨을 때, 지옥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His body lay in the tomb, but His spirit
suffered in Hell as He paid the penalty that was due man). 그분은 사람과 동일시되셨기 때문에 사람의 형벌을 적절하게 지불하시고 공의의 요구를 충족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지불하신 형벌은 그분의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졌던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인드에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짊어지고 그 고통의 장소에 있는 당신과 내가 있었습니다(In the mind of God, it was you and I
there in that place of torment, bearing the judgment that was due us). 이러한 동일시를 근거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받는 사람은 지옥에 갈 필요가 없이 자유로이 가는
반면, 그 자신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거부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인간의 대반역죄의
형벌이 지불되었을 때 인간은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1-11절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죽으심과 장사된 것과 우리가 동일시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계시된 사실을 갖고 있습니다: 죄의 몸 곧 영적 사망의 몸은 멸망되었습니다(롬 6:6).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의 형벌을 적절하게 지불했기 때문에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로마서 6:7 Revised Version 각주). 형벌이
지불되었을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있거나 의롭다고 선언되었습니다. 우리는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그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지적으로 말할 수 있기 전에 그가 사용했던 용어를 정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의"라는 단어는 "사람이 그의 영 안에 어떤 영적 사망도 없었던 것처럼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능력(ability)"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영적 사망에서 합법적으로 (그를) 해방시키실 수 있을 때, 그분은 사람의 영에 생명, 즉,
그분 자신의 본성(nature: 성품)을 나누어 주실 권리를 가졌습니다(When God could declare man righteous and legally freed from spiritual death, He had the right to impart life, His own nature, to the spirit of man).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셨던
이후에는, 우리의 형벌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던 사람과 그리스도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계속되고 그 다음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4)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I WAS MADE ALIVE WITH CHRIST
골로새서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고 에베소서 2:5, "우리의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히 1:5, 행 13:33).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였습니다(He wa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그는 영적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He was the first man to be born out of spiritual death into Eternal Life). **해석 주의: 저자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관한 말씀을 그분의 부활에 연관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행 13:33-34 말씀은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v.33)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씀이다(시 2:7 참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장성하신 후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음성이 들린 것은 그 점을 증명한다. 둘째는, (v.34)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자는 이 구절들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양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저자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영이 다시 태어난 것이기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도 예수님처럼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시에 그분의 영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셨을 때에, 자신의 영을 잃어버렸다가 부활시에 다시 그 본래의 영을 되찾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에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 없이 마귀의 영으로 태어나기에, 우리의 영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은 우리의 영과 달리 거룩한 영으로서, 그분의 영이 비록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셨을지라도, 그 영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정당하게 부활하실 수가 있었고 시종일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고 본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죽은 영이 재창조되어 이미 죽었던 몸과 연합해서 영원한 몸이 되었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존의 영이 이미 죽었던 몸과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의 몸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엄연히 예수님의 성육신과 다르다. 또한, 그분의 부활은 예수님의 영의 재창조가 아니다. 예수님의 영의 재창조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꺾은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6:9-10, “사망이 다시는 그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음이라.”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와 동일시되었을 때 죽음이 그분을 지배했지만 그분이 우리의 형벌을 지불하셨을 때 그 지배권은 무너졌습니다(the dominion was broken). 그는 해방되었습니다(released). 그분은 죄에 대하여 죽으셨고 생명의 영역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셨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형제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태어나신 그분과 법적으로 동일시되었지만, 그분은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첫 번째 사람, 즉 장자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합법적으로 살게 됨으로써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conform"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일치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죄가 되심으로 그분은 영적 죽음에 대한 우리의 형상을 본받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이 장자의 형상을 본받게 됩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All that He is we become).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죽음에서 그분과 함께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길 것을 말씀합니다(He tells us that we are to reckon ourselves dead unto sin and alive unto God in as much reality as Christ is dead unto sin and alive unto God). 그 이유는 우리가 함께 거듭났고, 즉, 합법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생생하게 영접하면서, 사람은 실제로, 그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납니다(A man, vitally receiving this Life of God, is actually born out of death into life when he personally accepts Jesus Christ as his Savior: 참고: 거듭남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영접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하는 일로서, 그 두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시에 일어나게 됨). 실제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이 지옥에 갔고,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받고 풀려났고, 영적 사망의 속박에서 풀려났으며, 대반역죄에서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걸을 권리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아담이 이것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영적 죽음에서 그와 동일시되었던 인류는 결코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크신 사랑으로 그 일을 하도록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영적으로 죽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을 통해 모든 인류는 합법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한 남자나 여자는 아담이 죄를 지은 적이 없거나 영적으로 죽은 적이 없는 것처럼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교제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그 거듭남에서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주권 안으로 넘어갑니다(At the New Birth a man passes from the authority of Satan into the Lordship of Christ).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해방되셨을 때 사람이 참으로 그분과 함께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후의 다음 단계는 그분 스스로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After Christ had been released from Satan's authority, the next step was to put off from Himself the forces of Satan). 말씀은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그분을 "다른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all other government, and authority, and power, and dominion)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통치권(every title of sovereignty)보다 뛰어나게 "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5)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I WAS RAISED WITH CHRIST:
에베소서 2:6, "또 함께 우리를 일으키셨으니."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싸움은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포학들과 제국들과 이 어둠의 세상을 주관하고 주관하는 세력들과 우리를 대적하여
하늘에서 전쟁을 치르는 악의 영들과 함께 함이니라" (by Weymouth: 웨이머스:
For ours is not a conflict with mere flesh and blood, but with the despotisms,
the empires, the forces that control and govern this dark world, and the
spiritual hosts of evil arrayed against us in the heavenly warfare).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사탄의 자리에서 그분의 정복으로서 무장을 해제하셨고 전시하셨던 그 통치자들입니다. 골로새서 2:15, “적대하는 방백들과 통치자들을
자기에게서 떨쳐 버리시고 그들을 대적할 때에 담대히 이룬 것을 나타내셨느니라 ” (Weymouth). 히브리서 2:14, "이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려 하심이라." 헬라어의 또
다른 버전은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무력하게 하셨으니 곧 마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에 대한 이 승리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분이 이와 같이 사탄을 이기신 것은 우리가 그분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항상 사탄보다 크셨습니다. 사람으로서
그분이 자신의 영역에서 사탄을 만나 그를 정복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대리자 대표(Substitute representative)로 거기에 가셨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그분이 사탄의 권세를 박탈하셨을 때 마치 우리가 그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칭의 이후 사탄은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는 예수님이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6)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앉혀졌습니다: I WAS SEATED WITH CHRIST
그리스도의 영이 지옥에서 해방된 후 그분은 그분의 몸을 불멸로 부활시키면서 그 몸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도행전 2:31, “그가 이것을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라.”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사람으로서 그분은 이 영적 흑암의 세상 통치자들에 대한 권세를 소유하셨습니다. 그 권세로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34-35,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장 13절에서, 우리는 아들에게 드렸던 찬송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말씀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으로 만들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히브리서 10장 13절은 그분이 그분의 원수들이 그분의 발등상이 되게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1장 20-23절과 관련하여 연구해 봅시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충만함이니라." 그분은 법적으로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만물을 그분의 발(즉, 그분의 몸인 교회) 아래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날 그분의 원수들(사람의 원수들, 사탄, 죄, 병)이 그분의 발(교회) 아래에 완전히 놓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에베소서 2:6, "또 우리를 하늘의 장소들에서 그분과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우리의 것들인 것을 실제로 취하고, 또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원수를 우리의 발 아래 두어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왕들로서 다스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우리가 원수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임). 로마서 5:17을 매우 주의 깊게 읽고 연구하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For if by the one man's offense death reigned through the one, much more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the gift of righteousness will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사람과 그리스도의 동일시는 사람의 아담과의 동일시를 통해 비롯된 인류 안에 있는 사탄의 일을 파괴해 왔습니다.
<요약>: 동일시 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됨. 사람의 영원한 상실을 위한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됨. 저주받은 땅 아래에 장사됨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됨. 그분이 보았던 지옥의 깊은 지하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됨. 부활의 권능과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됨. 바로 이 시각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됨 – E.
W. KENYON
<질문>:
1.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여섯 단계의 각각에
대해 성구를 제공하며 충분히 토론하십시오.
제22과. 하나님의 두 창조: GOD'S TWO CREATIONS
그리스도와의 동일시에 관한 마지막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가져오신 단계를 연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에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로 일어나셨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5-6,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그가 장자를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그는 인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영적 사망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니라.” 그는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입니다. 그는 새로운 종류, 즉,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men)의 머리입니다. 그분은 사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된 피조물인 사람들의 머리이십니다. 사람이 이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와 주(as Savior and Lord)로 영접할 때마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요 5:24).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의 영적 창조(a Spiritual Creation)인 그리스도 안의 이 새 창조는 아담 안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실재(reality)입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비교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창조>: Creation in Adam:
우주의 창조와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의 창조는 우리로 하여금 지적이고 전능하신
창조주를 지향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결심(determination)에 의해 마인드(MIND:
정신)가 눈 먼 사람만이 다른 것을 믿을 것입니다. 지적인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믿어야만 하는 것을 우리가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직면하는 첫 번째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는 존재합니다. 여기서 적어도 그의 지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생명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사람이 셀 수 없는 세대를 거쳐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움을 되돌리는 것일 뿐입니다.
첫 사람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인생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오늘날까지 과학은 답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추측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과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생명이 죽음에서, 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과학자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우리의 모든
현대 지식과 모순되는 이론을 자신의 믿음의 바로 그 기초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과학 실험은 생명이 선행하는 생명(antecedent life)과 독립적으로는 생성될 수 없으며, 무생물은 이미 살아 있는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생명이 될 수 없으며,
생명은 오직 생명에 의해서만 생성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창조주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연 발생이 발생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수십억 년 전에 발생했을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또한 단지 하나의 생물 세균만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원시 생명의 세균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발전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느 것이 더 믿기 쉬운가요? 정직한 사람이 지성 있는 창조주를 믿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고도로 복잡하고 지능적으로 조직된 형태의 생명체와 함께 우주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물질의 살아 있는 세균이 있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불멸에 대한 열망으로 전율하는 인간과 같이 지능적이고 의식이 있는 존재가 지능이 없는 무의식적인
물질에서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인간의 창조는 지적인 창조주를 가리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창조자는 인간에 대한 가장 부드러운 사랑과 돌봄의 지성적인 창조자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창조를 연구할 때, 행성, 별, 혜성이 모두 질서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망원경을 통해서든; 또는
가장 극미한 형태의 생명에도 동일한 법칙과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현미경을 통해서든, 우리는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극도의 노력과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놀라운 솜씨로 일몰과 무지개를
그리신 바로 그 창조주께서 하나의 파리(fly)의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를 가장 찬란한 색으로 만지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이 호기심을 갖고 가장 강력한 인공 렌즈 아래서 보살피고 사려 깊게 생명을 연구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생명의 모든 순간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형태의 생명체는 너무 작아서 한 방울의 수분에서
20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디자인되었습니다.
<사람이 목표인 그곳>: The Place Man Held: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나타나는 이 보살핌과 사려 깊음이 무슨 목적으로 나타나는지 묻습니다. 정답은 사람(Man)입니다. 창조의 모든 단계는 사람을 목표로 삼습니다. 들판, 과일, 채소, 숲, 가축, 아름다움이 있는 땅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이 집을 준비하면서 모든 별뿐만 아니라 모든 먼지 입자에도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분과 함께 피조물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을 위한 그분의 마련에는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려 깊음과 사랑이 나타납니까!. 첫 번째 창조인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의 창조는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과 그분의 계획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마음(heart)에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문제가 된 창조>: Creation Blighted:
우리는 과거
연구에서 재앙이 이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의 생명을 황폐화시킨 것을 보았습니다. 사탄의 본성인 영적 사망이 사람의 영에 들어와서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창
3장).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사탄의 저주를 받은 이 창조물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활동하지 않고 단지 세상사를 구경만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 그토록 호의적인
자연의 힘은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해 너무나 파괴적이고 무관심합니다. 모든 요소에는 축복과 저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태양, 바람, 물,
불은 종종 고통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 영적 죽음의 통치 기간 동안 창조주께서는
결코 무활동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이 세상에 (처음) 오도록 준비하셨을 때보다 덜 활동적이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인간 역사의 시대를 통해 내려오면서 모든 단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거래는 하나의 목표,
즉 영적 죽음과 사탄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해방시킬 인간의 영적 창조인 새 창조를 향해 있었습니다. 새 창조를 위한 준비에는 인간의 옛 창조에 쏟아부은 것 못지않게 생각, 관심,
사랑이 아낌없이 주어졌습니다. 첫 창조가 사람을 향한 창조주의 사랑을 드러냈다면
새 창조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첫 번째 창조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엿볼 수 있다면 새 창조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어떤 창조적인 능력도 혼자서는 이 새 창조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낙원 안에서 창조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 The New Creation in Christ: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새 창조가 생겨난 단계를 연구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영적인 죽음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형벌을 짊어지고 그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새 창조를 가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인간의 비애와 불행의 시대 동안 활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오, 창조주이신 그분은 인간의 죄의 책임을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영적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짊어지고 그 형벌을 받으셨으며
인간이 고통받을 필요가 없도록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최초의 피조물은 창조주의 손에서 갓 태어난
낙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지옥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옥은 사탄과 그의 군대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이 무서운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공의의 요구가
지불될 때까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합법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5, “우리의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느니라.” 이곳은
새로운 피조물이 합법적으로 탄생한 곳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았을 때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받았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지옥에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27,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그가 이 일을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의
혼이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2장 24절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을 때 그분은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겪으셨던 격렬한 고뇌에서 풀려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탄생이었습니다. 첫 번째 피조물은 모든 피조물의 면류관이자 절정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지옥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공동 상속자이신 아들의 형상을 닮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새 창조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불하신 대가입니다. 새 창조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말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위해 행하신 법적인 면을 다루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구세주와 주로 영접함으로써 생명력 있고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갑니다(롬 10:9-10). 고린도후서 5:17. 그 때, 그는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제 오늘날 새 창조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연구합시다. 이 창조주는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에 대해 무관심합니까? 그분의 유산은 새 창조입니다. 인간을
위한 모든 꿈, 모든 계획은 새 창조 안에서만 성취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연구합시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리스어의 문자적 번역).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 예수가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의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그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새 피조물에
대한 설명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그분이 낳으셨던 이 새 사람의 의(righteousness)를 묘사할 수 없습니다. 새 창조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바로 그 의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더 이상 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그것이 최고의 표현이라는 말임).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새피조물은
그리스도가 그러하신 것처럼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새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히 구출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새 창조가 관계되는 한 사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2:14, "이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려 하심이라." 사탄은 자연인의
아버지이자 주인이며 죽음의 권세를 다스리는 통치자이지만 새 창조물에게는 합법적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6:1-13은 그리스도께서 영적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로우신 것처럼 새 창조도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사람은 하나님의 바로 밑의 통치자(God's under-ruler)였지만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14-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 아버지-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 새 창조물을 바라보십니다. 새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그리하셨던 것만큼 사탄과 관계가 없습니다(옛사람과 달리 사탄에 의한 지배와 전혀 무관하다는 말임). 요한복음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새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7: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는 그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들으신 것처럼 새 창조물의 요청을 들으십니다. 이 새 사람은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전능하신 창조주를 대신하여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3-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진 사람의 생명은 능력과 권세에서 얼마나 무한한가!
<질문>: Questions
1. 로마서 8장 29절의 "이는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 다음 구절을
설명하십시오.
2.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무엇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3. 인간의 창조가 지적인 창조주를 가리키는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4. 창조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5. 타락으로 인해 피조물이 어떻게 황폐화되었는지 보여주십시오.
6. 하나님은 새 창조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7. 왜 새로운 피조물이 나타나야 했습니까?
8.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의 생명은 능력과 권세에 있어서 얼마나 무한한가를 말하십시오.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새사람은 얼마나 의롭습니까?
10. 그분을 향한 아버지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제23과. 예수의 이름: THE NAME OF JESUS: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가져오셨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속의 근거 위에서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의 삶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 피조물,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할 때 그의 영 안에서 실제적인 새 창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 사망은
그의 영에서 근절되고 사탄의 사망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면 영생(eternal
life), 즉, 하나님의 성품(the nature of God)이 그의 영(spirit)에 전이됩니다(imparted). 이것이 일어나는 새 창조(the New Creation)입니다. 그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begotten). 요한일서 5:1, “누구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 사람(고후 5:17)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합니다. 로마서 8:16, 1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 이름의 필요>: Need of the Name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옮겨졌지만 여전히 사탄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립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불립니다.
“너희가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좇아 행하였더니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탄과 그의 세력은 여전히 유혹과 시련(temptations
and trials)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할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공기는 아버지와의 교제를 파괴하고 주님의 사역에서 우리의 유용성을 박탈하려는 적대적인 세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The
very air about us is filled with hostile forces which are attempting to destroy
our fellowship with the Father and deprive us of our usefulness in the Master's
service).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탄과의 이 싸움에서 사용할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무기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부여된 권세를 연구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님이 그것을 어떻게 얻으셨는지 연구할 것입니다.
<그 이름의 삼중적인 위대함>: The Threefold Greatness of the Name
예수의 이름 안에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이름을 상속받았기 때문이고, 그가 그의 이름의 권세를 정복하여 얻었기 때문이며, 또, 그의 이름이 그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4,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지으셨으니 그는 그의 영광의 광채요 그의 형상이니라 실상 그는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느니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시요, 그의 광채이시며, 만유의 상속자로서,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의 이름, 즉, 그의 이름의 위대함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측정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는 정복으로 자기 이름의 권세를 얻었습니다. 골로새서 2:15, “정사들과 권세들을 멸하시고 십자가에서 드러내어 승리를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림은 어둠의 군대와 무서운 전투를 벌이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시기 전에 거둔 엄청난 승리를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여백은 "정사와 권세를 자기에게서 벗어버리고" 라고 말합니다. 온 귀신의 무리(host)가 예수님이 그들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켰고, 사람의 구속이 사실이었다는 부르짖음(cry)이 나올 때까지, 단순히 그분을 늪에 빠뜨리고 압도하려고 의도했고, 그분을 두려운 속박으로 가두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부르짖음이 그 어두운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마귀의 군대를 물리치셨고, 히브리서 2:14에 묘사된 것처럼 무서운 전투에서 사탄을 만났습니다. "이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무력화(마비)시키려 하심이라" (Rotherham).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귀신의 세력들과, 거기에서 그분과 함께 나르셨던 죄책과 죄와 병의 무서운 짐을 스스로 벗어버리신 후에, 그분은 사탄과 씨름하여 그를 정복하셨고 그를 마비시켰고 채찍질당하게 하셨고 패배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1-22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서 그의 모든 갑옷과 그의 전리품을 나누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은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졌을 뿐 아니라 사탄이 신뢰하는 바로 그 갑옷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모든 지옥을 패배시켰고, 인간의 고대 파괴자(ancient destroyer: 사탄을 말함)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승리자로서 하늘, 땅, 지옥의 세 세상(three worlds)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저주받은 자들의 어두운 지역에 있는 자신의 군대(cohorts), 자신의 종들(servants)보다 먼저 사탄을 정복하셨고, 그리고 그분이 거기에 절대적인 승자(Victor)요, 주인(Master)으로 서셨습니다. 그런 승리를 거두신 후 그분이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라고 말씀하신 것이 놀라운 일입니까? 그분은 우주의 주인이자 통치자로 서 있습니다. 사탄의 통치(dominion)에 대한 이 모든 권세(authority)는 그 이름(예수의 이름)에 부여됩니다. 죄, 질병 또는 기타 사탄의 영향력이나 능력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이름에 부여됩니다(invested). 셋째로, 그의 이름의 위대함이 그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9,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만물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의미의 추론(inference)은 하늘에 알려지고 다른 곳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있었다는 것과, 이 이름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기 위해 보관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알려진 것처럼, 그 영원하신 아들(the Eternal Son) 예수님은 이 이름을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이 이름에(at this Name) 하늘과, 땅과, 지옥의 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그리고, 모든 혀가 그분이 세 세계의 주님이심을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The inference is that there was a Name known in Heaven, unknown elsewhere, and that this Name was kept to be conferred upon someone who should merit it, and Jesus as we know Him, the Eternal Son as He is known in the bosom of the Father, was given this Name, and at this Name every knee shall bow in the three worlds, Heaven, Earth and Hell - and every tongue shall confess that He is the Lord of the three worlds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그것이 왜 주어졌습니까?>: Why Was It Given?
우리는 이제
왜 이 이름이 주어졌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 그분이 물려받거나 달성하거나 그에게 부여된 이름에 대한 모든 언급은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분의 이름의 위대함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3-7은 그분이
영적 사망에서 살아나셨을 때(5절) 그분의 이름을 상속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고 말씀하셨을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은 이것이 그분의 부활 때 일어났다고 계시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이 일을 이루게 하신 것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부활하신 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계시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19-23. 그분은 모든 능력과 통치권 위에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8-10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셨을 때 그분이
부활하신 후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부여하셨다 고 계시합니다. 우리는 왜 이 이름이 그에게 부여되었는지 묻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였습니까? 거의 이천 년 동안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그것을 사용하셨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필요로 하셨습니까?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거나 그 이름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합니다.
예수 이름의 사용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은 그분의 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그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이곳에서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상속받은 모든 것이 그 이름 안에 있고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 그 이름 안에 있으며 그 이름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이 투자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예치(deposit)를 만드셨는데, 그것 위에 교회는 교회의 모든 필요를 위해 (그 예치된 것을) 끌어올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He has
made this on which the church has a right to draw for her every need). 그 안에 신성의 충만함, 영원의 부,
하늘과 땅과 지옥에 알려진 다른 모든 능력이나 권세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The Name that has within it the fullness
of the Godhead, the wealth of the Eternities, and authority over every other
power or authority known in Heaven, earth and Hell, has been given to us). 만일 우리가, 그것의 능력과 전능함의 모든 것을 가지고 천국을 살필 수 있었다면,
만일 우리가 인류에 대한 그것의 통치권을 가지고 지옥의 지배의 어두운 영역들을 살필 수 있었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온 세상 전체를 살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 이름보다 더 큰 통치권(dominion)이나 권세(authority)나 어떤 능력(power)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예수의 이름만큼 크고 강력한 것은 없다는 말임).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상대로 그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간구들(petitions)에서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에서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위해 그분에게 주어졌으며 오늘날 우리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힘의 어떤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아멘!!!!)
<그 이름의 사용>: The Use of the Name
이제 이 이름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구해 봅시다.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그의 이름과 관련하여 하신 기도 약속을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4에 우리에게 주어진 헌장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마도 갈릴리 사람(예수님을 말함)의 입에서 나온 가장 놀라운 진술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 전능하신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분은 "너희가 믿으면, 또는 믿음이 있다면" 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것이고 우리 것은 믿음을 가지고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그 이름이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냥 사용하면 된다는 말임).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을 때 예수 이름을 사용할 권리와 특권(the right and privilege)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하며 하나님을 현장에 모셔오는 일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의 필요성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필요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2-14에서 자신의 이름과 관련하여 또 다른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들의 마음(heart)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thoughts)에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이 중단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사역은 끝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구원(healing and deliverance)을 가져다 주셨던 그분의 모든 놀라운 일들이 그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아들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에게 말씀하신 일들은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면에 그것들은 증대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여기 계시는 동안 그분은 그의 인간의 몸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셨고, 그분은 한 번에 한 곳에만 계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속이 완성될 것이고 그 결과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의 각 자녀는 예수님이 지역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을 지역적으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이름의 권세(authority)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큰 일들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그분은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여기 땅에서 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너의 대리인이 될 것이며, 네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이루어 주리라. 그것은 마치 내가 땅에서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싸움의 중심이 사탄의 세력에 있음을 아셨고 마가복음 16:1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리라." 그분은 사탄의 모든 세력과 영향력에 대해 우리에게 권세를 주심으로써 그분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위치를 완전히 갖추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18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동일한) 이름으로, 우리가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그들이 나을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귀신과 질병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만 합니다. 오, 우리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의 영혼이 감히 그 이름이 아버지께서 그것에 투자하셨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의미할 전능의 영역 안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말임).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기독교인의 경험에서 탐험되지 않은 고원입니다. 여기 저기서 우리 중 일부는 예수 이름에 부여된 권세를 체험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강력한 능력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아직 거해 올 수 없었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왜 새 창조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여 사용할 무기가 필요합니까?
2. 그분의 이름의 삼중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3. 예수께서 정복하신 결과 예수의 이름에는 어떤 권세가 부여되었습니까?
4. 누가복음 11:21-22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여주는지 보여주십시오.
5. 예수 이름의 위대함은 언제 그에게 부여되었습니까?
6. 예수님 자신도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이름은 누구를 위하여 주어졌습니까?
왜요?
8. 그 이름 안에 무엇을 예탁되어 있습니까?
9.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습니까?
10. 이 수업에서 당신 자신의 성장을 위한 어떤 가능성들을 봅니까?
제24과. 말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THE WORD, GOD'S REVELATION TO MAN:
우리는 최근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여러 단계를 밟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을 알려 주신
방법, 즉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신에 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계시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or 새피조물)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계시는 자신에 대한 증거일 뿐 아니라 새 피조믈과 그의 특권과 권세와 책임에 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계시는 그분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속과 하나님 자녀의 생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로는 적절하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수업에서 우리의 목표는 오늘날 성취된 것처럼 그 아버지에게 그 말씀(the
Word)의 완전한 신성함과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은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삶은 무력합니다.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God Works Through the Word: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격렬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싸워 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기 원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선포된 말씀의 능력으로 그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3.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말씀으로 태어났습니다(begotten, born). 야고보서 1:18, “그가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perishable; mortal)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imperishable; immortal) 씨(하나님의 씨: 성령을 가리킴: 요일 3:9)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말씀을 통하여) 되었느니라.”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양식과 생계(the sustenance)와 그의 영적 생명의 유지(maintenance)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우리를 세우는(build up) 것은 그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골로새서 1:5-6, “너희에게 이른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너희가 전에 들은 바, 너희가 들은 날부터 너희 안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말씀에 대적하는 사탄의 전쟁>: Satan's Battle Against the Word:
영적인 타락(spiritual declension)의 모든 기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낮은 인식에 의해 표시되었습니다(말씀을 잘 인식하지 못하여 영적 타락이 발생했다는 말임). 사탄이 기독교인들의 고문과 순교(torturing and martyrdom), 성경의 파괴나 불태움(the destruction or burning)이 교회의 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사탄)는 더욱 더 성공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방법은 교묘하게 말씀을 공격하여 그 말씀이 사람의 삶에서 무력하고 효과가 없게(powerless and ineffectual)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the Reformation) 이전 천 년 동안 기독교계에서 말씀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로드(James Lord)는 그의 저서 "역사의 등불 (Beacon Lights of History)"에서 동양 철학(Oriental philosophy)이 천년 동안 말씀의 권세를 찬탈했고(usurped) 기독교 세계를 지배했고 통제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이 그것의 자리를 잃었을 때, 구속도 그 자리를 잃었고 믿음도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천 년 동안 성경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수도원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틴어(Latin)로만 쓰여졌고 오직 성직자들(the clergy)만 그것에 대한 접근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중세의 영적 암흑(the spiritual darkness of the Middle Ages)의 원인입니다. 이것이 그 암흑기에 하나님이 활동하지 않았던(inactive) 것처럼 보였던 이유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자리를 잃었을 때 그분은 사람들의 삶에서 그분의 자리를 잃었습니다(When His Word lost its place, He lost His place in the lives of men). 참회, 연옥, 수도원, 십자군 전쟁(penance, purgatory, monasteries, and the Crusades)이 성장했던 것은 동양 철학으로부터 였습니다.
<종교 개혁에서 말씀의 위치>: The Place of the Word in the Reformation
종교 개혁이 왔을 때, 그것은 말씀이 소수의 사람들의
삶에서 역사하기 시작했을 때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의 자리를 흘끗 보았고 그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인류에게 빛과 생명을 가져온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가정에 성경이 보급된 것은 종교 개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말씀을
비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성경을 더 이상 수도원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안에 가둘 수 없게 되자, 그는 신조들과 교리들(creeds and doctrines)안에 그것을 가두었습니다. 종교 개혁과 값싼 인쇄 수단은 모든 가정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개혁의 지도자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하여 신조들과 교리들을 세우게 하였고,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성장과 발전으로부터 방해했습니다. 종교 개혁의 어떤 한 명의 지도자도
모든 빛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일으키셨고 각 사람에게 빛의 한 부분을 주셨습니다(전체를 주신 것이 아님을 말함). 그러나 이 사람들은 대체로 중세의 산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련의 신조 안에 자신을 가둘
때마다 그는 말씀 위에 더 많은 빛을 차단하고 그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분당(divisions)을 일으켰고 교회를 세상에게 치욕(reproach)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기독교의 진정한 발표(presentation:
제시)를 방해했습니다. 그 결과 구속이 사람들의 삶에서 일할 공평한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의 권세(authority)에 대한 맹렬한 싸움이 일어나도록 만들었고, 오늘날의 상태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말씀 대신에 그들이 생각하기에 더 실용적이고 현대 문명과 조화를 이루는 다른 주제들을 설교하고 있습니다(Many churches are preaching, in the place
of the Word, other themes which they consider more practical and in harmony
with modern civilization). 반면에 오늘날 진리를 전파하고 가장 영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성함과 그것이 그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지 않습니다(While on the other hand, those who today
are preaching the truth, and are considered the most spiritual, have no true
conception of the sacredness of the Word of God, and the place it should hold
in their lives). (문제의 요인이 말씀에 관한 낮은 인식 때문이기에 그 문제를 바로 깨닫고 해결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슴).
<정신적 동의와 그 기원>: Mental Assent, and Its Origin:
말씀의 지극히
평범함은 무지와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오늘날 사탄이 말씀을 비효율적으로(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정신적인 동의라는 무기입니다. 이 무기는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정신적 동의는
"믿음(faith)"이라는 용어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신적 동의와 믿음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각각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정신적 동의 . . . versus 믿음>: Mental Assent . . . versus Faith:
믿음은 말씀에 대한 행동입니다. 믿음은 두려움 없이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동의는 성경이 참되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몇 가지 삽화가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나는 그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9-10에 있는 그의 말씀이 그렇게 선언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증거를 받기 전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깨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감정에 상관없이 그것에 따라 두려움 없이 행동합니다. 그는 담대히 말씀을 자신의 고백으로 삼습니다.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동의자(Mental Assentor)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구원받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구했지만(asked in) 나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믿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정신적 동의의 하나입니다. 그는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에 관해 인식이 없습니다. 만일
그가 믿었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됩니다 내가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5:24). 정신적 동의는 아무 행동(action)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고백(confession)이 없습니다.
정신적 동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치유를 받는 것을 강탈했습니다. 신자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질병이
그의 몸에 나타날 수 있지만 그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그가 고침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The
disease may be manifest in his body, yet he is acting upon the Word which
declares that by His stripes he is healed). 그가 기도를 받은 후에 치유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나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그들이 나을 것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It
may be that after he has been prayed for, he has witnessed no healing; yet he
says, "I am healed, because the Word declares that in Christ's Name they
shall lay hands on the sick and they shall recover). 정신적 동의자인 한 기독교인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참됨을 믿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이 성경 구절을 믿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많은 기도를 받았는데 왜 내가 치유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정신적 동의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하고 질병으로 수년 동안 고통을
겪었습니까? 오늘날 정신적 동의의 영역에 살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메마르고 열매 없는 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그들의 삶과 기도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They
have never learned to live by the Word). 그들은 연약함과 실패와 궁핍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인식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They
live in weakness and failure and want, because they have no conception of the
real meaning of believing God's Word, of really acting upon the Word).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s in Christ)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고후 5:17). 그들은 하나님의 바로
그 의가 되었습니다(고후 5:21).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롬 8:17). 그의 이름의 권세가 기도에서 그들의 것입니다(요 16:23-24);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빌 4:19). 그러나 그들은 의(righteousness), 예수 이름 안에 권세, 또는 능력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태도가 정신적 동의의
하나였으며 사탄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업을 강탈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동의의 원인>: Cause of Mental Assent:
정신적 동의의
원인은 우리가 말씀에 완전히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 성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가르침에 익숙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 오래 전에 개인적으로 성경이 참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정신적 동의였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기 오래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노라고 공언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 이 동일한 정신적
동의가 평생 동안 우리를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더 완전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정신적 동의였습니다. 삶을 통해 이러한 정신적 동의의
태도는 미국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성경은 서재 위의 책장 위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반박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그것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 번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정신적 동의 이상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연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 자신의 말씀이나 메시지에서 우리를 위해 실제로 무엇을 갖고 계셨는지 계속해서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했지만 우리의 행동은 반대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자주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실제로 거듭날 때가 왔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새 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도움,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정신적
동의였습니다. 우리가 감히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적습니까? 우리는 약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병자들을 위해 간증하고 기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힘으로 채울 더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체험을 구하고 138번의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승리의 삶은 아직 훗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의 핵심이 우리의 정신적 동의가 말씀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권세가 이미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경구절을 외우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지 않은 채 자주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으셨고(고전
1:30),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고전 5:21) 선언하신 그분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 많고 약한 상태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끊임없이 자백하고 회개하면서 자격 없는 흙벌레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겸손의 한 형태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의롭게 만든 구속보다 죄와 죄의 능력을 더 많이 만들었습니다. 의는
마치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죄나 정죄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눈물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우리의 지위와 예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기도할 권리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약속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2:26의 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응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the faith without corresponding actions is dead). 이것은 정신적 동의의 정의입니다. 상응하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정신적 동의입니다. 아버지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을 빼앗아 갑니다. 만일 내가 말씀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삶의 비결은 계시록 12장 11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구속의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증의 말씀은
그 말씀에 따라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이 그것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사탄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채찍으로 치료받았습니다. 모든 것에서 나는 정복자보다 큽니다.
나의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니 내가 염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모든 모순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이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말로 만듭니다. 그분이 선언하신 것을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신적 동의에서 해방되었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다음 수업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말씀에 대한 행동의 장소로 데려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질문>: Questions
1.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시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셨습니까?
2. 말씀은 하나님 자녀의 거듭남과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합니까?
3. 사탄은 기독교인의 순교가 교회의 성장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다른 수단을 사용했습니까?
4. 왜 중세에 하나님은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5. 무엇이 종교 개혁을 가져왔습니까?
6.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성장이 왜 방해를 받았습니까?
7. 말씀이 우리 삶에서 지배하지 못하도록 오늘날 사탄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8. 정신적 동의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9. 정신적 동의와 믿음의 차이를 보여주십시오.
10. 정신적 동의가 우리의 유산을 어떻게 앗아가는지 보여주십시오.
제25과.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 THE PRESENT MINISTRY OF CHRIST
우리는 우리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천 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연구했습니다(갈라디아서 4:4).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하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연구했습니다(히브리서 2:14).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 그가 지금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 거의 이천 년 동안 해오신 일을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현 사역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소홀히 여겨져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분의 죽음과 부활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분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살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현 사역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적은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죄를 짓게 한 아들" (고린도후서 5:21)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 "지극히 높으신 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자"(빌립보서 2:9-10). 찬송가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을 이해한 교사와 작사가가 얼마나 적은지 깨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너머의 예수님, 비천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또 다른 그룹은 십자가에서만 그분을 봅니다. 극소수만이 십자가와 무덤 너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온유하고 천한 갈릴리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더 이상 죄가 된 아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탄과 죄와 질병과 죽음을 정복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 28:18). 그분이 말씀의 보증이시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두려움 없이 행동할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새 언약의 보증인이십니다. 히브리서 7:22, “예수는 이로써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언약의 보증은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8장 6절 "이제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더욱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새 언약은 제정되었고 말씀에 근거하며 그분은 보증인이십니다. 오늘날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 이 사람은 이 말씀의 보증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약속의 모든 말씀을 이루십니다. 이제 이 새 언약 안에서 그분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연구합시다. 바울이 받은 계시에서 하나님은 휘장을 걷으시고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High Priest), "중재자"(Mediator), "중보자"(Intercessor), "대언자"(Advocate), 새 언약의 "보증인"(the Surety)으로 앉으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Jesus, Our High Priest
우리는 구약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해마다 한 번씩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황소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땅에 있는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 9:25; 10:1-4을 읽으십시오. 제사장들은 날마다 서서 섬기며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같은 제사를 드리며(히 10: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자신의 피로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리서 9:12, 23-27).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으셨을 때 그분은 공의의 요구가 충족되었고 사람이 합법적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으로 죄를 제거하셨습니다(히 9:26). 아담의 대반역죄는 죄를 위한 그분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해결되었습니다(히 10:12). 자신의 희생으로 사람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히 9:10-14). "거룩하게 하다"는 "나누다(set apart)", "분리하다(separate)"를 의미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사탄의 왕국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리되셨던 것처럼 사탄의 지배권에서 분리되었습니다(요 17:14).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만나셨을 때(요 20:17), 그분은 그녀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자신이 치른 형벌의 표인 자신의 피를 가지고 아버지께로 가셨으며 사람이 만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그분의 피를 성소로 옮기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소의 사역자이십니다(히 8:2). 히브리서 8장 2절에 나오는 "성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는 "거룩한 것들"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것"은 우리의 기도와 경배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어떻게 경배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분은 종종 우리의 조잡한 탄원과 경배를 아버지께 아름답게 하십니다. 이 "거룩한 것"은 아버지께서 받으실 만한 우리의 "영적 희생"입니다. 모든 기도, 모든 예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질 때 아버지께 받아들여집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히브리서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을 연구하십시오. 그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입니다(히 2:17-18).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십니다(히 4:14-16).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히 6:19).
<중재자 예수>: Jesus, the Mediator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때 그분은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사람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어떠하심 때문에 사람의 중보자이시며, 자신이 하신 일 때문에 사람의 중보자이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입니다. 요한복음 1:14.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시니...말씀이 육신이 되신 말씀이십니다(요 1:1).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으로 존재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분이십니다(빌 2:8-9).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사람과 동등하십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를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에베소서 2:12). 그리고 사탄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요 16:11). 이것은 우리에게 두 번째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하신 일 때문에 사람의 중보자이십니다. 골로새서 1:22, “이제는 자기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셨으니.” 고린도후서 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먼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불의했습니다. 그가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동안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어느 중재자도 그를 위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므로 이제 사람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때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실 때까지, 피 흘리는 희생,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 천사의 방문이나 꿈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드린 것을 근거로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완전하게 하시고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으며 하나님이 합법적으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하셨고 그를 의롭게 하셨으며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접근할 법적 권리가 있습니다.
<중보자 예수>: Jesus, the Intercessor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분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자연인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중재자로서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께 소개합니다. 요14:6, 예수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니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느니라. 사람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는 그를 위한 중보 사업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중재자(Mediator)이시지만 그리스도인의 중보자(Intercessor)이십니다. 우리에게 오는 첫 번째 질문은 "왜 하나님의 자녀는 그를 위해 중보할 누군가가 필요한가?"입니다. 그 답을 로마서 12:2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마인드(mind: 정신, 생각)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존재했던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사탄을 따라 행했습니다(엡 2:1-3). 그는 우리의 마인드를 지배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니 우리의 마인드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4은 우리에게 새롭게 된 생각(a renewed mind)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거듭남은 즉각적이지만 마인드를 새롭게 하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그 성장은 우리의 말씀 연구와 묵상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intercession)를 필요로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여러 번하는 것처럼 아버지와의 교제를 긴장시킵니다. 그때 다시 우리는 우리에 대한 마귀의 박해 때문에 그분의 중보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사람들의 핍박이 아니라 귀신들의 핍박입니다. 마태복음 5:11-12은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해를 언급합니다. 귀신들은 의를 위하여 우리를 핍박합니다(Demons persecute us for righteousness' sake).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세를 온전히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여러 번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히 7:25). 어느 누구도 어떤 것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를 비난할 수(or 책임을 부과할 수) 없습니다(No one can lay anything to the charge of God's child).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God has declared him righteous). 그를 정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There is no one to condemn him). 예수님은 그를 위해 중보하시기 위해(to make intercession) 살아 계십니다(롬 8:33-34).
<변호자이신 예수님>: Jesus, the Advocate
우리는 우리의 중재자(our Mediator)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중보(His Intercession)의 감미로운 영향력을 느꼈습니다(Mediator와 Intercessor의 차이 구분). 이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Advocate: 변호자)로 알고자 합니다. 오늘날 단절된 교제 속에 살고 있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대언자이심을 알았거나 알았더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거듭나지 못한 마음과 사탄의 박해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죄를 짓고 교제를 깨뜨립니다. 아버지와의 교제를 끊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정죄를 받습니다. 만일 그에게 변호인이 없다면 그는 슬픈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1:3-9은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어 우리의 교제를 깨뜨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써 그 교제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 역할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순간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말씀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의로우시고 미쁘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그것을 행하심에있어서 완전히 의로우실 수 있습니다(이사야 53:6). 또한 우리가 고백하는 순간에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들을 쓸어버리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변호자로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교제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회복의 느낌을 받지 못한 채 여러 번 죄를 자백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대언자이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자백했을 때 용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고백하는 순간 아버지께서 용서하신다고 선언하는 말씀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용서를 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깨어진 교제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죄를 짓고도 죄의 용서를 빨리 구하지 않아서 교제가 깨어진 상태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임. 그것은 큰 피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임).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은 잊어버리십니다. 그분의 자녀는 결코 자신의 죄를 다시 생각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보증인이신 예수>: Jesus, the Surety
예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보증인이십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대제사장은 구약의 보증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실패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속죄의 피는 그 효력을 잃었습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며 새 언약의 보증인이십니다. 히브리서 7:22, “예수는 이로써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하나님 우편에 우리를 위해 계시는 한 분이 계심을 압니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고 계십니다. 그는 항상 입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위치는 안전합니다.
<질문>:
1.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세 가지 견해는 무엇입니까?
2. 옛 언약의 대제사장이 어떻게 새 언약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모형이었는지 보여주십시오.
3.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중보자가 되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시오.
5. 하나님의 자녀에게 중보기도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6. 마태복음 5:10-12에 언급된 두 종류의 박해는 무엇입니까?
7. 그리스도는 언제 우리의 변호자로 행동하십니까?
8.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자신의 변호자로 아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새 언약의 보증인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10.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의 다섯 단계를 말하고 각각에 대한 성구를 제시하십시오.
제26과. 치유: HEALING
치유의 주제는 많은 논란이 있어온 주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치유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다른 태도가 존재합니다. 한 그룹은 치유가 오늘날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치유가 기적이고, 기적들은 사도 시대에만 속했고 오늘날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이론에 근거합니다. 또 다른 그룹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특별한 기도나 믿음의 특별한 행위에 대한 응답으로 치유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세 번째 그룹은 그 몸에 대한 치유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법적 권리이며, 그의 영에 대한 죄 사함을 받는 것과 동일한 근거로, 그는 그의 육체적인 몸의 치유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말씀의 빛 안에서 이 세 가지 가르침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태도는 기적의 정의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쉽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Webster에 따르면 기적은 물질적 또는 물리적 영역에서 명백히 자연 법칙에서 벗어나거나 이러한 법칙에 대해 알려진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 또는 발생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자연 법칙의 영역 또는 인간 활동의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현장에 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직접 접촉하실 때마다 기적이 행해집니다. 그 작음과 상관없이 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과, 모든 거듭남(새로운 탄생)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과 직접 접촉하시는 치유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과 직접 접촉하시어 인간에게 자신의 본성을 부여하시는 거듭남과 같이, 기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때 그는 치유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과 관계 없이, 그가 그분께 한 요청에 대해 응답해 달라고 간청할 때 치유와 같은 큰 기적을 달라고 요청합니다(사람들이 실상 큰 기적을 구하면서도 말로는 기적이 끝났다고 부인하고 있기에 앞뒤가 맞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임). 기적이 사도 시대에만 속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단순한 구경꾼이나 암호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완전한 오류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다른 두 믿음의 쟁점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는 바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두 번째 태도가 올바른 가르침이라면 세 번째 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두번째 태도가 맞으면 세번째는 자동적으로 틀릴 것이라는 말임).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의 특별한 행위에 대한 응답으로만 치유하시고 그분의 뜻이 있을 때만 치유한다면 치유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속하지 않으며 구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치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구속의 일부라면 치유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속하며 치유를 얻기 위해 특별한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치유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구속 안에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것(치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병과 질병의 기원>: Origin of Sickness and Disease
치유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질병, 병, 죽음의 기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대반역죄의 결과로 영적 죽음이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왔음을 보았습니다. 인류를 지배해 온 이 영적 죽음은 인간에 대한 죄와 질병과 죽음의 지배가 성장한 토양이었습니다. 인간의 육신의 병, 질병, 죽음은 영 안에 있는 영적 죽음의 나타남(manifestation)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지 않았다면 질병과 죽음은 결코 사람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되었을 때 그의 통치의 결과 중 하나는 질병균으로 공기를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때부터 지금까지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질병 미생물은 인간의 가장 큰 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악의 존재는 많은 진지한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의 믿음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악이 이 세상의 왕자이자 신으로서 인류에 대한 사탄의 통치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악의 통치에 의해 깊은 감명을 받아 그들이 우주의 중심 원리가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틀렸습니다. 악의 근원은 창조주가 아니라 강탈자 사탄입니다. 악의 두 부분은 고통과 죄(pain and sin)입니다. 고통은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지만 인류가 알고 경험하는 고통의 주요 주체는 질병에 의해 야기된 고통입니다. 결론적으로 죄와 질병은 영적 죽음에서 태어난 쌍둥이입니다. 그들은 둘 다 사탄의 작품입니다. 죄(sin)는 영(the spirit)의 질병(disease)이고,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처럼, 약함(sickness)은 육체적인 몸의 질병입니다.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God's Attitude Toward Disease: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죄를 보시는 것처럼, 질병(disease)도 그분의 피조물(creation)인 인간의 삶에서 사탄의 일로 보십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하신 그분의 태도를 알리시기 위해 아버지-하나님(the Father-God)을 계시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의 깊게 그리스도의 삶(the life of Christ)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병(sickness)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이셨습니다>: Christ Was the Will of the Father: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중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 평화(peace)를 가져왔고 그들의 육체에 치유(healing)를 가져왔습니다. 치유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그분은 사탄(Satan)에게 압제당했던(were oppressed)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delivered). 이 구원(deliverance)에는 육신의 치유가 포함되었습니다. 만일 질병(disease)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포함되어야 했을 것입니다(질병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임). 마태복음 8:16-17과 마가복음 1:32-34을 읽으십시오. 만일
그것이 그랬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예수님이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셨기 때문임). 그분은 사람에게 계시된 아버지의 뜻이셨고,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몸에 대한 질병의 능력을 깨뜨리고
그를 육체적 고통(pain)과 모든 고통(suffering)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 본성(nature)의 영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물론 육체적인 부분에 대한 치유(healing)와 축복(blessing)을 선포했습니다.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 13:10-17입니다. 안식일에 18년 동안 병으로 앓던 여자를 풀어준 후 그리스도는 회당장들에 의해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이 여자를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사탄이 그녀의 육신을 묶은 연약함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사건은
마가복음 2:1-2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 그리스도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것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실제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 그 차이는 사람의 영 안에 있는 영적 죽음의 결과인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 동일한 영적 죽음의 결과인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속박된 인간을 다루고 계셨습니다.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와 그분의 사역에서 치유가 행해진 장소를 보다 완전하게 보려면 다음을 읽으십시오.
<구속 안의 치유>: Healing in Redemption:
요한일서 3장 8절은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아담의 대반역 범죄(crime of High Treason)의 결과로 사탄이 인간의 영적 아버지가 되었을 때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일을 파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 대한 사탄의 관계와 능력에서 사탄을 없애기(naught: 무효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4. 그분은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심으로써 아담의 죄의 결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구속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로마서 5:12-21을 주의 깊게 공부하십시오. 인간의 영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이 완전한 구속이라면 그것은 죄뿐만 아니라 질병으로부터의 구속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사람의 몸을 치유할 수 있는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53:4-6.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휘장을 걷어내시고 죄와 질병을 다루시는 그분을 보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고통을 많이 겪었으며 병을 아는 자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넷째 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는 우리의 질병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기뻐하사 병들게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죄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비통(griefs)과 슬픔sorrows)"을 읽는 이전 버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모든 문자적 번역은 "질병과 병(disease and sickness)"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악뿐 아니라 우리의 질병도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병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와 함께 죄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인드(mind)안에서, 예수님의 마인드 안에서, 말씀대로 우리의 질병과 죄는 그 주님(the Master)에 의해서 담당되어졌습니다(were borne). 그분이 그것들을 짊어지셨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짊어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감각 지식(Sense Knowledge)은 이것을 부인하려고 시도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질병과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켰다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의롭다고 선언되기 전에는 살아나실 수 없었습니다(로마서 4:25).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죄의 몸, 영적 죽음의 몸은 멸망되었습니다(롬 6:6). 죄는 그것의 힘을 잃었고 질병도 그리했습니다. 이사야 53:10은 히브리어로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고 그를 병들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죄와 함께 죄로 만들었고, 우리의 병과 함께 그를 병들게 하셨습니다. . . 그것은 인간에게 치유를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와 그것의 능력(power)과 그것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우리의 죄(sins)와 그 형벌(penalty)을 담당하셨습니다. 같은 근거로 그분은 우리의 질병(disease)과 고통(pains)을 짊어지셨습니다(bore). 그분은 우리를 그것들(질병과 고통들)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짊어 질 필요가 없도록 그것들을 짊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의 죄를 담당하는 자와 우리의 병을 담당하는 자(our sin-bearer and our sickness bearer)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죄가 되게 하셨고 병을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아버지 하나님(the Father-God)은 사람을 육체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계시하셨습니다. 이제 구속(Redemption) 안에서 그분은 그리스도 위에서, 질병과 병의 능력을 깨뜨립니다(Now in He breaks the power of disease and sickness upon Christ). 영적 죽음의 영역에서 권세를 가졌던 사탄은 무효화되었습니다(has been brought to naught: 히 2:14). 그 승리로 사탄의 일들인, 질병과 병은 없어졌습니다. 그분의 상하심으로 우리는 질병의 법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아멘!!!)
<오늘날의 힐링>: Healing Today: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람들의 영(spirits)과 육체(bodies)에 끊임없이 영향을미치는 이중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이중적이어서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오늘날에도 동일하며 영과 육의 이중적인 축복의 사역은 그의 지상 사역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의 영적 죽음을 짊어지셨고, 그분의 말씀으로 사람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질병을 짊어지셨고 그분의 말씀으로 치유를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큰 위임령(Great Commission)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그의 일을 맡으실 목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시기 위해 떠나실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그분의 대표자들은 그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그분이 여기 계셨다면 하셨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것을 위해 죽으셨던 세상에 대한 그들의 위임령에서 그분은 이중적인 사역이 계속될 것임을 계시하십니다. 첫째, 그 사명(commission: 위임령)은 사람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H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며 불신앙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이 사명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그런 다음 임무의 두 번째 부분인 마가복음 16:17이 나옵니다. "믿는 자들(those who believe)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 여기서(17절), "믿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16절의 "믿다"와 동일하지만 하나(16절)는 단수이고 다른 하나(17절)는 복수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같습니다. 사명의 첫 번째 부분에 바로 뒤따르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누가 분별할 권리를 가졌겠습니까? (What right has anyone had to separate these words of Christ which immediately follow His first part of the commission?) 그분의 말씀 어디에서 첫 단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고 마지막 단어는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만 언급된 것이라고 암시하신 적이 있습니까? 두 가지 약속 모두는 "믿는"(believing)이라는 어간 하나에 걸려 있습니다. 믿는 행위는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도합니다. 뒤따르는 기적적인 약속의 풍성한 것들은 믿는 그들, 즉, 문자 그대로의 "믿는 사람들"에 속합니다(믿는 사람은 영의 구원만 아니라 육체적인 치유까지 경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임). 사람이 첫 번째 약속은 그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았슴으로 굳게 붙들었고 다른(두번째) 약속은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랐음으로 뒤로 내던져 버려졌습니다(육체적인 치유에 대한 약속을 몰랐기에 치유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임). (그러나) 그분은 인간이 질병들을 감당하지 않도록 그것들을 짊어지셨습니다. 인간의 치유를 위한 공급은 이 안에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그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그들이 나으리라." 성령의 인도 아래 제자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이중적인 축복을 가졌었습니다(The ministry of the disciples under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had the same twofold blessing as had Christ's ministry). 그들에 의해 완전한 구속, 곧 영의 거듭남과 육신의 치유가 전파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사역에서 시작된 두 가지 축복의 흐름인 거듭남과 치유의 흐름은 그때부터 사도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계속되었습니다(The two streams of blessing which began from the personal ministry of Christ, a stream of regeneration and healing have continued from then, through the Apostolic Age, and to the present, wherever Christians have dared to act upon His Word). 그분의 구속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치유에 대한 우리의 권리(right)는 그분의 이름의 권세(authority) 안에 부여되었습니다(has been invested). 오늘날 그분은 사도 시대에 그것을 확인하셨던 것처럼(막 16:20)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 말씀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질문>:
Questions
1. 치유에 대한 오늘날의 세 가지 태도를 말하십시오.
2. 첫 번째 태도가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3. 세 번째 태도가 옳다면 두 번째 태도가 틀린 이유를 보여주십시오.
4. 질병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십시오.
5.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질병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어떻게 드러냅니까?
6. 질병이 영적 사망의 통치에서 온 것임을 계시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의 몇 가지 사건을 제시하고 설명하십시오.
7. 사탄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속에는 왜 치유가 포함되어야 합니까?
27과. 그리스도의 주 되심(or 주권): The Lordship of Christ
이 계시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이 우주에서 그는 주님의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으로서의 그의 사역은 너무 중요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을 다룬 25과에서 그것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아는 것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연구에 두 개의 완전한 교훈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700회 이상 "주님(Lord)"이라는 호칭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분은 아담이 상실했던, 창조물(피조물)에 대한 주권(the Lordship)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질병과 죽음과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축복된 진리는 그분이 인간의 개인적인 주인(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전 단원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사람의 권리, 영생 등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할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사탄, 주인(the lord)입니다. 두 번째는 정복자 그리스도(Christ, the Conqueror)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으로 만들어지신 그리스도(Christ made Lord)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 사람의 개인적인 주님(Christ, man's personal Lord)이십니다. 위의 개요에서 우리는 구속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갖고 있습니다.
<사탄이 주인됨>: Satan's
Lordship:
말씀(the Word)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삶의 사실들(the facts of life)이 사탄이 자연인(natural man: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즉,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을 말함)의 주인임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것을 인정하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30, “이 세상 임금이 오나니 그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느니라.” 바울이 받은 계시에서 사탄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립니다. 고린도후서 4:4,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탄과 그의 무리는 이 세상의 영적 통치자라고 불립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자연인은 그들의 규칙에 따라 걷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너희가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나 처음에는 사탄이 인류나 창조물에 대해 이러한 권세(authority)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Man)은 본래 주인이었습니다(the original lord). 하나님은 그에게 창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주셨고, 그를 그의 바로 아래의 통치자로(His under-ruler)로 삼으셨습니다. 창세기 1:26-31,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사람은 여전히 낮아지고 예속된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바로 아래의 지배자(God's under-ruler)로서의 그의 본래의 위치의 흔적(traces)을 그의 존재(his being)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 영역에서의 그의 발견, 지식에 관한 그의 분류, 그리고 자연의 힘에 대한 그의 이해와 활용을 통해, 그는 창조주의 마인드와 교제하는 그의 마인드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창조물(creation)을 다스렸던 그는 여전히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번성시키고 향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바로 밑의 통치자로서의 능력(ability)을 여전히 보여줄 것입니다. 그는 물을 저수지(swarm)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막을 정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모든 창조물의 소리, 형태, 색채의 조화에 감격했으며, 오라토리오, 조각된 대리석, 캔버스, 조경 정원에서 그것들을 재현했습니다. 그는 자연의 홀을 잡은 왕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지구, 즉, 집이 창조되었습니다. 단 한명의, 영원한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heart)에 온 우주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사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반역죄를 저질렀고 그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맡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통치자(ruler)가 됨으로써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사탄)는 자신의 본성을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사람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창 2:15-17; 3:1-24).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영적 사망의 진입과 인류에 대한 지배를 통해 사탄이 주인이 되어 통치해 왔습니다. 주의 깊게 다시 공부하십시오: 로마서 5:12, 14, 15, 17, 히브리서 2:14, "죽음의 권세" 와 함께. 사탄의 통치는 인간의 마음(heart)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suffering and misery)을 가져왔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광대한 지배권(dominion)을 사탄의 손 안에 넘겼습니다. 그는 주인에서 노예로 갔습니다(He went from Lordship to slavery). 심지어 동물과 식물의 왕국도 사탄의 주권 아래서 신음해 왔습니다(롬 8:20-24).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사탄의 통치(reign)아래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도록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반역죄를 범한 바로 그 앞에서 그분은 인류에 대한 사탄의 주권을 합법적으로 꺾을 분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15-18. (우리는 이 예언의 온전한 의미를 알기 이전에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리스도, 그 정복자>: Christ, the Conqueror
하나님은 아담이 행한 일(타락)을 무효화하실 수 없었습니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그 일을 그냥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는 말). 그리고 사람(man)은 구원자(the deliverer)가 오셨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에 대한 사탄의 주권(the Lordship)을 깨뜨리셨습니다. 수세대 동안(for ages) 사망(death: 죽음)의 영역에서 그 권세(authority)를 잡은 자를 완전히 폐하시고 (히 2:14).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 사탄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은 결코 그리스도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버지와 동등하게 영원 안에(in eternity)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은 사탄을 인류의 주로 만들었던 아담의 대반역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셨습니다(빌 2:2-8).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셨을 때에도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분은 성육신 하나님(God, Incarnate)이셨고, 그분의 신성(Deity) 때문에 사탄과 그의 세상 통치자들(his world-rulers)보다 더 위대하게 남아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4:30에서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Christ)은 그분에게 사탄과의 어떤 관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인성은 이 세상 신에게 그분을 복종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담이 반역죄를 범하기 전의 그와 같은 종류의 인성(humanity)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삶에서 사탄의 주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사람의 모범적인 삶을 가집니다. 사탄은 그분께 순종했고, 병과 질병은 그분의 종들이었으며, 자연의 모든 세력(force)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사탄을 이기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위해 그를 정복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웠고 사람은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질병의 능력을 깨뜨릴 수 있었고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했습니다. 그들은 이기심, 질투, 죄의 통치, 질병,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나왔던 그의 본성으로부터 구원(deliverance)을 필요로 했습니다. 인류, 개인에 대한 사탄의 주권은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사탄의 본성인 영적 죽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그리고, 우리와 연합한 분으로서 그분은 인류를 대신하여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 전투의 정확한 성격을 모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분이 사람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정복된 정사들과 능력들을 자신으로부터 벗어 버리셨다(He flung off from Himself the conquered principalities and powers)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15, “정사들과 권세들을 멸하시고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는 아담의 반역의 정확한 본질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의해 사탄은 아담의 주인이자 인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이 그 동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그의 본성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과 사탄은 그의 삶에서 새로운 주인인 사탄이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우리는 한 사람(아담)이 사탄을 인류의 주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6-12절, "그것은 내게 넘겨졌으니 내가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줄 것이다." 그처럼 우리가 그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사람, 왕관을 쓴 주인, 사탄을 몰아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의 완전한 구속이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주의: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얻으신 후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슴). 첫 사람은 사탄이 그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고, 인류는 그 거절(rejection: 하나님으로부터 쫒겨난 것)안에서 동일시되었습니다(창 3:22-24). 한때 죄가 되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이 그 지성소에 들어갔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졌을 때가 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사탄의 통치가 무효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사(the offering)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sanctify)는 "구별하다, 분리하다"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탄의 지배(dominion)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기 이전 처럼 사탄의 권세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영적 사망의 결과였던 죄들의 사함(a remission of sins)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8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선언되었습니다(man had been declared perfect before God). 히브리서 10:14, “저가 한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For by one offering He hath perfected forever them that are sanctified).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여져 지성소 안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 온 인류도 그러했습니다(엡 2:5-6).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사탄의 주권을 깨뜨리셨기 때문에 그 정복자(conqueror)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 “자식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그와 같이 혈육에 속하셨으니 이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면류관을 쓰신 주님>: Christ, Crowned Lord
사탄에 대해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승리(victory: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신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Lord)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을 때 그는 모든 통치(rule)와 권세(authority)와 능력(power)과 주권(dominion) 위에 일어나셨습니다(엡 1:12-22). 이 "통치...
권세"와 "주권"은 사탄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항상 더 크셨기(greater)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사람의 삶에 대한 사탄의 통치, 권세, 능력 및 지배로부터 사람이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한때 가졌던 통치권은 그가
그것을 다시 상실하지 않도록 그에게 다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잃어버린 주권은 사람을 위해 그것을 붙드신 그리스도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 삼으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행 2:36). 천사가 말하기를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태복음 28:6). 그리스도, 인자(the
son of man)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사탄의 주권을 깨뜨리셨습니다. 엡 1:19-21,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사 그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지배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하늘 처소 안의 그분의 우편에 앉게 하셨을 때,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그의 힘의 역사를 따라 믿는 우리를 향하여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그 안에 그의 정복의 권세를 부여하실 때 그를 주님으로서 삼으십니다.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All that He is as Lord is for us), 왜냐하면 그분의 주권의 권세가 그분의 이름에 부여되었고 그 이름은, 우리가 앞 장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주님이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다음 수업에서
우리는 "우리 개인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공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이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질문>: Questions
1. 사탄이 자연인의 주인임을 보여주는 세 개의 성구를 제시하십시오.
2. 사탄은 어떻게 사람에 대해 그의 권세를 얻었습니까?
3.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바로 밑의 통치권자로서의 그의 본래의 지위의 흔적들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습니까?
4. 그리스도는 왜 자신을 위해 사탄을 정복하실 필요가 없었는지 (즉, 왜 사람을 위해서
그리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5. 사탄이 결코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성구가 알려 줍니까?
6. 히브리서 2:14을 설명하십시오.
7. 골로새서 2:15은 무엇을 밝혀 줍니까?
8. 그리스도가 지성소에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들였던 사실에서 어떤 중요성이 있습니까?
9. 빌립보서 2:9-11을 설명하십시오.
10. 당신은 이 수업에서 각 성경구절을 주의 깊게 연구했습니까?
제28과.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계속): THE LORDSHIP
OF CHRIST (Continued)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 주인 되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Lord)"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은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셨었습니다. 그는 약함으로(in weakness) 십자가에 못박혔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그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그러나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주님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에서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압제와 심판으로(By oppression and judgment) 그분은 빼앗기셨습니다 (그분은 압제와 심판을 당했다는 말). 그러나 그분은 강력한 승리자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해 주권을
쥐고 있었던 사탄을 패배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저주받은 자들의 어두운
지역에서 자신의 동료들, 자신의 종들 앞에서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거기 그 무시무시한 장소에서 절대적인 승리자이자 주인(absolute victor and Master)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는 오늘날 사람의 고대의 파괴자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승리자로서 하늘, 땅, 지옥의 세 세계 앞에 서 있습니다(히 2:14). 그러한 승리들(victories)을 거두신 후 새롭게 그분이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 안에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으니" (마태복음 28:18)라고 말씀하신 것이 놀라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주님(Lord)으로 부활하셨고 오늘날 하늘이나 땅이나 지옥 안에 그의 이름의 권세에
순종치(obey) 않는 권세는 전혀 없습니다(빌 2:9-10).
<예수님의 주 되심의 필요성>: The
Need of His Lordship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관한 사람의 개인적인 필요성은 오늘날 사실상 잃어버린 진리입니다(그것의 필요성을 잘 모른다는 말임). 일반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오직 그의 죄(sins) 사함(용서)이 필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the unsaved man is taught only his need of forgiveness of sins). (그러나)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주님, 새로운 주인이 필요합니다(In reality, the unsaved man needs a new Lord, a new Master). 자연인은 죄에 대한 속박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그의 삶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The natural man lives in bondage to sin and rebellion toward God, because Satan is lord of his life). 아담의 범죄(crime)는 사탄의 주권(lordship)에 팔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영적 사망의 영역에서 주인(lord)입니다. 히브리서 2:14, "죽음의 권세를 잡았던 자 곧 마귀" (Him that had the authority of death, that is the devil). 인류는 아담의 반역의 죄로 그와 동일시되었고(로마서 5:12), 그 동일시 결과, 인류는 그들의 삶에 대한 사탄의 개인적인 주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영적 죽음의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사탄이 그의 삶에 대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결핍(want)은 그의 삶에 대한 사탄의 주권에 중심을 둡니다(center). 인간의 모든 고통(suffering)은 사탄의 인류에 대한 주권(lordship)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잔인함과 이기심(cruelty and selfishness), 우리 자신의 죄(sins), 병(sickness), 상황(circumstances)에 의해 야기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사탄의 통치에 추적될 수 있습니다(그러한 문제들은 사탄의 지배로 인해 야기된다는 말임). 그러므로 사람의 어려움은 새로운 주님의 필요성에 중점을 둡니다. 사탄은 잔인한 작업 감독자입니다. 그는 영혼과 몸 둘다를 지옥에서 멸하는 자입니다 (마 10:28). 사람은 사랑의 주님, 사랑의 주인(a Love-Lord, a Love-Master)을 필요로합니다. (우리의) 이전 수업의 목적은, 법적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탄을 사람에 대한 주인이자 이 세상 신으로서 그의 자리에서 몰아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 . . 히브리서 2:14, 15, “이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건져내시고.” 헬라어의 또 다른 번역은 그분이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를 마비시키셨다" 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 잔인한 주인이 무효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합니다. 영적 죽음의 속박 속에 살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남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주권에 대한 법적 권리(legal right)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새 본성(nature), 새 가족, 새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새 주님을 위한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사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가져와야만 할 기쁨의 메시지와 기쁜 소식은, 사람을 위한 이 새로운 주님의 메시지입니다(What a message of joy, what glad tidings we have to bring to an unsaved world, the message of this new Lord for man). 로마서 10장 12절, "이는 똑같은 주님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하심을 따라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같은 장 13절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한 사람이 이 새 주님을 부름으로써 옛 주인인 사탄의 능력과 권세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그분을 어찌 부르리요 그들이 듣지도 못했던 그분을 어찌 믿으리요 그들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How then shall they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shall they hear without a preacher?). 그리스도의 주권을 알리는 일에 우리가 충실합시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것, 구원에 이르는 길>: Confessing His Lordship, the Way unto
Salvation
사람의 필요는 오로지 그의 삶에 대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Because man's need can only be met by the Lordship of Christ over his life, the confessing of that Lordship is the way unto salvation). 구속(Redemption)은 은혜의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수준(order)의 회개(repentance)입니다(가장 수준 높은 회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거라는 말임.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까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마귀가 주인이었기 때문임.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의 새로운 주인이 되시기 위하여, 2000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부활하셨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임. 그 회개와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 회개는 과거에 지었던 죄(sins) 때문에 울거나 통곡하는(weeping or crying)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or 방법)에 대해 후회스럽게 될(sorry) 것입니다. 비록 죄의 통치가 그의 삶에 대한 사탄의 주권의 결과일지라도 말입니다(그가 죄를 지은 것은, 사탄이 그의 주인으로서 그로하여금 그 안에서 죄를 짓도록 통치하고 야기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인데, 그는 그 사실도 모르는채, 죄 지은 것만을 생각하고 후회할 것이라는 말임). 회개는 그것(후회)보다 더 깊습니다. 회개는 사탄의 통치에서, 그를 따르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주되심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Repentance is to turn from Satan's rule, from following him, to the Lordship of Christ). 회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관한 공개적인 고백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새로운 주님(예수 그리스도)을 따르고 그분을 당신의 삶 속으로 모신다는 것을 사람과 귀신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초대하는 순간, 그의 삶에 대한 사탄의 권세는 사라지고 그는 그에 대한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됩니다(The moment that a man will invite Jesus in as Lord the authority of Satan over his life comes to nought, and he is delivered from bondage to him).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마치 사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사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히 2:14).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그는 사탄의 권세로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안으로 구원받습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그의 삶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것은 영적 사망이 그의 영에서 근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속박은 끝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받습니다(요 1:1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사랑의 통치자는 이제 그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가족과 그리스도의 나라(kingdom)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만 알았더라면 수천 명이 수년간의 고통에서 구원받았을 것입니다(Thousands would have been saved years of suffering had they only known this).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제 그분을 내 삶에 초대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 “(v.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v.10)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믿게 되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시인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느니라(이르기 때문이다)." (참고: 9절에 사용된 두개의 능동태 동사: “시인하다”와 “믿다” 와 달리, 10절에 사용된 두 동사: “믿다”와 “시인하다”는 한글번역본과 달리 원어에는 수동태입니다. 즉, “믿어지다”와 “시인하게 되다” 입니다. 그것을 볼 때, 10절은 9절의 원인이 확실합니다. 즉, 사람이 주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것은 믿어졌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사람이 입으로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시인하는 것은 시인하게 되어져서 시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구원의 교리를 그토록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일까요?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을 증거함으로써, 성도들이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watch over). 사람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함으로써 그것에 따라 행동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과 본성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그의 고백(his confession of the Lordship of Christ)은 거듭남으로 가는 길, 즉,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the way to the New Birth. the way unto Salvation)입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의 유익>: The
Benefits of the Lordship of Christ
사람의 모든 영적 결핍이 그의 삶에 대한 사탄의 주권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모든 영적 축복은 인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주권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사람의 영적 결핍은 그에 대한 사탄의 주권 때문이고 사람의 축복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해서 영적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말임).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모든 영적인 축복을 가지고 복을 받습니다. 진짜 사람(the real man)은 영(spirit)입니다. 인류의 모든 빈곤한 상태는 사람의 영 안에서 영적인 죽음의 결과였습니다.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신성(Deity)과의 연합, 즉, 전능의 영역인 신성의 영역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필요를 막론하고 사람의 모든 필요가 충족됩니다. 사람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은 죄와 질병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죄와 질병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죄의 통치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갖는 이 계시는 죄 문제, 그것의 기원, 사람에 대한 죄의 통치 및 그것의 멸망(destruction: 파괴)에 대한 매우 명확한 이해를 우리에게 줍니다. 말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고 가르칩니다(롬 5:12). 로마서 7장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위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울이 거듭났기 이전의 그의 경험입니다(주의 요망: 로마서 7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이미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의 영적 상태를 언급한 이후에 이어지는 장으로서, 자기의 육신으로 인하여 현재 벌어지는 성화의 문제를 설명한다. 그 근거로서, 그가 사용한 표현: '악을 행하다'. '선을 행하다' 에서 '행하다'의 시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마치 과거의 일이었던 것처럼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의 마인드(mind: 정신: 생각)는 율법에 의해 깨어났으나 그 사람 속에 거했던 죄가 그것으로 하여금 그가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롬 7:7-24). 바울의 간증은 그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으며 죄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롬 7:14). 그때 죄를 없애기 위해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요한일서 3:5(Weymouth), "그가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분 자신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 (고후 5:21). 그분은 그것의 고통, 그것의 통치를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울의 경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되셨고(고후 5:21)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로 하여금) 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로마서 6:10(Weymouth), "사망이 더 이상 그에 대해 어떤 능력도 갖지 못합니다. 이는 그가 죽었던 죽음에 의해 그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를 없애셨습니다(He put sin away). 히브리서 9:26, "그렇지 아니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로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분은 마치 죄가 없었던 것처럼 죄를 치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분 안에는 죄가 전혀 없습니다(요일 3:5). 성경은 6절에서 계속됩니다. "누구든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은 그분과의 완전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포도나무와 가지의 하나됨이 사용된 것처럼,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매우 가까운 연합을 의미합니다(It means a union so close that the oneness of the vine and the branch are used by the Holy Spirit to illustrate it). 그리스도에게는, 죄는 어떤 능력(power)을 갖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죄는 그분에 대해서 그리하지 않는 만큼 우리에 대해서도 능력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 주권)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죄가 당신에 대해서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로의 유혹은 그 대적의 허세(bluff) 입니다(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시험하는 것은 그 죄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하는 허풍이라는 말). 그것을 그렇게 취급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상 사역에서 그분의 삶에 대한 죄에 대해서나, 죄의 능력에 대해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죄를 다 이기셨다는 말임). 그분은 "이 세상 임금이 오나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8 (Weymouth),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heart) 안에 있는 사탄의 일을 없애셨습니다. 이것은, 죄가 사탄 안에 그것의 근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 창조물(피조물)에 대한 그것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상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만일 죄가 사탄 안에서 그의 근원을 갖고 있고 사탄이 무효화 되었다면 우리는 사탄의 일들이 취소되었고 새 창조물(New Creation)에 대해 어떤 능력(power)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우리가 아버지(the Father)와 주님(Maser)과의 교제 안에서 걷는 것을 막는 어떤 것입니다. 요한일서 1:5-10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걷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의 빛 안에서 행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 말씀, 우리의 빛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 우리의 특권과 책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그분의 말씀의 빛 안에서 걷는 것은 우리의 특권과 책임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막는 어떤 것입니다. 죄는 그리스도께서 새 피조물인 우리의 힘(strength)이 되셨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실패와 연약함 가운데 걷도록 야기하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지 못하게 막는 불신앙(Unbelief)은 죄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everything that does not come from faith is sin: 롬 14:23). 우리는 죄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새 창조물에 대해 어떤 능력도 갖지 못함(지배할 수 없슴)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은 그 대적의 간계(wiles: 궤계: trick; 참조: 엡 6:11)에서 구원을 얻으면서 그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항상 모든 면에서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평강(peace: 화평)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질문>: Questions
1. 자연인에 대한 사탄의 주권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2. 사람은 어떤 종류의 새로운 주권(lordship)을 필요로 했습니까?
3. 모든 사람이 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십시오.
4.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을 고백하는 것이 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를 설명하십시오.
5.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에게 어떤 개인적인 경험을 줍니까?
6. 죄가 더 이상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어떤 문제가 아닌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십시오.
7. 왜 질병이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어떤 능력도 갖지 못하는지를 보여주십시오.
8.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왜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를 의미합니까?
9. 데살로니가후서 3:16을 설명하십시오.
10. 당신은 이번 과의 모든 성경구절을 주의 깊게 찾아보고 연구했습니까?
제29과. 새 창조의 법칙: THE LAW OF THE NEW CREATION
우리의 마지막
두 교훈은 새 창조물(피조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 주 되심)에 관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죄와 질병과 사탄과 환경들에
대해,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이 그분이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주인 되심)은 죄와 질병이 새 창조물에 더 이상 문제(problems)가 아니고, 더 이상 논쟁거리(issues)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죄와 싸우거나 그 대적과 싸울 필요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 필요합니다(There need be no more struggles with sin,
no more battles with the Adversary, just an acting upon the Word of God).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구속(Redemption)을 얼마나 적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암흑기(the Dark
Ages) 동안 천년의 기간 중에 행위와 무관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계시가 교회에 잃어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암흑기(dark period)는 그의 영향력을
종교개혁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에 미쳐오도록 해서 그 결과 교회가 완전한 구속을 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관한 어떤 책을 읽어볼 때, 우리는 죄와 연약함의 문제가 그들의 삶에서 얼마나 주된 것(majoring)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구속(redemption)을 얼마나 적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속 계시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에 대한 그분의 주석(commentary)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없애셨고 거기에서 죄를 위한 어떤 제사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일에 만족하십니다. 다음 성경구절들(scriptures)을 주의 깊게
읽고 연구하십시오: 히브리서 9:12, 26; 10:10, 14, 18.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그분이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그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죄 문제와 씨름해 왔습니다(주의 요망: 저자는 우리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슴: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관련이 없슴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여전히 죄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 장, <그리스도의 주 되심의 유익>에서, 저자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진술은 사도 바울이 거듭나기 이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사도 바울도 거듭난 후에도 그와 같이 여전히 죄와 씨름했던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알고, 로마서 8장에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지어 새 창조물(피조물)이 죄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슴을 보여주십니다. 히브리서 10:1-3을 주목하십시오. “율법은 장래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항상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제사드리는 자들이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구약 아래에서
제사들은 제사를 드리는 자들을 온전케 하지 못했다고 그 말씀이 선언하고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는, 만일 그들이 그리했더라면 예배자들이 그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셨고(같은 장의 5절과 14절을 읽으십시오)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가, 율법과 그 제사들이 할 수 없었던 것, 즉 제사를 드렸던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14절에서 선언합니다: “그가 한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분은 하나의
완전한 영원한 구속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완성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12,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분은 새로운
피조물을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사탄은 교회가 사랑을 의식해야 할 때 죄를 의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문제의 마인드를 가지고 교회는 진짜 문제를 놓쳐 왔습니다.
죄의식의 지배를 받는 마음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인드를 갖는 것을 실패해 왔습니다.
<사랑의 문제>: The Love Issue
새 창조물에 대한 단 하나의 쟁점(issue)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안에서 행함" 입니다. 새 피조물을 다스리는 단 하나의 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법입니다. 주어진 계명은 하나인데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새 창조물이 직면한 그 한 가지 문제는 빌립보서 2:5-6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너희 속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새 피조물은 그리스도가 가진, 동일한 마인드로부터 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구속을 드러냅니다. 우주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죄, 약함, 질병, 환경들, 그리고 그 대적의 모든 일들로부터 너희를 그처럼 완전히 구속했으니 나는 너희가 나의 아들의 것과 같은 마인드로부터 되기를 기대한다. 그가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러하니라.” 그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내 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즉, 만일 그가 네 자리에 있었다면 그가 살았을 것처럼 살고, 그가 행동했을 것처럼 행동하고, 그가 되었을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너희 속에 이 생각을 품으라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생각이니." 이것이 새 피조물이 직면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mind)은 사랑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의 계시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는 하나님의 형상(the form of God)으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던 모든 것이셨습니다(All that God was, He was).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었습니다(he was the very image of His substance): 히브리서 1:3. 그는 하나님의 생각하셨던 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셨기 때문에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니와" (요 14:9). "빌립아, 네가 나와 함께 있는 삼 년 동안에 너는 아버지, 곧 그의 형상의 본체(the very substance of His nature)를 보았다. 내 행동에서 너희는 아버지의 행동을 보았다. 내 말에서 너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 내 안에서 너희는 아버지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습니다. 그 단어, "하나님(GOD)"이 의미하는 모든 것은 그가 있었다(HE WAS)는 것입니다. 그는 그분과 절대적인 동등성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의 마인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인드는 그분의 마인드와 그분의 손의 작품(work)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우리 주변의 우주를 연구합니다. 우주의 위대함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우리는 1000경 마일 떨어져 있는 별들의 거리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만드신 분이 더 크신 분임을 압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원자의 영역에서도 별들의 우주를 지배하는 동일한 지적인 질서가 계시되고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지적인 창조 질서만큼이나 지성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주(the Universe)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개인적인 존재들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들의 창조주도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것(인격적인 존재)을 의미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은 “그분은…입니다(HE IS)” 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다음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패션(형태)과 모양으로 발견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셨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자신이 만드신 작품(His own handiwork)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당신 자신의 창조물(creation: 피조물)로 살았고 행하셨던 정도로 자기 자신을 비우셨고 제한하셨습니다. 이 광대하고 무한하며 측량할 수 없는 우주를 창조하셨던 분은 이 작은 행성인 지구 위에 그분의 거처(adobe)를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죽음, 즉,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복종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하나님이 거룩하셨고 하나님이 죄에 의해 물들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리하셨는데, 죄가 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심으로 야기되었던 이 신성한 고통은 독특합니다. 그것은 전혀 비유(analogy)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 죄,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던 죄의 본성, 그것의 모든 끔찍함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찌릅니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 Christ's Belief in Love
우리는 그분이 왜 이것을 하셨는지, 왜 한 분에 의해 이 놀라운 희생이 그렇게 큰지를
묻습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기에 그분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15:3, “그리스도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비방한 사람의 비방 (reproaches)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했던
사람의 죄(sins)가 그에게 떨어졌습니다. 사람의 심판이 그에게 떨어졌습니다.
사람의 질병들, 연약함들이 그분에게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그분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담의
대반역죄를 통해 세상 안으로 입구(entrance)인 죄의 문제와 인류에 대한 죄의 통치의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희생에 의해 그것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인간을 대신해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대신하여 사탄을 무효화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믿었고 그분은 사랑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보상(reward)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승리했을 때(triumphed) 그분 앞에 놓인 기쁨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거두게 될 그 수확을 아셨습니다. 그는 사랑이 정복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새 피조물의 문제>: The Problem of the New Creation
이제 그 문제, 즉, 새 피조물이 직면한 문제는 그리스도가 직면했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필요성에 직면합니다. 그리스도가
그리했던 것처럼 그가 그들을 위해 죽는 것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위치가 그리했던 것처럼 필수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인류에게 주어져야
할 구속(redemption)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5:18-19을 주의 깊게 연구하십시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그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 있었고 그들의 범죄(trespasses)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의 말씀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의) 대사입니다.” (But
all things are of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nto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to wit, that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unto Himself, not reckoning unto them their trespasses, and having
committed unto us the word of reconciliation, we are ambassadors therefore on
behalf of Christ).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또한 22절에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11-22은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그분의 화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고 있었습니다(was reconciling). 그러나,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인 우리에게
화목의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믿으셨고 그분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구속이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화목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한 것을 실패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인드가 되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새 피조물(New Creation)이 직면하는
실제 문제를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에서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줍니다, "만일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하노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은 자신이
미쳤다고 믿겨질 정도로 사랑을 믿었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였습니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을 위하여 죽게 야기했던 그 동일한 사랑이 바울의 마음 (heart)을 강권했고 그들을 위하여 살도록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태도는 이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마치 죽었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사랑은 우리가 화목을 제공하기 위해 죽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얻기를 열망할 정도로 우리를 대사들로 만들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환상(vision)을 보았었습니다. 위대한 로마 제국은 주로 그의 노력을 통해 복음화되었습니다(was evangelized). 바울은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의 메시지가 유대인에게는 공격(offense)이 되고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음(foolishness)이 되며 로마인에게는 조롱거리(jest)가 될 것임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이방 나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목의 메시지만이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임을 알았습니다. 러브의 간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 가장 기꺼이 쓰고 또 쓰임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네가 내 사랑받는 아들(beloved Son)처럼 사랑하기를 원한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의 성품은 너의 것이다. 나의 사랑은 너의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의 주권에 복종하라고(yield) 요구하고 계십니다(He is asking us to yield to the Lordship
of His Love within us). 로마서 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hearts)에 부은 바 됨이니.” 에베소서 3:16-19은 우리의 것입니다(사도바울의 중보기도):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너희가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 안에서 능력을 가지고 강건하게 되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hearts)에 계시고, 끝까지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을 깨닫고,
또,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너희에게 승인하시기를(grant)
내가 원하노라."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hat
ye may be strengthened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the inward man: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to the end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may be strong to apprehend with all the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height and depth,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which passeth knowledge, and that ye may be filled unto all the fullness of God).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He fills us with His fullness). 사랑의 태도는 로마서 15:1-3에서 주어집니다: "이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각각 선한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스도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던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사랑은, 약함이 마치 자신의 약점(infirmity)인 것처럼 약한
자의 약함을 감당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들의
죄와 질병과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사랑은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 하여금 죄에 의해 통치를 받는 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야기할 것입니다.
마치 그가 그 사람을 위해 죄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마치 우리가 그들의
질병을 짊어졌고 그들의 고통을 짊어졌던 자들인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야기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인드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인류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3:8, "서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것이 새 창조물이 직면한 문제, 즉, 우리가 인류에게 빚진 사랑의 빚입니다.
<질문>: Questions
1. 교회가 왜 완전한 구속을 보는 것을 실패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죄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성경구절들을 주고 설명하십시오.
3. 왜 교회는 새 창조물이 직면한 진짜 문제를 놓쳤습니까?
4. 빌립보서 2:5-6절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5. 그리스도의 몸에 위임되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6. 고린도후서 5:14에서 바울의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잃은 자, 병든 자에 대한 사랑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8.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까?
9. 로마서 13:8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제30과. 사랑의 법칙: THE LOVE LAW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새 창조물이 직면한 주요 문제는 사랑의 문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4:8. 한 사람을 새로운 창조물(the New Creation)로 만드는 새로운 탄생(The New Birth: 거듭남)은 하나님의 본성(nature: 성품)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랑의 성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9). 새로운 탄생(거듭남)의 시험은 사랑의 시험입니다.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이것들은 진리(the truth)의 진술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만일 사람이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었고 그분을 알며, 그리고 만일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종교적인 고백(profession)에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영적인 사망 안에 거하고 있다고(거듭나지 않았슴) 말합니다. 만일 여기에 사용된 사랑에 대한 헬라어 단어의 이해가 없다면 이 구절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거듭나지 않았던 사람에게 속한 어떤 특정한 사랑에 친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사랑에 대한 단어는 "아가페"(Agape)입니다. 예수님이 다음 단어들(words)에서 새 창조물(the New Creation)을 다스려야만 했던 새 율법을 표현하셨을 때 이 단어(아가페: 사랑)를 만들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참조: 요 13:34-35). 그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고 거기에 현재 사용 가능한 그리스어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새로운 것, 즉, 그 타락(the fall) 이래로 세상에게 잃어버려졌던 무엇인가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의 마음(heart) 안에 있는 이기심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이기심을 대치했다는 말임). 동사가 사용되었었지만 "Agape"라는 명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성품(new Nature)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것은 그를 새로운 가족으로 인도했고 그에게 새로운 아버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했는데, 거기에 이 새로운 나라와 가족(new Kingdom and Family)에 맞는 언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흑암의 나라에서 나와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안으로 옮겨져야만 했고, 이 새로운 영역에서 그들은 적절한 언어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들은 적절한 법들을 가져야만 하므로 그분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아가페)'을 갖고 있으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사랑(a new love)이, 그들이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을 세상에 알리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까지 이 새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5장 5절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hearts)에 부은 바 됨이니." 외부로 흘려진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나타남(the manifestation of the nature of God)입니다. 복숭아 나무에서 식물의 생명은 처음에는 잎에서, 그 다음에는 꽃에서, 그 다음에는 맛있게 익은 열매 안에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품, 영생은 하나님 자녀의 성품과, 행실과, 말에서 그 자체(하나님의 성품)를 나타낼 것입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날 때 아버지의 성품이 그의 영 안으로 들어옵니다(When one is Born from Above, the Father's nature comes into his spirit). 그 성품은 그 자체가 사랑 안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동일한 기관들(faculties)을 통해 작동할지라도 우리의 옛 인간의 사랑(our old human love)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의도적으로(deliberately) 그들의 재산(property)을 내주고 이상한 다른 행동들을 했던 현상은 이 땅에 왔던 이 새로운 종류의 사랑의 첫 번째 나타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 (one heart and soul)이 되어 그들 중에 한 사람도, 그들이 소유했던 물건들의 하나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아니했고,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그리고, 큰 능력을 가지고 사도들이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큰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밭과 집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이 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바로 새 피조물의 삶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아가페"였습니다. 오순절의 능력(The power of Pentecost)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이 사랑을 자연인의 사랑과 대조해 볼 것입니다.
<"아가페"와 "필레오">: "Agape" and "Phileo"
예수님 시대에 사용된 일반적인 헬라어는, 마치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 아내를 위한 남편의 사랑으로서, "인간의 사랑(human love)"을 의미하는 "필레오"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가장 높은 유형의 사랑이었습니다. "필레오"보다 더 높은 유형의 사랑에 대한 다른 단어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공통된 인간애는 인간의 가장 축복받은 자산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자산입니다(This common human love of ours is the most blessed asset of the human, and yet the most dangerous). 이 "필레오" 사랑은 이혼 법원의 여신(goddess)입니다. 그것은 인간 고통의 여대제사장이고 우리의 대다수의 눈물과 슬픔과 마음의 고통의 부모입니다. 그것은, 사소한 구실로도(at the slightest pretext) 질투와 살인으로 변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이기심입니다. 그것은 자기 만족만을 채웁니다(feed on). 예수님은 새로운 종류의 사랑, 그것의 자신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가져오십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heart) 성품의 진정한 종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 인간의 해석입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옛 사랑은 자연적인 마음(heart)으로부터 솟아납니다. 새로운 사랑은 재창조된(recreated: 거듭난) 마음(heart)에서 솟아납니다. 하나(새로운 종류의 아가페 사랑)는 새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입니다. 다른 하나(인간적인 사랑)는 자연인의 나타남입니다. 자아(Self)는 "필레오"가 움직이는 주위의 중심입니다. "아가페(Agape)"는 새로운 중심을 갖습니다. 이 중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던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가페"의 나타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아가페 사랑이 나타난다는 말임). 합성된 "아가페"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복제될 수 없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아가페)은 기독교의 상징(the badge of Christianity)입니다. 그것은 육체(the flesh) 안에 하나님의 나타남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통해 고동치는 하나님의 마음(heart)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가족의 법일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과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것(아가페)은 기독교를 소위 지상의 모든 종교보다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것(아가페)은 성도들의 삶을 온 인류의 가장 달콤한 삶과 가장 향기로운 삶으로 만듭니다. 박해 아래서의 그것(사랑)의 기도는,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는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입니다. 그것은 용서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겸손(humility)으로 옷 입은 용기(bravery)입니다. 그것은 온유함으로 옷 입은 힘(strength)입니다. 그것은 강한 자로 하여금 약한 자의 짐을 지게 하고, 부자로 하여금 가난한 자의 청구서(the bills)를 지불하게 합니다. 교양 있는 자는 무지한 자의 동반자(companion)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타남(Christ manifest) 입니다.
<분석된 ”아가페">: "Agape" Analyzed
"Agape"를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그것의 구성(composition: 성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인드(정신: 생각)에 의해 접촉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그분의 생명에 관한 하나님 자신의 설명입니다(It is God's own description of His Life at work through man).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아가페가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언어적 재능은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만일 내가 땅의 모든 언어를 이해한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잊혀진 나라들에 의해 세워진 기념비들 위에 상형문자들을 해독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천사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나, 내가 만일 "아가페"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울리는 놋쇠나 울리는 심벌즈와 같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언어적 옷을 벗겨내고 그것을 벌거벗은 채 서 있게 합니다. 이것은 빈 교회들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고, 주일학교가 그것의 젊은이들의 군대를 수용하는 것의 실패의 이유를 제공하고, 사업과 사회 생활에서 기독교의 실패의 이유를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소리 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왔습니다. 이것은 현대 종교 정기 간행물이 구독자를 구걸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 . . 소리나는 놋쇠, 울리는 꽹과리, 공허한 말들-말들, 말들, 말들, 언제나 말뿐인 말, 공허한 말들. 2절, “그리고 내가 만일 예언하는 은사를 갖고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다면, 그리고 또 내가 만일 산들을 제거할 만큼 모든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러나, 아가페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사람의 또 다른 보편적 욕망(desire)이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 즉, 미래의 사건들을 미리 말하는 능력(ability)에 대한 욕망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의 큰 문제인 나라들의 분열,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의 결과,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아는 능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건물도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충분치 않을 것이므로). 어떤 저자도 이 작가(예언가)가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막대한 금액을 단어당 지불받은 적이 없습니다(예언가는 그 만큼 큰 돈을 받고 있다는 말임). 그는 이 놀라운 은사를 소유할 수 있지만,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가진다면, 그러나 만일 그가 '아가페'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분의 말씀은 부드러움과 눈물을 가지고 뚝뚝 떨어집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he is nothing). 이제 그분은 우리 모두의 마음(heart)을 만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지식을 갈망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커튼을 걷어내고 그 모습들의 뒤를 바라보고 또 거기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성품(nature)의 신비에 관한 계시를 읽었는지…. 이 산을 옮기는 이 믿음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투쟁해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단 한 번의 타격이 우리의 백일몽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우리의 야망의 그 뿌리를 끊는지…..우리는 모든 지식과 모든 신비를 이해하고 산들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축복인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자를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면.... 즉, 만일 사람이 이 세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수 있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도서관과 병원을 세우고, 만일 사람이 자선 활동에 지친다면, 그러나, "아가페"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낭비해왔습니다. 그것은 모래 더미에 물처럼 쏟아집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배움, 인간의 성취가 없이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실패입니다. 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셨던 것은 그 새로운 사랑, 즉, 하나님 마음(heart)의 계시입니다. 그것은 계시이지만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고동이며, 우리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분위기로 그 자체를 나타내서 궁핍한(needy) 세상을 축복하고 위로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상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울은 "아가페는 오래 참고 온유하다" 고 말합니다. "Phileo"는 고통을 겪을 수 있지만 짐에 눌려 쓰라립니다. "'아가페'는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Phileo"는 항상 시기와 질투로 나타났습니다. "'아가페'는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Phileo"는 영원히 그 자신을 자랑해왔습니다. 자아(Self)는 그것이 움직이는 주변의 중심입니다. 만일 당신이 "필레오"의 이기심을 취하면 그것은 무너지고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힘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Phileo"는 이혼 법정에서 고충을 표명합니다. 그것은 질투가 격렬하게 자라고 종종 그 애정의 대상을 냉혈하게 타격하여 쓰러뜨립니다. "'아가페'는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필레오'의 투쟁은 자신의 것을 얻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하고 불쌍해집니다. 그것은 부정직하고 배반하게 됩니다. 그것의 모토는 "모든 것들은 사랑과 전쟁에서 공평하다"입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이 하도록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먼저 하게 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잔인한 폭군이지만, 그것은 이 옛 인류가 타락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셨을 때까지 가졌던 최고였습니다(불행하게도 사람들이 그것을 최고로 여겼다는 말임). "'아가페'는 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레오"는 항상 스캔들(scandal)에 대해 토론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아가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안에서 기뻐합니다." "필레오"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약간의 도발에도 증오와 복수로 변하고, 그것은 항상 적의 멸망을 기뻐합니다. "'아가페'는 성내지 않습니다." "필레오"는 예민하고 다루기 힘듭니다. 그것은 쉽게 화를 내고, 그리고 그것은 매우 예민해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민함은 그렇고 또 언제나 그랬듯이 마귀의 것입니다. "'아가페'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아가페"는 결코 파산하지 않습니다. "필레오"는 젊었을 때 방탕한 생활에 재산을 낭비하고, 장년의 강인함을 갖추기도 전에 실패의 바위에 내동댕이칠 위기에 처합니다. "아가페"란 무엇입니까? 요한은 하나님이 "아가페"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가져오셨던 이 새로운 사랑은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인데, 그분이 의도하셨던 그것이 사람의 성품이 되어야만 하고 짐승 왕국을 다스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영적 죽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마귀의 이 무서운 성품으로부터 증오와 복수와 불신이 생겨납니다. 불안(restlessness)의 영이 모든 성품을 사로잡습니다. 오늘날 사람과 짐승은 이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능력(power)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동물의 마음(heart)은, 강한 자가 더 이상 약한 자를 먹지 않을 때, 가난한 자가 더 이상 부자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실 때, 아가페를 위해 흐느낍니다(sobbing). "아가페"는 하나님의 가족, 즉,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운 법칙입니다.
<질문>: Questions
1. 거듭남의 시험이 왜 사랑의 시험입니까?
2. "Phileo"
와 "Agape”에 대한 정의를 주십시오.
3. 제자들은 "Agape"의 의미를 언제 처음 알았습니까?
4.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을 쓰십시오.
제31과. 성령: The
Holy Spirit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한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다신교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던 당시의 인간에게 놀라운 계시였습니다. 그런 다음 수세기 후에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의 인격으로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하나 안에 셋이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이신 셋을 의식합니다. 그분의 공생애 초기에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 위에 가시적으로 강림하셨습니다(마 3:16-17). 여기에서 인간의 육체적 감각 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삼중 계시가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와 개인적인 대화에서 그분은 아버지와 자신을 별개의 두 인격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동등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다시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9 참조).
<계시된 삼위일체>: The Trinity Revealed
그분의 가르침에서 삼분의 일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저녁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장 길게 기록된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제자들과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화의 주요 부분은 그분을 대신하기 위해 오실 성령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있는 모든 것은 신격의 세 위격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Wood가 "우주의 비밀" 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삼위'(absolute Threeness)와 '절대적인 일체'(absolute Oneness)입니다. '절대적인 삼위'(셋이 됨)에서 각각은 다른 둘과 구별됩니다. 셋 중 누구도 다른 둘 중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세가지 중 두가지가 세번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삼위'로서 나타나십니다(manifest). 그러나 그분은 또한 '절대적인 일체'(하나가 됨)입니다. 셋은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각자(each one)는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각자가 하나님의 일부라는 뜻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각자는 하나님의 전체입니다. 인격(Personality)은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안에서 셋입니다(God is Three in One). 셋 중 각각은 하나님이고, 각자는 하나님의 전체입니다. 그 셋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세가지 방식(three modes of Beings). 그것은 주로 하나님이 활동하는 세 가지 방식이 아니라 세가지 존재 방식입니다(한분 하나님이 한 인격체로서, 어느 때에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아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인격체로 활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 분 하나님은 그처럼 한 인격체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엄연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인격체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세 인격체가 서로 연합하여 각각의 일을 하신다). 말씀(The Word)은 아버지(the Father)가 먼저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합니다. 아들(the Son)은 두번째입니다. 그리고 성령(the Holy Spirit)은 세번째입니다. 그것은 하나가 신격 안에서 첫번째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가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에 있어서 하나가 최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첫째이고, 아들이 둘째이며, 그 영이 논리적인 순서에서 셋째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를 근원으로 표현합니다.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영원한 영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오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보내실 성령.”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분(아들) 안에서 그분(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하십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는 지금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Christ Works Now Among Men Through the
Spirit
성령은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주된 일은 아들을 계시하는 것이며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역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을 통하여 신격의 충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를 우리에게 실재로 만드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본성과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한 그분의 사역을 알기 원합니다.
<성령에 관한 확실한 연구의 필요>: Need of a Definite Study of the Holy
Spirit
오늘날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명확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주어진 것과 비교하여 오늘날 성령의 사역에 약간의 관심이 주어졌습니다. A. J. 고든(A. J. Gordon)은 "성령의 사역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삼위일체의 세번째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 두 번째 사람을 고려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책에서 그 방법을 따르고 있으며 우리는 성령에 대한 연구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감람산에서 승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그 구세주(the Savior)는 그의 성육신(incarnation) 이전에 사셨으며 아버지께로 승천하신 이후로 그의 사역을 계속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보이는 생명을, 보이지 않는 생명과,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연구할 때 이 땅에서의 그의 특별한 현재 사역을 그의 사역 전후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유익함을 발견합니다. 그 사역은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을 때 그분은 성취해야 할 사역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성취하셨을 때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시간 제한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정하신 때에 성취할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사역은 지금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수행되고 있고 그분이 그의 정하신 때에 하늘로 승천하실 때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This ministry is being carried on now in us and through us, and shall continue until completed, when He in His appointed time shall ascend into Heaven).
<성령의 사역의 실상>: Reality of the Holy Spirit's Ministry
성령이 세상에 강림하심과 여기에서 그분의 정해진 사역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처럼 실제적이고 확정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리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육체적 감각에 성령의 계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법적으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분이 사람 되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의 육체적 감각에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니라” 라고 말했습니다(요일 1:1-2).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역은 육체적 감각을 통해 접촉할 수 없는 성령의 사역과 인격보다 우리에게 더 실제적이었습니다(성령을 이해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실제적이었다는 말. 예수님은 직접 육체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성령님은 그리하지 않으셨기 때문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신적 그림을 형성할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의 성령의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목적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리자로서 아담의 대반역의 형벌을 치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와 같은 몸으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계시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지역적이었습니다. 그분은 한 번에 지구상의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가지셨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처럼 하나의 인간의 몸으로(몸을 입고)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그런 식으로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지역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He came to impart the nature of God to the spirit of man). 그분은 (예수님처럼)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의 몸에 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He came not in a human body, but to indwell the bodies of those who had become New Creations in Christ). 그러나 그분의 오심은 성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오심만큼이나 긍정적이고 확실했습니다. 신격의 세번째 위격이신 그분은 실제로 여기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주인에 의해 예언된 성령의 오심>: The Coming of the Holy Spirit Foretold
by the Master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실 것을 예언자들과 천사들이 예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에서 세상에 성령의 강림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과 동등하시고 그분을 대신할 분이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20; 15:26-27; 16:1-16; 사도행전 1:4-5. 이 성구들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연구하고 묵상하십시오. 성령님은 오순절 날까지 이 신성한 임무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창조의 신성한 대리자였습니다. 물질계를 창조하실 때 그분은, 죽고 형태가 없는 물질(matter)에 생명과 형태(form), 그리고 발전(development)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분은 옛 언약의 선지자들에게 조명하였고 영감을 주었습니다(He had illumined and inspired the prophets of the Old Covenant).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이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그분(성령)은 그리스도의 세례시에 비둘기의 형태로 그분(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셨고(마가복음 1:10), 그분(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위해 그분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anointed: 참고: 성령의 사역이 예수님에게 이미 이루어졌슴).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에서 돌아오사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 그리고, 누가복음 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라."
<왜 과거에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Why the Holy Spirit Had Not Been Given
이제 성령이 아직 (제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직 이 땅에서 진정한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우리는 그 때,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because Jesus had not been glorified),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합니다(참고: 아직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슴을 말함).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으셔야 했고, 사람이 의롭다고 선언되었을 때 부활하셔야만 하셨고(롬 4:25), 사람을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 가셔야만 했습니다 (히 9:12). 그리스도는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요 10:10).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목적은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히 2:14)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요 1:12). 성령님은 그 새로운 탄생(영의 거듭남: born again: regeneration)안에서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하시고(요 3:3-8), 그 다음에, 이 새 피조물(고후 5:17)을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엡 3:19): (The Holy Spirit came to impart the nature of God to the spirit of man in the New Birth(John 3:3-8), and then to fill this New Creature(II Corinthians 5:17) with the fullness of God(Ephesians 3:19). 사람은 그 아버지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들이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 들어가실 때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0:12; 9:11-12). 그분은 죄를 버리셨습니다(히 9:26).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으신 것은 사탄의 권세로부터 인간의 구속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받을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 구속의 인(seal)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딤전 2:5). 사탄의 자식인 인간은 이제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권리(right)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의 구속(redemption)이 완성되었습니다. 오순절 이전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친구"라고 불렸습니다(요 15:15). **주의: 예수님이 여기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하신 것이다. 그 말은 그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 아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의 요망!!!: 마 16:16-18: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거듭났다. 요한복음 1:12: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마 6:9 …너희들의 아버지…. 마 12:20 …너희 아버지…; 마 5:16, 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눅 12:32 .. 너희 아버지; 눅 11:13…너희 하늘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이 제자들의 아버지임을 이미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거듭난 자녀들임을 의미한다: 주요 근거: 눅 10:20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수님은, 요 13:10에서, 제자들의 몸이 이미 깨끗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제자들이 이미 거듭났고, 구원받았슴을 증거하는 것임. 단, 가룟 유다 제외: 그는 끝까지 거듭나지 못했다. 구약시대부터 이미 성령으로 거듭남이 있었다: 예, 이삭: 갈 4:29: 성령을 따라 난 자). 그들은 옛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비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시면서 새언약을 선포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도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행 1:6). 성령은 사람에게 이러한 진리를 계시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기 위해 오순절까지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비고: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성품은 그에게 주어진다).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경 말씀은 사도행전 11장 17절입니다(but, 근거가 없슴). 헬라어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라고 읽습니다(주의: 여기에 처음이라는 단어는 없슴). 그것은 오순절 날까지 그들이 거듭나기 위해 믿는 것처럼 그들이 그리스도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그들 자신의 간증입니다(It is their own testimony to the fact that they had never believed upon Christ, as one believes in order to be Born Again, until the Day of Pentecost)….**주의: 이 말은 속단이고 부적절한 진술이다. 제자들은 이미 믿음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난 상태만으로는 아직 연약했고 핍박을 당했을 때 그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이 이르러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the new birth or 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것이다.
<질문> :
Questions
1. 신약의 어떤 사건에서 사람의 육체적 감각에 삼위일체가 계시되었습니까?
2.
"절대적 하나"와 "절대적 삼위"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십시오.
3. 시간 제한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성령의 사역과 비교하십시오.
4. 성령의 지상 사역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보다 우리에게 더 모호하고 비밀스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성령이 그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어떤 성경구절에 성령의 강림(advent)이 예언되어 있습니까?
7.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었습니까?
8. 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실 수 없었습니까?
9.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거듭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임. 왜냐하면, 제자들이 오순절 이전에 이미 거듭났기 때문임)
제32과. 성령(계속): THE HOLY SPIRIT (Continued)
성령의 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는 무엇입니까? 전체적으로 교회는 제자들이 오순절 날까지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이어졌습니다(주의: 이것은 맞는 진술이 아님.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거듭났기 때문임). 이제 성경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연구합시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태복음 3:11). 요한이 한 이 말은 마가복음 1:8과 누가복음 3:1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요한이 한 이 약속을 언급하십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세례"라는 용어는 사도행전 11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성령이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임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세례"라는 단어는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로 "침수하다"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단지 그들을 물에 잠기게 했을 뿐이지만 성령으로 잠기는 일이 와야만 했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성령으로 세례하는 것(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27,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너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성경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다"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용어가 사용된 유일한 곳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 용어의 성경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그것들을 주의 깊이 조사해 보도록 합시다. 요한은 "그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에게 가져오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 요 1:12-13: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새로운 출생이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성령 세례를 말함)입니까??(Is this New Birth the thing to which John is referring?). 이제 이 성경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알아봅시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가져오는 세례는 육체적인 세례입니다. 그것은 외적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람인, 영(spirit)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영 안에서(within the spirit of man) 하려는 사역의 예표일 뿐이다. 물세례는 무엇의 예표입니까? 성경에서 그것에 어떤 영적 의미가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탄생의 한 상징(type)입니다. 이 사실은 로마서 6:1-4에서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바울은 새 탄생으로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물세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3, “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물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장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와 함께 우리가 장사되는 것을 예표합니다. 이로써, 그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Being buried with Christ in water is typical of our burial with Christ in His death whereby the old man was crucified and put off). 물에서 일으킴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 사망에서 영생으로 부활하여 우리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행할 수 있음을 예표합니다(Being raised out of the water is typical of our resurrection with Christ out of Spiritual Death into Eternal Life, that we might walk in newness of Life). 이것이 거듭남(the New Birth)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영적 사망은 성령으로부터 제거되고 하나님의 성품인 영생이 사람에게 전해져 그는 그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우리는 영안에서 일어난 것의 하나의 증거(witness)로서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After we have been Born Again we are baptized in water as a witness of what has taken place in the spirit).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세례는 외적이고 육체적이다. 그것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이 사람의 영 안에 하실 일의 예표(type)이다. 나는 물로 육체적인 몸에 세례를 준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그 영을 잠글 것이다. 그 잠금으로부터 새로운 탄생이 올 것이며, 사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I baptize the physical body with water, but He shall immerse the spirit with the Holy Spirit, and out of that immersion shall come the New Birth, and man shall begin a new life): 주의: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을 성령 세례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서로 분리된 사건이다. 어떤 사람에게 물세례를 주는 것은 그가 믿고 거듭났기 때문이다. 즉, 새 탄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주요 사례: 사도행전 8:12-18: 사마리아 교회는 빌립에 의해 복음을 들었고 믿었고 세례를 받았으나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었다. 그 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방문했고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도록 기도했고 안수함으로써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9:1-17: 한 때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였던 사울(그는 사도 바울이 됨)은 다메석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는 그 후 다메섹에 들어갔고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경험했다(성령 세례를 받았슴을 의미함: 성령세례는 최초의 성령 충만임.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충만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함!!). 예수님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이 새로운 탄생을 가져오셔야만 했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지시받았습니다(행 1:5: 주의: 제자들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았슴).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 성령을 주실 수 없으며, 성령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오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니다(주의요망: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성령은 그 전에도 사람을 믿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다: 갈 4:29 참조). 이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있는 성경을 살펴보고 그것이 또한 거듭남(the New Birth)을 가리키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 (For by one spirit are we all baptized into one body). 사람은 언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a member of the Body of Christ)가 됩니까? 그가 거듭날 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세례"라는 용어가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을 가리킨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몸안으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안으로의 출생(the birth)입니다. 갈라디아서 3:27,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너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For as many of you as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이것은 새로운 탄생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For if any man have not the spirit of Christ, he is none of His). 성령세례는 두 번째 경험으로 가르쳐졌습니다(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has been taught as a second experience: 저자는 이것이 잘못된 가르침이었다고 말하고 있슴). 왜냐하면,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 전에 사람은 사탄의 권세(authority)로부터 합법적으로(legally) 구속되어야만(redeemed) 했습니다(해석주의: 저자는,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대속을 완성하시기 이전인 구약시대와 오순절 이전에는, 아무도 법적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에서나,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존재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참조: 갈 4:29.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아직 영광을 받으시기 이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 요 7:39).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the firstborn: 장자)였습니다(골 1:18). 그는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the firstborn)이었습니다(롬 8:29). 그러므로 그들은 일어날 그 세례(오순절의 성령세례)를 두 번째 경험으로서 발생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순절 날(the Day of Pentecost)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What Took Place upon the Day of Pentecost?
사도행전 2:1-2: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였더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곳에 모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고, 그것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 채웠더라." 성령님은 그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탄생하신 것처럼 분명한 오심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앉아 있는 방을 가득 채웠습니다(filled). 무엇이 발생했습니까? 그 방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들은 성령으로 잠겼거나 세례를 받았습니다(The room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they were immersed, or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성령 안에서 세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는 어떤 의미에서 물 안에서 세례(baptism in water)와 뒤바뀐 것입니다(주의 요망: 저자는 세례를 세가지로, 즉, 물세례, 성령 안에서 세례,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례는 세가지가 아니라 두가지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 물세례에서는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에서는 위에서 성령의 "강림" (coming down upon)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한 잠김(immersion)입니다. 오순절과 관련하여 사용된 몇 가지 문구가 있습니다: “위에 오다", "쏟아지다... 위에 떨어졌다", "부어지다", "그들 위에 떨어졌다", "위에 왔다" (coming upon," "pour out...... fallen upon or fell upon," "poured forth," "fell on them," "came upon). 그 결과는 성령 안에서 잠기게 되었고, 그것으로부터 거듭남이 왔습니다(주의 요망: 저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거듭남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있었고, 성령으로 잠김, 즉,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왔다. 앞부분의 코멘트 참조 요망).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은 그 기념할 만한 날에 태어났습니다. 그 구유(the manger)가 하나님의 아들의 요람이었던 것처럼 그 다락방(the upper room)도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the mystical Body of Christ)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날에 백이십 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s in Christ)이 되었습니다(주의 요망: 저자는 그 사건을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거듭났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그들이 경험한 것은 거듭남이 아니라 성령세례다). 그러자(Then)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they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이것이 두 번째 경험입니다(This is the second experience):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 그분에 의해 내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to be indwelt by Him). 세례를 받고 성령 안에 잠기는 것(being baptized, immersed, in the Holy Spirit)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being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주의 요망: 그렇지 않다. 성령세례는 최초의 성령충만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이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슴을 전제로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탱크가 물로 채워져 있고 한 사람이 그 물 안에 잠겨 있다면 그는 물 속에 있을 것이지만 물은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락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had been born) 후에(주의 요망: 여기에는 거듭났다는 말이 없다. 그들은 이미 거듭났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they were filled with Him).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들은 거듭나기 전까지는 성령으로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주의: ‘그들은 거듭나기 전까지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성령님은 거듭난 사람들의 몸 안에만(the bodies of those who have been Born Again) 그의 거처(His home)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성령 안에서 세례"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거듭남(the New Birth)을 의미하고, 두 번째 경험(the second experience)은 성령을 받거나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서 우리 몸이 성령에 의해 내주될(indwelled) 수 있고, 성령의 전(Temple: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주의: 저자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성령으로 세례와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조사의 차이일 뿐이지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앞부분의 코멘트 참조 요망).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a temple of God)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초대 교회가 두 번째 경험이나 성령의 충만을 언급할 때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후에는 이 용어가 단 한 번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그 이유: 성령세례는 최초의 성령 충만으로서, 개인적으로 일생 단 한 번 이루어지고 그 후에는 성령으로 재충만이 필요하고, 성령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세례)이 현재 많은 그룹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베드로의 말에서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일어났던 일을 말할 때,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처음(주의: 처음이 아니다) 믿었을 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그때도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야만 한다는 요한의 말을 기억하거나 상기시켰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유대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고 그들을 당신 자신으로 채우신 것처럼(성령으로 충만케 하심), 그(성령님)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했을 때 그들 위에도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방인들이 오순절 이전에 유대인들이 해야만 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은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미 오셨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을 때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해석 주의: 그렇지 않다. 이방인들에게도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여전히 분리된 사건이다: 예, 행 8:4-12; 사도행전 9:1-17).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How Does One Receive the Holy Spirit?
성경은 성령을 받는 것이 별도로 일어나고 새로 태어난 후에 일어난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말했습니다(행 2:38). 죄 사함은 새로 태어남(the New Birth)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 옵니다(The remission of sins signifies the New Birth, and then comes the receiving of the Gift of the Holy Spirit).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3). The Heavenly Father gives the Holy Spirit to His children who ask for Him.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구하는 그의 자녀들에게(거듭난 자녀들을 말함) 성령을 주십니다. 사마리아 성이 빌립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요한과 베드로가 (그곳에) 내려와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그들에게 안수하였더라(행 8:14-16). 성령은 믿음에 의해서 받게됩니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또한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가르치지만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주의 요망: 방언은 처음 성령세례를 받은 하나의 유력한 외적 증거인데 저자는 그것을 모호하게 말함). 사도행전은 교리서가 아니라 역사서입니다. 그것은 35년의 기간 동안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여러 차례 방언을 말한 것과 관련합니다: 사도행전 2:4, 오순절 날(the Day of Pentecost). 행 19:6: 이방인들이 에베소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셨다는 사실의 증거로서, 우리가 방언을 보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Nowhere is it taught that we should look upon tongues as the evidence of the fact that the Holy Spirit has filled us). (주의 요망: 그러나 분명 방언을 말했다고 말하고 있다…). 방언은 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 언급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고린도 교회에 그들의 방언의 남용에 대해 책망하는 편지를 쓸 때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30은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비고: 이 말은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은사에 차이가 있고, 그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 사도바울은 고전 14:5에서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고전 14:39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막 16:17 믿는 자들은 새 방언을 말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이 신자를 위한 표적이 아니라 불신자를 위한 표적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방언이 성령의 내주하심의 증거라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언을 성령의 내주하심의 증거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물을 다루시는 법에 위배될 것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의 육체적인 나타남(a physical manifestation: 성령의 나타남)입니다(비고: 방언은 처음 성령세례를 받은 하나의 유력한 외적 증거로서 성령의 나타남의 한 현상이다). 그것은 사람의 감각들에 대한 하나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도 감각 증거를 중시하지 않으셨거나 우리가 그것을 신뢰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믿음의 하나님입니다. 사람과 새 피조물을 다루시는 그분의 법은 믿음의 법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거듭났습니다(엡 2:8). 우리는 믿음에 의해 삽니다(롬 1:17). 우리가 기도로 받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법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우리가 또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감각들의 증거 없이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 외에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그것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다시 태어납니다. A man is healed when he says, "I am healed because the Word declares that 'by His stripes you are healed.'" 한 사람이 "나는 그 말씀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때문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할 때 그는 나음을 받습니다. 재정적인 필요의 경우에,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라는 말씀이 선포하기 때문에 그 필요가 충족된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성령을 위해 아버지께 구하였고 그는 그에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나는 성령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또한 성령을 받습니다.
<질문>: Questions:
1. 어떤 성구에서 성령세례가 언급되어 있습니까?
2. 헬라어로 "세례를 베푸다"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3. 물세례가 거듭남의 예표인 이유를 보여주십시오.
4.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사람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5. 고린도전서 12:13을 설명하십시오.
6. 다락방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 어떤 성구가 성령을 받는 것이 중생과
별개이며 그 뒤에 오는 것임을 보여줍니까?
8. 사람이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9.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물리적인 증거를
두지 않으신 이유를 보여주십시오.
10.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제33과. 성령(계속): THE
HOLY SPIRIT (Continued)
성령에 관한 우리의 마지막 두 강의에서 우리는 신격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확정되고 지정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오순절 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인간의 육체적 감각으로 접촉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지상 사역 동안의 그리스도와 같은 실재로 오늘날 세상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가 오순절 전에 오실 수 없었던
이유와 그날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습니다. 성령에 대한 이 연구의 마지막 수업에서 우리는 오늘날 그분의
사역을 더 공부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
Ministry of the Holy Spirit to the World Christ taught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일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하셨을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과 같이
인간의 몸으로 이곳에 계셨다면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사람을 위해 그분이 행하셨던 것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EVERY MAN)의 의가 되도록 그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 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속 희생을 거부하는 비극을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오늘날 인간의 마음(HEARTS)에 하나님의 아들의 일을 실재가 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성령의 가르침과 교통은 그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요 16:13-14).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6장 7-11절에서 그분의 일을
세상에 실재가 되도록 만드시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삼중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성령께서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시는 것이 적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통해 사람에게 하시는 사역은 지역적으로 제한되었을(LOCALIZED)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온 세상에 도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구원받지 못한 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결과,
우리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들(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성령님의 방법을 연구할 때, 우리가, 우리의 복음적인(evangelistic)
설교의 대부분이 얼마나 잘못되었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8-11. 주목(Note): 성령님은 심판에 관해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심판이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What has the judgment of Satan to do with man?). 모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의 자녀가 되어왔고 사탄의 영원한 집이 사람의 영원한 집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사람에게 그가 현재뿐 아니라 영원토록 사탄의 자녀임을 보여주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그에게 의를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중보자를 가지고 있음을 인간에게
보여주는데, 바로 그는 사람을 위해 영원한 구속을 제공한 후 자기 자신의 피로 사람을 대신하여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법적 권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사람에게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그가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속의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 즉,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후에 사탄의 자녀로 남아 있기를 선택한 죄에 관하여 사람을 책망합니다(convict). 우리의 설교는 성령님의 방법과 얼마나 조화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사람에게
그가 사탄의 자식임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의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법적 권리를 그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범했던 죄들
때문에 정죄 아래에서 그에게 설교했습니다(설교시에 정죄감만을 불어넣었다는
말임). 하나님은 그가 행한 것 때문에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인가에 따라, 단 한 가지 죄, 즉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 사탄의 자녀로 남아 있기로 선택한 죄에 대해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십니다(convict).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 . . 그것은 그의 검입니다(엡 6:17). 사람에게 그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성령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보여주십니다(It is through the Word, God's Revelation
to man, that the Holy Spirit shows an unsaved man his need of Christ). 우리는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위임받았기 때문입니다(고후 5:18-19).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현명하게 제시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불구로 만듭니다(If we do not know
how to rightly divide the Word, and intelligently present it to an unsaved man,
we cripple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신 후에, 만일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주십니다(요 1:12).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요일 5:11-13).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영접하고 실질적으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복되시고 신실하신 성령님은 이 생명이 전달되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새로운 탄생(The New Birth: 거듭남)은 감추어진 행동이지만 모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덮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그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 5:17). 요한복음 1: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자연인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의 영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 주는 분은 성령이심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 다음 지능적으로(intelligently)
초대된 성령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만든 그 사람 안에 내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성령께서 지상에 거하시는 이 기간 동안 그분의
집과 거처(His home and place of abode)는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몸이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성전이었던 것처럼 그분의 몸인 교회는 그분의 사역 기간 동안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가 비교에 주목합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입니다. "장막을 치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거처는 성전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막을 치셨을 때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만일 그들이 그의 몸인 하나님의 이 성전을 헐면 그는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을 때(when God was tabernacled) 쉐키나 영광이 속죄소 위에 머물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영광, 즉,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완전하고 죄 없는 인성과 연합하여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셨고 그 영향 아래 있지도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거하시게 되면, 영적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은 새 창조물과의 연합 속으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 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여러 건물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내주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에게 계시되셨습니다.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그의 자리를 잡기 위해 세상을 떠나셨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인간과 개인적으로 접촉을 갖지 못할 곳입니다), 그는 그의 신비로운 몸 안에 성육신이 되도록 성령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램 (desire)입니다. 에베소서 3:19, "이는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5:18: 사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그분의 몸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과 접촉을 갖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몸과 독립적으로(무관하게) 일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분이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일하실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들을 묶습니다(If our lives are not
filled with the Holy Spirit so that He can work freely through us, we tie the
hands of Deity). 이것이 성령의 경륜(dispensation)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과 함께 거하게
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참된 그리스도의 나타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생각과 관련하여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 우리를 위한 진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perfected). "완전하다(perfect)"는 말은 "완성하다(complete)"는 뜻입니다. 그 생각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그분의 생명(life)은 우리를 통해 표현되지 않고는 완전하게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그것이 작용할 때를 제외하면 그 안에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그 일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다는 말임).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향해 넘쳤습니다. 요한복음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는 역사하는
사랑입니다(Grace is love at
work).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위한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은혜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humanity)의 질병들과 고통들을 짊어지셨습니다(borne).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사람에게 가져올 수 있는 화해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화목의 말씀을 주셨습니다(고후 5:18-21).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지시 아래에서, 또, 성령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그것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될 수 없습니다.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만일,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주하실(dwell)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인류에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의 메시지는 "내가 그들 안에 거할 것이고, 그들 안에서
행할 것이다" 는 것입니다(고후 6:16). 만일 우리가 그분으로 하여금 그 일을 허락한다면, 세상은 오늘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을" 때 그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계시자, 성령>: The
Holy Spirit, the Revealer of Christ:
성령이 오순절 날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는 새 이름 하에서 그것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파라클레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들(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hearts)에 임했던 슬픔은 그분의 부활로 인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더 긴 이별(separation)이 있을 것이고 그분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기 위해 가실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번째 사람(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은 그들의 돕는 분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주인(Master)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들의 마음(hearts)에 얼마나 큰 기대가 생겨났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상에 오셨슴에 의해 감격했었습니다.
이제 주님과 같은 수준에 있는 또 다른 분이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그들에게 오셔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4:18, “내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것인 그 일들을 취하여 사람에게 그들을 계시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으라."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그 지상의 그리스도(the earthly Christ)를 사람에게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 . .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분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죽음과 무덤과 지옥을 정복했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그는, 사람의 감각들에게 드러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지옥에서 그가 사탄에 관해 정복하신 것, 인간을 위한 영원한 구속을 얻으시면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그가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 그리고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그의 현재의 사역등에 관한 놀라운 계시를
주셨던 그 유일한 분(the One)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엡 1:7)과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엡 3:16)을 우리에게 나타내 오셨습니다. 성령 사역의 다양한 면들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범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관찰할 때 우리는 그분의 사역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12:28, 히브리서 9:14, 사도행전 1:2, 이사야 11:2을 읽어보세요. 우리는
초대 교회가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갔음을 발견합니다. 사도행전 4:8, 31; 6:5; 13:2, 4, 9, 52; 15:8, 28; 및 16:6, 7 을 읽어보십시오.
<질문>: Questions
1. 세상을 향한 성령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2.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일을 제시하는
삼중 방법은 무엇입니까?
3. 삼위일체 중 어떤 분이 거듭남에 있어서 능동
행위자(the Active Agent)입니까?
4. 성령의 도구들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 성령의 거처는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 왜 필수적입니까?
7. 요한일서 4:12을 설명하십시오.
8. 왜 그리스도는 성령을
"그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까?
9. 성령님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을 계시하셨습니까?
10.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었슴을
보여주는 성경구절들을 제시하십시오.
제34과.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의 마지막 두 수업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분명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정된
시간에 오셨고, 지상에서 사역을 마치신 후에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임을 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떠나가실 때가 정해졌다고 계시합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으나 지금은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니라.” 사탄의 일을 막는 이 분은 성령이시지만 데려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 또는 아버지께로의 승천에 대해 주목하고
싶은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경륜의 시대에 그분의 사역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성령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인 그분의 교회에 성육신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의 거처였습니다.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다음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그분은
몸을 벗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떠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휴거를 구성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올려져 교회의 머리이시며 몸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영광
중에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오셨고 그분은 그것을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엡 5:7)로 그분께 드리실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A. J. Gordo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밖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요 내부로부터 활력을
주어 몸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벗어나 휴거 때 그 몸으로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
이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마치기 전에 그분이 돌아오실
때 성경을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예언과 비유와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신약의 300개 이상의 구절이 이 엄청난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194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모든 예언은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재림에 대한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이사야 7:14).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미가서 5:2의 성취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온
천하"가 "호적"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시편 22편의
20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심으로 이사야서
53장이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이러한 사건들을
옛 선지자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1,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증거하실 때에 어느
때와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생각하셨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모든 예언의 정확한 성취를 볼 때, 그분의 재림에 대해 배우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큰 동기를 부여합니까? 우리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예언들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그 오심에 두 단계가 있음을 봅니다. (1) 교회가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 끌어
올려지는 휴거, (2) 모든 눈이 그분을 볼 때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이 그분의 교회와
함께 지상에 오심에 대한 계시 ." 이때 그분은 천년 동안 지상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휴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What Will Take Place in the Rapture?
성령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한 놀라운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분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든
살아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든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5-17,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 공중에 있을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늘로 올라가 우리를 대신하여 중재자, 중재자, 대언자,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신 우리 주님은 "호령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신자는 그 외침을 들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여기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이 부활하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의 몸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신자들과 함께 그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끌어 올려질 것입니다(헬라어로는 "구름 속에서"라고 읽음). 여기서 우리는 휴거
때 일어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영이 부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영(spirits)은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의 영은 결코 죽지 않으므로 부활이 결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무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광스러운 불멸의 몸을 받기 위해 휴거 때 그분과 함께 올 것임을
보여줍니다. "구름"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공기의 구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자들의 구름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모든 나라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12:1에서 언급된 "증인의 구름"이라는 용어를
발견합니다. "붙잡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의미에 주목합시다. 우리는 "그것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고
아무도 저항하고 싶어하지 않을 하나님의 강력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힘으로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강포한 자들이 천국을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을 때와 사도행전 23장 10절에서 군사들이 바울을 억지로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쁜 충동이 될 것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과 구세주를 만나러 올라 갔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나니... 우리는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홀연히 변화되리라" (고전 15:50-51)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20-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우리가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새롭게
지으시리니.... 우리 주님처럼 영화롭게 된 불멸의 몸입니다.
성령님은 요한을 통해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우리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권세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았습니다(로마서 8:29). 우리는 지금 우리 몸의 구속 곧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된 몸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서 2:13에서 이 소망을 언급합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 . . 그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4:40, “밭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세상의 영원한 분리가 드러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만남은 큰 기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그분의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은 밀레니엄 기간 동안 다양한 직책 임명으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 모임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옷을 입으라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계시록 19:9, “또 내게 이르시되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시고.” 그것은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주의 요망: 몇 년간이 아니라 30일간으로 판단됨: 그 이유: 후삼년반, 3.5년 + 30일 = 1290일: 참조: 단 12:11).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지상에서 계속 살 것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 주님이 예언하신 환난이 지상에 일어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도래>: The Coming of the Antichrist:
그것은 땅으로 쫓겨난 사탄에 의해 인도될 것입니다. 다음 성구는 이 큰 환난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26:16-21; 27:1.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서신서의 침묵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중 어느 것에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1-30절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볼 때, 세상이 이제까지 알고 있는 가장 큰 환난이 일어날 것이며, 특히 그분의 계시로 영광 중에 오시기 직전에 유대인들에게 임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요한만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성구들은 분명히 그를 언급합니다. 바울은 그를 "불법자",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데살로니가후서 2장)이라고 부릅니다. 다니엘은 그를 모든 신보다 크게 할 왕으로 언급합니다. 다니엘 11:36, “그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이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가
그칠 때까지 하리니 작정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일종의 그리스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접두사 "anti"는 "반대"
또는 "대신"을 의미합니다.
두 개념 모두 한 단어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Westcott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대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같은 성격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환난기에는 지상에 단 한 명의 신자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세대주의 종말론 주의 요망). 모든 사람은 사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세상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개인적인 형태로 올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화신이 될 것이며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입니다. 사탄을 타락시키고 그의 본성을 변화시킨 욕망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방 끝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높은 구름 위에 올라가 지극히 높으신 자와 같이 되리라." 그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창 3:5). 그는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이 무절제한 기간에 그는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와 일주일 동안(7년의 기간을 가리킬 수도 있음) 계약을 맺을 것으로 보이며, 적그리스도는 제사와 예물을 허락할 것입니다. 다니엘 9장 27절, "그가 한 이레 동안 많은 사람과 굳게 언약을 세우고 그 이레의 중간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요 또 가증한 자들의 날개를 타고 멸망하게 하는 자가 이르리니 ; 그리고 결정된 끝까지 진노가
황폐한 자들에게 쏟아지리라." 그러나 그는 주중에 이 언약을 어기고 자기 자신을 숭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때 야곱의 환난의 때가 올 것이다.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는 사거나 팔 수 없게 됩니다. 사탄의 가장 놀라운 승리는 그가 적그리스도로
나타나 다른 모든 신보다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이 그를 경배하도록 강요할 때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다니엘 7:8-20, 21, 25; 8:23, 24; 11:36-37. 우리는 다음 시간에 이 공부를 계속할 것입니다.
<질문>: Questions
1. 어떤 성경이 성령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위해 정해진
시간이 있음을 보여줍니까?
2. 왜 성령님이 떠나시면 그리스도의 몸도 떠나가는
것입니까?
3. 우리 주님의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 토론하십시오.
4.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단계는 무엇입니까?
5.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살아 있는 믿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6.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7. 그리스도와 신부가 공중에서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8. 무엇이 땅에 환난을 일으킬 것입니까?
9. 왜 서신서에서는 환란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까?
10. 적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간의 형태를 취하려는
사탄의 야심은 무엇입니까?
제35과 그리스도의 재림(계속): THE SECOND COMING OF CHRIST (Continued)
성육신하신 분의 오심과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과 그분의 피로 새 언약을
맺은 일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구에서 환난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유대인이 다시 등장합니다. 환난은 야곱의 환난의 때요, 유대인이 당면한 환난 중 가장 큰 환난입니다. 대환난에서 유대인들이 하는 역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유대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맺으신 언약을 연구하면서 언약의 백성들이
지상에서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보았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깨어진 교제 가운데서도 여전히 증인입니다(?). 그의 역사는 그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유대인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 God's Prophecy Concerning the Jew:
성취가 아직 미래에 있는 예언을 다루기 전에 이미 성취된 특정 예언을 검토해
봅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온 천하에 흩어질
것과 그들이 흩어지는 중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레위기
26:33,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고 너희를 따라 칼을 빼리라.” 이 예언은 성취되었는데, 이는 어떤 민족도 유대인만큼 온 땅에 광범위하게
흩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망명, 포로,
재산 몰수, 고문 및 학살을 당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이 흩어지고 박해를 받는다는 위의 예언만으로는 성취가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흩어짐과 박해의 자연스러운 결과는 다른 나라에 흡수되어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3장 9절은 “홀로 거하는 백성이여 열방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아니할 것이요”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디를 가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널리 흩어지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결코 멸절되지 않을 것이며 그를
핍박하는 열방에 친히 복수하시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0장
16절에 "너를 삼키는 자는
다 먹히고 너를 노략하는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200 유대인을 핍박하던 바벨론, 그리스,
로마의 대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번창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흩어지고, 예속되고, 사냥당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18세기의 조직적이고 세계적인 박해 후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으며,
세계의 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법과 관습을 보존하고, 세기의 변화 속에서 그들의
고유한 국적을 보존합니다."
<예언의 현재 성취>: Present-Day Fulfillment of Prophecy:
지금 성취되고 있는 예언은 유대인이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그들을 다시 인도하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암 9:15).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은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투르크족(the Turks)으로부터 성지를 해방한 지 11일 만에 전쟁이 갑자기 끝났습니다. 투르크족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구원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돌아올 수 있도록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에 관한 미래 예언>: Future Prophecy Concerning the Jew:
예언은 또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후에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 15:16-17).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의 부상을 공부했습니다. (휴거는 이미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의 고난의 때가 올 것입니다. 세상 열방은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한 것을 기뻐하지만 유대인들의 번영으로 인해 원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세계 열방이 그들의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도시를 점령할 것이고, 유대인들에게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절망적으로 보일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유대인들을 구출하러 오실 때 그리스도와 열방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은 주 예수께서 "불법한 자" 곧 "멸망의 아들"을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시기 전에 그의 입으로 적들을 죽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적들에게 함락된 후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그런 다음 승리를 거둘 때 그분의 발은 감람산 위에 서실 것입니다. 스가랴 14:2-4은 열방이 예루살렘과 전쟁을 벌일 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알려줍니다. "내가 모든 민족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그 성읍은 함락되고 가옥들은 약탈당할 것이요 성읍 절반은 사로잡혀 가고 백성의 남은 자들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나가사 그 민족들을 치시리니… 그 날에 그의 발이 감람산에 서리라.”
<그리스도의 계시>: The Revelation of Christ: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그와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때이며 유대인들이 그분을 그들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분을
거부한 것을 슬퍼할 때입니다. 그때에 스가랴 12장
10절이 성취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의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나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곡하리니 사람이 자기의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는 것 같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 맏아들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 같이 하리라.” 이사야 25장 9절, “그 날에 이르기를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이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에 대해 슬퍼할 것이지만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의 원수와 영적 어둠으로부터 구출되어
마음에 큰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기쁨에 대해 많은 경전에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20,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나리라.” 이사야 60:21, “네 백성도 다 의로울 것이요 그들은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나로 영광을
나타낼 것이니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밀레니엄>: The Millennium:
구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 관한 두 가지 예언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왕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고 오직 그분이 왕으로 나타나 통치하시는 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초림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과 함께 그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실 기간에 대해 거듭거듭 말합니다. 사탄의 통치가 일시적으로 중단될 것입니다.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사탄이 이 세상의 억제되지 않은 신이 될 것이기 때문에 땅에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것(해석 주의)은 자연히 큰 환난이 뒤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 천년 동안 땅에 대한 모든 접근이 차단되고 결박되어 사탄의 통치가 끝난 후에는 영광스러운 평화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사탄은 죄, 질병, 고통, 비참함의 창시자이고 그가 지상에서 추방되면 이것들도 떠날 것입니다. 천년왕국 시대를 설명하는 많은 성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중 몇개를 줄 것입니다: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미가 4:24). “더 이상." 이사야 33:24,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다 하지 아니할 것이요 거기 거하는 백성은 자기 죄악의 사함을 받으리라.” 이사야 35:5-10,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터져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이며 메마른 땅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근원이 될 것이며 용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골풀이 무성하고 대로가 거기에 길이 있으리니 . . .그들을 위하여 행하는 자들이 비록 우매할지라도 그리로 잘못하지 아니하리로다.” .......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리로다 영원한 희락을 그 머리 위에 얹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하박국 2:14, “이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땅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65:19, “내가 예루살렘을 기뻐하며 내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천년왕국이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의 국가로서 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며 세계의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해석 주의). 유대인들은 세상에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요 그들의 손실이 이방인의 풍성함이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세상 예배의 중심은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2:3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의 길로 행하라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인류에게 의미하는 바를 목격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의 통치는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때 끝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종 아래 있었지만 마음이 그리스도의 통치와 참으로 조화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전쟁을 위해 모을 것입니다. 계 20:7, 8,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으리라 함께 전쟁터에 나오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다시 예루살렘은 공격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개입하실 것이며 사탄은 불못에 던져져 다시는 땅이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접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어날 일에 대한 기록은 요한계시록 29:9-10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지고 성도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 못에 던지우니 유황도 거기 있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러면 영원이 올 것입니다. 둘째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과 백보좌 대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죽은 자들과 큰 자들을 보니 또 작은 자들이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내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 곧 불못이라 만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없으면 그가 불못에 던지우더라"
<새 하늘과 새 땅>: 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이 일이 일어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올 것이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계시록 21:1-8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교회는 그 광대한 유산에 완전히 들어갈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위대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과거의 영원 동안 그분의 크신 사랑 안에 쌓아 두신 부요(wealth)와 재물(riches)을 장차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 하나님의 가족에게 속한 부요와 재물과 기쁨의 영광스러운 진리여!.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서로를 알고, 서로 이야기하고, 영원히 하늘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은 복을 받을 지어다.
<질문>: Questions
1. 오늘날 유대인이 여전히 증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성취된 유대인에 관한 세 가지 예언의 말씀을
제시하십시오.
3. 유대인에 관한 어떤 예언이 현재 성취되고 있습니까?
4.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5.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언급하는 네
가지 성구를 제시하십시오.
6. 왜 천년왕국 동안 죄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까?
7. 사탄이 풀려나면 모을 군대는 누구입니까?
8.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입니까?
9. 둘째 부활 때는 어떤 일이 있을 것입니까?
10.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로 말하라.
제36과 "두 종류의 지식":
TWO KINDS OF KNOWLEDGE
우리는 이제 과정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그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신약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 안에 있는 구속의 완성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새 창조물(새 피조물, 새 사람)의 특권과 합법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 예수의 이름에 부여된 권세를 연구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감격했습니다. 이제 이 과정을 마치면 배운 것을 일상
생활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은 우리에게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지식에 따라 행동할 때 이 과정에서 배운 구속과 새 창조에 대한 지식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까?
이 구속의 진정성은 말씀의 진정성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로서 세상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학계에서는 그것을 진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종류의 지식, 즉 자연인에 대한 지식과 계시에서
오는 지식이라는 두 가지 뚜렷한 부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의 지식>: The Knowledge of Natural Man:
세상이 가지고 있는 지식, 즉 자연인의 지식을 검토해 봅시다.
이 지식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지식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 한계는 무엇입니까? 삶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어느 정도 충분합니까?
<인간 지식의 근원>: The Source of Man's Knowledge:
첫 번째 질문은 인간 지식의 근원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식의 근원은 사람의 육체와 그 주위의
물질 우주입니다. 인간이 실재에 대해 아는 모든 것, 우리의 도서관과
교과서를 채우고 있는 엄청난 양의 지식 축적은 물리적 세계와 인간의 접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접촉은
인간의 감각 지각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더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과 갖는 모든 접촉은 그의 오감을 통해 그에게 옵니다. 오감은 중추신경계에 속하며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감각을 통해 얻은 것 외에는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만지고,
맛을 보고, 냄새를 맡을 수 없다면 얼마나 알 수 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여기 이 사실을 증언하는 생리학을 다루는 책에서 가져온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증식하는 원형질의 무의미하고,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덩어리여야 합니다. 몸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은
식물성입니다. 즉, 식물과 같습니다. 식물은 움직이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식물의 생명 과정은 즉각적인 환경에서 가장 원시적인 화학적
및 물리적 변화에 반응하여 수행됩니다. 중추신경계는 우리가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가졌던 모든 접촉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인간은 오감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 하늘,
풀, 바다, 기타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스 켈러(블라인드 여성)를 봅시다. 그녀는 촉각, 미각, 후각의 세 가지 감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촉각은 오감을 가진 사람들의 지도 아래
그것을 통해 세상과 삶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해 전혀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이 오감을 통해 가져오는 감각 물질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실재를 찾는 감각을 돕기 위해 현미경, 분광기, 망원경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구들은 그의 감각이 물리적 세계와 접촉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었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그는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우주와 생명의 형태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현미경과 울트라현미경을 통해 그는 생명체의 가장 미세한 형태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박테리아에 대한 지식과 영역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접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망원경의 도움으로 그는 천상의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육안으로 사람은 2천에서 4천 개의 별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망원경의 도움으로 그는 수십만 개의 별을 볼 수 있고 사진 건판으로는 수백만 개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광기를 사용하여 별의 구성을 알고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많은 물리적 힘이 있지만 인간은 이러한 힘에 민감하고 기록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된 다른 발명품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는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자연의 힘의 법칙과 과정에 익숙해졌습니다.
인간을 그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여 활용하게 하셨고, 육신의 감각으로 얻은 지식의
축적과 오랜 연구와 연구로 오늘날의 위대한 문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식의 근원이 물리적 우주에
대한 인간의 감각 지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감각은 육체에 속합니다. 그들은 물질과 접촉할 수 있을 뿐이고, 사람의 모든 접촉은 오직 물질계와만 접촉할 수 있습니다.
<인간 지식의 한계>: The Limitations of Man's Knowledge:
우리의 두 번째 질문은 "자연인의 지식의 한계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앞것은 그것들을 분명하게 만듭니다. 시각을 가진
적이 없고 시력을 가진 사람과 접촉한 적이 없는 한 맹인은 자신의 네 가지 감각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진정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없거나 그의 마음에 그 특성에 대한 이해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색이 무엇인지
또는 빛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청각을 소유한 적이 없고 청각을 가진 사람과 접촉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네 가지 감각을 통해 우주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우주가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감을 가진 사람은 주변 우주의 실재에 대한
진정한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오감이 물질에 대한 지식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압니다. 우주에 대한 참된 그림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돕기 위해 그가 만든 모든 발명품은 물리적인 것이며 물리적 지식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대한 이유>: Reason for Atheism and Materialism:
유물론과 무신론이 발달한 것도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에 물질과 그 속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몸이 분해된 후에 존재할 수 있는 영적 특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몸이 존재하는
동안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태도가 자연스러운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제한된 오감으로 물질계 외에는 아무것도 접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감이 있는 사람이 영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사람이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논리적일 것입니다. 물고기는 사람이 "이 우주에는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습니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공됩니다. 인간 지식의 근원은
육체의 중추신경계이며, 그 한계는 물리적 우주와 물질뿐이다.
<합리적 사고와 감각 지각>: Rational Thinking and Sense Perception:
우리는 인간 지식의 근원에 대해 말할 때 잘못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은 감각 지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감각 지각에 기초하지 않은 사고, 추리, 반성 및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력과 추리력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각의 물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은 감각 지각이 있지만 합리적 사고는 없습니다. 합리적 사고는 감각 지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술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감 중 하나를 통해 마음에 떠오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질문에 도달합니다. 인간이 오감을 통해 얻은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 실재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이 지식은 인간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답하는 데 어느 정도 충분합니까?
Voltaire가 말했듯이: 인간은 별들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답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기 전에는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굶주림>: Man's Hunger for God:
사람이 오감을 통해 창조물을 연구할 때, 그는 지성 있는 창조주를 믿도록 강요하는 설계와
지능의 흔적을 보지만, 여전히 그분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Langdon Davies는 인간의 가장 큰 굶주림과 가장 큰 목마름은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모든 과학적 연구의 배후에 있는 동기가 신에
대한 인간의 굶주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창조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창조주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식을 습득하기를 원했습니다. 코튼은
"과학이 신을 발견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현대 과학적 의견의 심포지엄입니다. 그는 과학에 대한 탐구는 실재에 대한 탐구였으며 실제로는 신에 대한 탐구였다고 말했습니다. 과학의 첫 번째 경향은 신을 배제하기 위해 우주에 대한 기계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전하고 창조의 경이로움에 대한 지식에 도달함에 따라 우주의 위대한 기계 설계에는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과학이 신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며 망원경, 현미경 또는 분광기의 도움에 관계없이 시각,
청각 또는 촉각으로 그분을 발견하거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Mr. Cotton은 과학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신을 발견하고 인간이 죽음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결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물리적 도구로는 사람 안에 있는 영의 위치를 찾을 수 없으며
영이 육신을 떠난 후에 영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이 우리에게 문명, 천상 우주에 대한 방대한 지식, 지구에 대한 지식,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지식과 그들이 가져야 할 보살핌을 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항상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 자연인의 지식은 이 정도입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가장 먼 지점은 지성 있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과
함께 그를 아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원초적이고도 가장 큰 굶주림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육신의 어둠 속에서 더듬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이 과정의 처음 몇 과에서 우리는 인간이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유, 즉 인간의
반역을 보았습니다. 육체와 오감을 가진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알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참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입니다. 인간은 창조 시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을
때 그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영으로 경배한다고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이 물질적 우주에 있는 영의 집으로만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그의 삶에 적합했고 그것을 통해 그는 물리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만을 접촉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것은 그의 영을 통해서 였습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또는 후각은 인간에게 그의 고향인 물리적 세계를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그에게 하나님을 계시할 목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반역의
결과로 영적으로 죽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능력에서 절대적으로 멀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영적으로 죽고 육신의 감각만 남아 그 육신이 속할 수 있는 우주의 경이로움을 배웠지만 결코 창조주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려면 새로운 지식, 즉 감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지식, 세상을 연구하여 얻을 수 없는 지식이 그에게 주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의 필요를 이해하셨고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는 그 계시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이 계시를 접촉하고 그것을 통해 그의 창조주의 지식, 즉, 성경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감각들의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렸습니다(He has brought that Revelation down to
the level of man's senses that spiritually dead man might contact this
revelation and through it come to a knowledge of his Creator-the Bible).
<질문>: Questions
1. 왜 우리가 배운 것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2. 자연인의 지식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3. 인간이 만든 모든 발명품이 인간을 물질적 영역
위로 들어올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인간의 감각 지식의 한계에 대해 토론하십시오.
5. 물질주의와 무신론이 발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감각 지식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인간의 가장 큰 굶주림은 무엇입니까?
8. 과학이 결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자연인의 어떤 상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합니까?
10. 그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37과. "사람의 하나의 계시의 필요성"
: MAN'S NEED OF A REVELATION
지난 수업에서 우리는 인간이 육체적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을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한계와 하나님의 계시의 필요성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는 자연인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식이라는 두 부류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이 계시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물질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얻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대학을 채우는 교과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감각적 지식에 국한된 서로의 접촉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람의 영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습니다(고전
2:10-13). 마찬가지로 감각적 지식에 국한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말로 자신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영적인 진리와
영적인 말씀을 결합시키셨습니다.
<계시의 진정성>: Authenticity of the Revelation:
그러나 처음에 제시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한 지식에 따라 행동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속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경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까? 감각 지식에 따라 행동하듯이
이 계시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고,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참되다고 가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매우 철저한 과학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 기초하지 않은 영역이나 영역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이 계시에 적용되는
바로 그 의심과 비판이 자연인의 지식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의 기초에는 우리의 감각과 기억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R. A. 암스트롱이 말했듯이 "외부 세계가 있는지, 테이블이나 의자가 있는지, 큰 도시와
푸른 들판이 있는지, 넓은 물과 거대한 산이 있는지, 별이나 별이 있는지
의심하는 데에는 정확히 유사한 이유가 있습니다. 달이나 태양,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두 경우 모두 의심은 우리 자신의 타고난 능력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는 도구인지,
우리 자신의 겉보기 경험이 실제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일 뿐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현실에 대한 진정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경험이 중추 신경계의 작용-반작용 이상이라는 것을 결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외부 세계를 믿습니다. 그렇게 작동합니다.
Mr. R. A. Armstrong이 다시 말했듯이 "이러한 믿음(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 기억의 진실성 등을 의미함)은 효과가 있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으며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당화됩니다. 한 시간에 무수히 많은 삶의 일들이 무한한 다양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믿음은 병이나 모순 없이 모두 들어 맞지만, 잠시라도 그것들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완전히 혼란에 빠집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증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계시에 동일한 시험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작동합니까?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따라 행동하듯이 그 진실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까? 말씀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때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까? 삶의 모든 경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행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전능자가 그의 말씀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 현장에 임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가정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을 선언합니다. 그것의 진위를 고려하는 것조차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를 주로 시인하면 그는 구원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롬 10:9-10) .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즉시 그들의 삶이 변화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들의 삶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수년 동안 속박되어 있던 습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옛 정욕은 지나갔고 사랑하던 것을 이제 미워하고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들이 나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이름이 권위를 갖지 못하면 그분의 신성이 부인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성을 위태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이 수천 명의 삶에서도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의 권세가
예수 이름의 권세로 드리는 단순한 기도로 깨졌습니다. 매일, 매주 그
기적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암이 며칠 만에 치유되었다는 간증을 받았습니다.
유일한 설명은 이 성경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걸음>: The Faith Walk: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사실은 신앙생활의 기본 진리 중 하나입니다. 213 믿음의 행로는 여러 번 어려워 보였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는 모든 것에 대한 요구 조건으로 믿음을 두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많다. 그것은 축복을 얻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 같습니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 둘을 구별할 줄 알면 믿음의 행함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행함이 됩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을 참조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처음 여덟 구절은 이러한 관점에서 제외하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육신(감각)에 의한 행함과 영 안에서 행함이라는 두 가지 행함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9절은 "육체"라는 용어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그가 쓰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나는 성령께서 "육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두 종류의 지식의 빛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순전히 육체적 감각의 영역에서 삽니다. 우리는 지난 수업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세상과 갖는 모든 접촉이 중추 신경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육체 속에 삽니다. 감각적 증거에 의해 그는 감각을 즐겁게 하는 예술을 연마합니다. 인간은 물리적 영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문명은 인간을 그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문명의 모든 발흥은 도덕의 쇠퇴를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으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는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 전능의 영역에 속합니다.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의 영역입니다. 그 영역에서 말은 전능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는 영 안에서 살기를 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육신의 영역인 육체 안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이 행보에 대해 언급합니다. 전능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말은 힘을 잃었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과 자연의 힘과의 전투에서, 자기의 육체의 힘, 즉,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했습니다. . . .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그의 오감에 달려 있었습니다. 육신이나 감각으로 행하는 것이 영적으로 죽은 자의 행함을 표현함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영역, 정상적인 영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영에 나누어 줌(the impartation)으로써 영적으로 살아나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영역에서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영역, 즉 전능(Omnipotence)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은 그분과 하나이며,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에서는, 전능으로 충만한 말씀들이 없는 것들을 마치 그들이 있었고, 되었던 것 같이 부릅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대조했던 두 가지 행함(the two walks)이 있습니다. 로마서 8:5-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을 배제하고, 즉, 영적이고 신앙의 생활을 배제하고(excluding the spiritual and the faith life) 오감(다섯개의 감각)의 증거에 의해서만 사는 생각(mind)입니다. 그것의 끝은 죽음입니다(6절).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의 운명에 처한 몸에 속해 있고,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의 생각(mind)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고 사람을 위해 정상적인 영역으로 돌아온 자의 생각(mind)입니다. 영의 생각은 육체적 감각들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사는 생각(mind)입니다.
<새 사람의 삶>: The
Life of the New Man:
우리는 우리가 오감을 통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불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었고 더 이상 인간의 능력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에 속하며 옛 피조물에
속한 죄, 약점, 결핍, 질병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게 하려고 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12-13,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하되 성령이 가르치신 것으로 신령한 것은 신령한 말로 하라." 거듭난 사람은 이 말씀으로 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이라는 용어로 그리스도는 육체를 언급합니다.
새 사람은 감각적 증거나 연약함과 패배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그에게 계시해 주신 권위로 산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두려움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전능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어 "힘"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모든
필요에 생명, 치유, 축복을 가져다 주는 능력이 없는 말은 없습니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그에게서 나가는 말씀은 그가 보내신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어떤 사람도 "그것은 실패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의 말씀을 그분께
가져갈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롭게 된 생각(mind)>: The Renewed Mind
거듭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옛 생활을 따르지 않고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생각(mind)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새 창조 안에서 행하는 데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4장 23~24절 "또 너희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사람이 그의 특권의 충만함 가운데 살 수 있으려면 그의 생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롭게 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배운 생각입니다. 옛 창조의 생각은 감각적 증거로 삽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생각은 말씀에 의해서
삽니다.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교제 가운데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충족시켜야 할 재정적 필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그에게 올 수 있는 수단들(means)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어떤 소망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나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정직하심(integrity: 온전하심)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그 말씀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그리스도인의 생각(mind)이 새롭게 되었다면, 그는 그 돈의 실제적인 소유 안에 있을 때처럼 그 말씀이 말하는 것에
있어서 동일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만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각적 증거만큼이나 그에게 의미가 있습니다(God's
Word means as much to him as sense evidence). 질병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는 질병에 의해 압도됩니다(overcome). 그러나 말씀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the Word declares that by His stripes we are
healed). 그 성경구절은 실제적인 치유의 증상들 만큼이나 그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좋게 만들기 위해 그것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for
God's ability is behind it to make it good). 결론적으로 새롭게 된 생각은 온전히 말씀으로
사는 생각입니다. 이 학습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것에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질문>:
다음을 토의하십시오:
(a) 사람의 하나의 계시의 필요성
(b)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필요를 만족시키셨습니까?
(c) 말씀대로 우리가 살아야 할 필요성.
<NOTE>:
**(위의 한글번역본의 영어원본: The English Text of this Korean translation): "THE BIBLE IN LIGHT OF OUR REDEMPTION" - BASIC BIBLE COURSE by E. W. KENYON: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Click the link below.
https://drive.google.com/file/d/1vfu4ETTiIDQAu-4EP14_Vp6bVg6dgkO6/view?usp=share_link
If you click the individual link of No. 1 through No.11 below, you can read each of them.
아래의 1번부터 11번까지의 링크를 각각 클릭하시면 글을 하나 하나 읽으실 수 있습니다:
1) "신앙생활의 실패요인과 해결책" ("Reasons for failure in life of faith and the solutions"):
Please note that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born of the Holy Spirit' and 'Being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is explained in the middle of this website (in Korean first and in English next). 이 웹사이트의 중간 지점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의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한글 먼저, 영어는 다음에 기록됨).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05/spirit.html
2) "당신의 영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Listen to your spirit"):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06/blog-post.html
3) "예수, 치료자" ("Jesus, the healer"):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1/jesus-healer-by-e-w-kenyon.html
4) "예수, 그 놀라운 이름" ("The Wonderful Name of Jesu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1/4-wonderful-name-of-jesus-by-e-w-kenyon.html
5)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Jesus,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2/12/mans-need-of-mediator.html
6) "성경에서 증거하는 우리의 구속" ("Our Redemption testified in the Bible"):(This article is on this page.); (이 글은 이 페이지에 나와 있슴.)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1/6-redemption.html
8)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 있는가?"(How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by A. W. Tozer: In 한글(Korean) & English; click below link to read i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8.html
https://drive.google.com/file/d/1XzL6PNaQoAbuFwFQ9VD7z3HxPoLE92cQ/view?usp=share_link
9)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 by 케네스 해긴:
[How You Can be Led by the Spirit of God?] by Kenneth E. Hagin:
*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Korean text):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please CLICK the link below.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05/9.html
10) “하나님을 추구하기” (“The Pursuit of God”) by A. W. Tozer: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in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in Korean & English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3/12/11-mystery-of-holy-spirit.html
12) (book) “성막으로부터 가르침” (Teaching from the Tabernacle) by C. SUMNER. WEMP:
한글 & 영어 (영어 텍스트는 한글 텍스트의 마지막에 놓여 있슴: English text is placed at the end of the Korean text):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내용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Please click read the link below to read the contents:
https://spiritruledlife.blogspot.com/2024/10/12-tabernac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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